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9. 24. 23:41

Recursion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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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30분밖에 안 지났을텐데도 벌써 몇 갠가의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복잡한 이야기가 남겨놓은 잔상이 거미줄처럼 남아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한다. 이불을 걷어내려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어둑어둑한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해서 텅 빈 것 같고 사물들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낸다. 더듬거리며 전화기를 찾아 손에 쥔다. 익숙한 이름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다 말고 쓴웃음을 짓는다. 어린애같잖아? 비웃자, 이럴 때는 스스로를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 조롱을 퍼부어도 좋다. 정말 한심해서 봐주기 힘들구나. 창피함에 몸이 비틀릴 지경이다. 실소를 접고 몸을 일으켜 형광등을 켠다.

대단치는 않지만 약간의 시장기도 있고, 늦어지기 전에 슬슬 나가봐야겠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남방을 고른다. 양 쪽 소매에 팔을 끼우고, 뒤집어진 깃을 반듯이 한 다음, 맨 윗 쪽 단추부터 채운다. 그런데 내가 왜 서두르고 있지? 손을 멈춘다. 천천히, 느릿하게 단추를 채운다. 다시 속도를 빨리해 본다. 다시 느리게. 그리고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어 본다. 나는 눈썹하나 까딱않고 늑장을 부리면서, 녀석에게 거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시간이라는 녀석은 조금은 툴툴거리겠지만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을 것이다. 제가 별 수 있겠나. 조금 전의 조소는 잊은 채로, 오늘 저녁의 주도권은 내가 잡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뿌듯하다.

톤을 적당히 죽인 엷은 분홍색의 트렌치코트를 걸친다. 계절의 변화를 은근하게 즐기며 드는 나만의 축배다. 무슨 말이냐면, 가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트렌치코트를 걸친다는 것도, 해가 짧아지면 세로토닌의 분비가 감소해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기 쉽다는 식의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일 수 있는 나의 이상한 ‘환절기 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문을 나서며 습관처럼 불을 끄려던 손을 멈칫한다. 그대로 두고 가는 게 좋겠다. 돌아와서 문을 밀치자마자 밝은 불빛이 쏟아지면 그것도 나름대로 반가울 것 같다. 문을 나서고, 길을 걸어 식당에 도착한다.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다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어색해하는 건 그런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쪽이다.

수저를 놀리면서, 단어와 단어를 모으고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본다. 어릴 때부터 즐겨온 놀이 비슷한 것이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낼 때는 잊어버리곤 하는데, 많은 말을 입 밖에 내고 나면 지쳐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고독을 즐기는 사람 같지만 사실 난 그 반대였다. 두려웠다. 세상과의 관계를 빼 버리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을거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웃음이 많은지 적은지, 낯을 가리는지 안 가리는지, 나약한지 강인한지, 혼자일 때는 나의 이 모든 특성들이 조금씩 엷어지며 사라져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보다시피 혼자를 자초하고 있다. 혼자이건 그 어떤 사람과 함께 있건 변하지 않는 자신의 특성을 발견하기엔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원을 그리는 길을 돌아온다. 바라보는 눈은 없지만 조금 더 꼿꼿하게 걸으려 노력한다. 아니 사실 바라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먼 발치 따라오는 뒤에서, 양 옆에서, 또 저 멀리 있는 건물의 창가에서, 나의 걸음걸이와, 가볍게 핸드백을 쥔 손, 발을 디딜 때마다 약간씩 흩날리는 머리카락, 깜박이는 눈을 훔쳐보고 또 훔쳐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시선이 내게 묻는다. 흔들리니? 아니. 외롭니? 전혀.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맘에 드는 걸. 너무 자신에게 빠지는 건 경계해야 할 걸? 허, 그 정도로 심각하게 빠지기엔 내 눈이 좀 높아서 말야.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