끄적이기/일상 | Posted by Mirae 2005. 5. 30. 03:43

lkin.kaist.ac.kr

KAIST 수강지식인.
가을학기 시간표를 짜 보아요~

라고 끝내려고 했지만 할 말 있다. -_-

이거 만들면서 겪은 몸고생 마음고생은 정말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지.
삘 받았으니 실컷 하소연이나 해볼란다.

리더는.. 아무리 일을 적게 맡는 것처럼 보여도 최소한 서너 배는 더 고생하는거다.
서너 배? 아니 최소한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일들의 합 이상으로 고생한다.
시킴 '당하는' 입장에선 전혀 알 수 없는거다. 물론 쫌만 생각해보면 알게되지만..
혼자만의 스케줄도 관리하기 힘든 것인데(자기관리 서적들이 왜 그렇게 지천으로
널려있겠는가) 하물며 여러 사람한테 작업 나눠주고 진행상황 체크하는 것은..
직접 해봐라. 도대체가 개인적인 사정들이 왜 그리 자주 생기는지, 왜 한 번 말해서는
절대 안 고치고 다섯 번 여섯 번을 말해야 고치는지, 이때까지 꼭 해오자고 다같이
정해놓고도 왜 꼭 안 해오는지, 몇 시에 모이자고 했는데 제 시간에 모이는 놈은
왜 아무도 없는지... 속 터지는 일 투성이다.

팀장은 원래 스케줄링만 잘해도 성공하는 거랜다. 초짜 팀장이 그런거 알리 있나.
리더는 일도 많이 맡아야지!라는 생각에 그냥 다 떠맡아버렸었다.
혼자 밤새가며 스켈레톤 다 짜고 제반이 되는 함수들 만들어내고 디비 설계하고
로그인모듈 만들어내고 디자인 갈아엎고 과목사전 만들고...
식음을 전폐한다는 문자 그대로였다.
그 자체가 나름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게 다가 아니다. '너 좋아서
미친 듯이 만들었으면 그만이지, 무슨 대가를 더 바래?'라고 말하는 건 '너 좋아서
연구했음 그만이지, 무슨 대가를 바래?'라고 말하는 거나 똑같다. 그 최근에
회자되는 '과학자는 순수하게 과학만 좋아해서 연구해야지, 돈을 바라서는 안
된다' 따위의 망언이나 같은 꼴이다 그말이다.
난 졸라 열심히 했다. 미친듯이 했다.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노력 좀 알아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나쁜가?

요즘은 혼자 울화통이 터진다.
같이 일했던 팀원들마저,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싶다.
누나는 시키기만 하고 하는 일이 뭐가 있냐는 둥,
별로 대단한 시간을 투자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신기하게도 많이 만들어졌다는 둥
(그 당시 나는 여러 사람이 나눠서 작업하기 힘든 부분들을 전부 혼자 떠맡아서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을 새고 있을 때였다. 당근 이 말 듣고 속터졌다)
이거 설계가 너무 잘못되지 않았냐는 둥(일단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말 부터가
잘못된 말이다. 완전 허접으로 짠 것도 아니고 여러 사이트 들여다보면서
고민 많이 한 설계다. 내가 밤새서 설계할 때 같이 논의하기는 커녕 제 할일 다
챙기고 다니던 녀석이 이런 말 하면, 짜증 안 날 수가 없다구.)

프로젝트 회의 한 시간을 위해서 나는 서너 시간씩 고민하고 설계도를 그렸다.
여러 사람이 적당히 분담해서 미리 해올 수도 있는 일이건만 애들은
'숙제가 있으면 부담스러워요, 그냥 모여서 해요' 따위의 말로 일축해버렸다.
회의를 진정한 '회의'로 만들기 위해서, 즉 여러 사람의 머리를 모아야 하는
일에만 오로지 집중하기 위해서, '이건 분명히 한 사람이 맡아서 일관성있게
해야 하는 일인데'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나 혼자 맡아버렸다.
그거 좀 애들한테 시키면 안되냐고?
애들 시키면 싫어하거든. 시켜도 절대 안해오거든. 팀장은 언제나 팀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줘야 한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아는거니까, 자꾸 싫어하는 일
시키면 싫증내니까 그냥 다 내가 한거다.
그렇게 배려해줬는데... 생색내는 것 같아서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는데...
그러고도 억울하단 소리를 듣게 되다니 정말 화가 난다.

사실 나는 책임감'만으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즐겁지 않은 일이라도, 설사 하기 싫은 일이라 해도 책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꾸역꾸역 해치워버린다. 그럴땐 개인적인 용무고 사정이고 모두 뒷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일만 아는 냉혈한으로 보지 마시라. 그렇게 책임감에
불탄다고 해서 또 그 때문에 제껴둔 개인적인 일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겨울 방학에, 난 내가 '바라는' 것은 모두 포기했었다.
따뜻한 집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것, 음악을 듣는 것,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것, 운동,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
그리고 그 모든 걸 포기하고 내가 '해야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건 불과 얼마 전에서야 깨달은 일이고,
그동안 속 태우느라 이제껏 앓은 적 없던 위염이란 녀석을 얻기도 했다.

겨울 방학, 그때 이미 나는 내가 미친듯이 불태우고 있던 노력과 시간과 열정이
어디에도, 어떤 형태로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태우는 족족 고스란히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괴로웠지만,
책임감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쓴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사람들의 무심한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서 다시금 확인하는 지금은
더욱 마음이 쓰리다.
사람들은 이런 나의 노력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다. 팀원들조차 그렇다.
이걸로 많은 교훈을 얻었지, 라고 자족하기에는 재주만 실컷 부리고 실속은
못 챙기는 내가 정말 바보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실속이라 하긴 뭐해도.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
대외적으로 홍보라든지 공지사항 같은, 공식적인 활동을 할 때에는
그 팀을 이끄는 리더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무슨 대외홍보처 같은 부서가
따로 있는 거대한 조직이 아닌 이상.
그런데 얼마 전에 한 후배가 '누가 봐도 공식적인, 팀을 대표해서 쓴 것 같은'
글을 비비에스에 올려 공지를 했다. 점잖게 한 마디 했다. 이런 건 팀장이
해야 하는 일이다, 라고. 즉각 동방에서 자리를 빼던데 이게 섭섭해서였을까.
그런데, 보통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잘 몰라서 그랬겠지'라고 넘어갈 수
있었을 일인데, 그리고 조곤조곤 후배의 섭섭합을 달랬을텐데,
난 그날 내내 서운함과 억울함과 뭐 여러가지 때문에 속이 쓰려왔다.
저기 위에 잔뜩 썼잖아. 실컷 일해놓고도 아무도 몰라줘서 섭섭해 죽겠는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쪼금이라도 생색낼 수 있는(그래봤자 자기만족이지만)
기회(?)가 그렇게 공지라도 띄우는건데, 나로선 억울할 수 있지 않아?
그리고 여기저기에서(그친구가 공지를 띄웠던 게시판을 비롯) 그 후배 한 명을
치하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나는, 솔직히 얘기하면 정말 속상했다!
내가 제일 열심히 했으니까 저 칭찬 내가 받아야 하는 건데, 뭐 이런건 아니다.
그래도 팀원들 중에선 가장 열심히 한 녀석이었으니.. 칭찬받을만도 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나에게는,
대체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누가 더 열심히 했나를 따지려는 게 아니라, 난 이게 억울한거다.
내가 팀장으로서 노력했던 그 시간들을, 남자친구와 엄마를 빼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어쨌든 많은 경험이 되었잖아. 실력이 늘었잖아. 그럼 된거 아냐?'
글쎄. 어떤 일이든 이만한 노력을 쏟아붓고도 경험이 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얻은 것은 있지만, 그건 내가 정말로 갈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때 정말로 1순위로 하고 싶던 일은 다른 거였으니까.
무슨 댓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서럽고 억울하기
그지없다.
유치한가? 전에도 말했다구. 인간이란게 고매한 목표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막상 까뒤집어보면 그런게 다가 아니라고.

저 따위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다니, 리더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이 없군. 이라고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각종 리더쉽 어쩌구에서는 리더라는 걸 무슨 고고한 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한한
포용와 이해심과 희생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있지만, 웃기는 소리다.
리더도 사람이다! 리더라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들을 감추고 좋은 낯빛만 보이려
하는 것도 일종의 위선 아닌가. 그런 획일적인 리더의 상 따위를 강요하는 거 자체가
황당한 발상이다.

요즘은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현대는 자기PR시대. 낭중지추는 옛말이지.
조금이라도 잘난 구석이 있다면 무조건 떠벌릴 것.
조금이라도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걸 침소봉대해서 떠벌리고 다닐 것.
그래도 사람들이 겨우 알아줄까말까 하다는 것.
많은 업적을 이뤄놓고도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건 자기만족,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걸 바라다간 혼자 속만 썩는다는 것.
이 룰을 몰랐으니 나는 위염에 걸려도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