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 | Posted by Mirae 2005. 8. 18. 23:36

움베르토 에코

기억력을 저주해가면서 책을 읽었다. 이렇게 수많은 지명과 인명이 등장하고, 게다가 그 이름들이 서너 번씩 입 속으로 외어도 뒤돌아서면 싹 까먹어버릴 그런 것들이라면! 사실 더한 것도 많겠지만 난 그런 것에 원체 적응이 안 되어있다.. -_- 그렇지만 이런 걸 읽다 보면 느끼는 것은, 대충 대여섯 명 남짓한 인물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소설가는 정말 부지런하거나(수많은 복잡한 캐릭터들을 세밀하게 배치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설정에 공을 들이거나) 아니면 단지 게으를 뿐이거나(소설 전체를 지배할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 몇몇에 의존하거나 자신의 오감이 받아들여온 세계를 묘사하는데 만족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기 위해 각지를 여행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을 보면 왠지 공정치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지만, 그들 생각에는 내면의 글을 발견하겠다고 매일 책상머리에 앉아 공상에 잠기는 것이 더 치사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으, 말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바우돌리노
책 뒤의 소개를 보면 '모든 중세의 신화를 가르강튀아적인 박식으로 녹여낸 소설이다'라고 되어있다. 음. 가르강튀아적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온갖 신화를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가끔 스쳐가는 익숙한 신화 속 이름들, 우스꽝스럽게 재편된 일화들을 발견하면서, 나이를 먹어도 도대체 철이 들지 않는 이 아저씨들의 무용담이 전혀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나온게 아니라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분명히 여기 나온 기괴한 이야기들에는 다 출처가 있을 것이다.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것은 내가 그 이름과 그 일화들을 알기 때문이니, 여기에 나오는 그 모든 배경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움베르토 역시 자기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을 것을 상상하면서 한껏 재주를 부려본 것일테고.

장미의 이름
수도원의 도서관을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작가도 이 광경을 꿈꾸는 듯이, 음미하는 기분으로 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확 묻어나는 걸 보면 이 작가는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 그들의 시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화가들이 지나간 르네상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하)권은 도서관에도 서점에도 없어서 못 읽었다. 택배나 기다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