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열풍이 지나간 지도 제법 되었고, 싹 다운받아놓고 광분하며 n번씩 돌려보던 것도 벌써 두 달은 족히 된 일이건만.
생뚱맞게 이런 주제로 기다란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은 어제 신나게 마셔댄 알코올 탓이리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캐릭터의 변천사>

프리퀄과 클래식. 영화 내의 줄거리에 따르면 프리퀄-클래식이지만 현실에서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하면 클래식-프리퀄이다. 숙취로 멍해진 머리로 침대에서 몇 시간째 뒹굴, 뒹굴 하면서 클래식의 주요 캐릭터들과 프리퀄의 주요 캐릭터들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20년 세월의 간극을 느꼈다...

레아 vs 파드메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강인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 표현에 있어서는 20년 세월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다.
웬만한 남자들이라면 말도 못 붙여볼만큼 당당한 여장부 레아. 헤어스타일이 촌스러운 것은 시대의 영향이니 어쩔 수 없다 치지만 한 솔로의 이죽거림에 대꾸하는 저 팍팍한 선머슴같은 태도란! 그 당시의 페미니즘을 선도하는 여성상이란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강인하고, 때로는 저돌적이며, 남자를 경계하고 전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 (아 물론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말했지만 레아는 그래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럼 이제 파드메를 볼까. 시종 두세 명쯤 붙이고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을 듯한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화장, 화려한 의상까지. 그녀는 자신의 미를 가꾸는 데에 열성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집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수완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강인하지만, 저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중하게 계산된 전략을 발휘한다. 남자는 경계의 대상도 전투의 대상도 아니며, 공존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그녀는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를 가꾸고, 가정을 원하며, 눈물을 보일 줄도 안다.
'강인한 여성상'이란 것은 확실히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는 모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 역시, 파드메와 같은 여성상 쪽이 좀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vs 아나킨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까 말한 '강인한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남자라는 것. 그러나 이들도 역시 많이 다르다. 히로인과 사랑에 빠지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려면 그 시대가 용서할 수 있을만큼 괜찮은 남자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괜찮은 남자의 요건 또한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은 어떤 상황에서건 당당하고 호쾌하다. 표현에 있어서도 몹시 거칠고 직선적이며, 사고 또한 단순한 편이다. 그의 머릿 속은 의리와 명분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나킨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남성상을 보여준다. 아나킨에게는 두려움이 있으며,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화면에서 몇 번이고 눈물을 보인 그가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연인과 대화하는 방식은 지극히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의리도 명분도 아닌,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메트로섹슈얼이라든지, 꽃미남 선호 풍조;라든지 하는 것들로 이미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시대는 남성적인 남성보다는 양성성을 지닌 남성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방식
레아와 한의 맺어짐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안 맞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아귀가 맞는 둘의 성격 때문. 처음 레아를 본 한은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야!'라며 감탄한다. 레아는 한의 거침없는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이제껏 자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 끌리게 된다.
반면, 아나킨과 파드메는 어떤가? 그들의 성격이 찰떡궁합이라는 실마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아나킨은 잘생겼고 파드메는 예뻐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_- 어린 아나킨은 파드메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건 뭐 그냥 무조건 외모만으로 승부나는 게임이다. 한편 파드메는 젊은 아나킨의 강렬한 눈빛공세에; 홀딱 넘어가버리게 된다. 필연성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쯧쯔..



<클래식과 프리퀄에서의 대립 양상에 대해>

양성성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클래식의 정확한 선 긋기 식 이분법과 프리퀄의 다소 모호한 대립 구도도 비교할 만하다.

선과 악
클래식에서, 다스베이더는 절대적 악인이다. (마지막에 돌아선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돌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즉, 중간과정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루크와 벤은 악에 대립하는 선의 수호자이다.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프리퀄에서는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린다. 다스베이더는 다름아닌 선의 수호자 제다이의 그림자였으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아나킨이 그렇게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과정이 결코 불연속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며, 이는 클래식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강인함과 나약함, 남성성과 여성성
클래식에서 한과 레아는 시종일관 씩씩하고 당찬 모습만을 보여준다. 반면에 파드메와 아나킨은 유능하고 강인한 직업인(-_-)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한 면모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또한 한과 레아는 남성성과 여성성 중 한 가지만을 표현하는 캐릭터이다. 한은 전형적인 남성적 캐릭터이고, 레아 역시 캐릭터로 치면 선머슴에 가깝다. 그러나 파드메와 아나킨에게는 두 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여성성도 존재하고, 남성성도 존재하는, 양성성의 모습을 더 쉽게 찾아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상반되는 듯한 개념이 섞인 채로 인물에 투영된다는 것 또한 클래식과 굉장히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오비완과 젊은 오비완에 대해>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늙은 오비완은 전형적인 '현인'의 모습이다. 루카스가 그에게 간달프 같은 이미지를 주문했다고 하니 빼도박도 못할 이야기. 그는 현명하고, 세상의 지혜와 경험은 다 가지고 있으며, 능글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안 맥그리거가 연기한 젊은 오비완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상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젊기 때문에, 그는 아직 원칙을 신봉하며 예외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젊기 때문에, 그는 노인네의 능글맞은 유연한 대처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고집불통과 완고함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이건 반대잖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젊은이들은 현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원칙주의자에 고집불통이어야 한다.라는 개인적인 견해는 차치하고라도, 이야기에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오비완은 지나치게 능글맞으며 유연하다. 시도때도 없이 눈웃음을 흘리고 다니는가 하면(점잖아야 할, 그래서 허튼 웃음도 자제해야 할 것만 같은 제다이가!) 웬걸, '협상가'로 우주에 이름을 날리고 있기도 하다...
아나킨이 다크사이드로 가는 과정에 좀더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아나킨의 마스터로서 오비완이 실격이었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오비완에게는 아나킨의 섬세함을 달래줄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 설명에 실패하고 되려 능글능글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오비완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아나킨은 '잘 보듬어주고 잘 가르쳐놨는데 저 혼자 폭주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 우주에서 제일 질나쁜 비행청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