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믈렛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내친 김에 이거나 마저 올리고 잘랍니다.
<인간과 기계> 숙제 2탄 - 20년 뒤의 자서전.
(아아 이런 즐거운 숙제를 다 내주다니.. 참 좋은 과목 아닙니까 ㅎㅎㅎ)
A4 2장 쓰라고 했는데 신나서 버닝하다보니 그만... 길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20년 뒤에 제가 뭘로 먹고 살고 있을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직업 얘기 나오면 슬그머니 화제 돌려서 '어? 벨이 울린다' 내지는 '스물 한 살의 나에게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을테니 비밀이다. 후훗' 따위로 무마하려 했으나... 교수님께서 읽다가 화내실 거 같아서-_- 그러니까 '억지다!!'라고 생각되더라도 그러려니 넘어가주세용.
감상의 포인트:
1. 요리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2. 독신생활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3. 있지도 않은 직업을 만들어내느라 글쓴이가 겪었을 고초를 헤아려본다.
“잠깐만요!”
숨이 턱에 찬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찬다. 도대체, 좀더 세련되게 접근해 볼 수는 없는 걸까? 뛰어오는 모양새가 꼭,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쫓아 뛰는 스무 살 청년 같아서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만다. 아, 실수했다. 웃어버리다니. 어느새 내 앞에 다다라 숨을 몰아 쉬던 저 철없는 남자가 숨을 고르고 씩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내일 저녁은 어때요?”
스스로에 대해 유별나다는 말을 하는 게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이제 누군가가 내 생활에 파고드는 것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더구나 이렇게 갑작스럽고, 인위적인 방식이라면 더욱더 싫다. 친구들이 하나 둘 가정을 꾸려 떠나는 동안 혼자 남겨지는 생활을 선택한 지도 오래다. 한때는 나도 사랑에 들떴고 행복한 가정을 꿈꿨지만, 몇 번의 연애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난 혼자인 쪽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용기만 철철 넘쳐흐르는 저런 타입은 딱 질색이다! 쌀쌀맞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대꾸한다.
“죄송하지만 내일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럼..”
문을 밀치니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이 밀려든다. 우선 가장 밝고 커다란 불을 켠다. 주방으로 가면서 나는 조금은 품위 없게 입맛을 다시며 손을 비벼본다. 어린 시절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재미를 붙인, 아니 반쯤은 혼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야 했던 것이 바로 요리였다.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점검한다. 싱싱한 양배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까 그 남자를 황급히 뿌리치고 오느라 깜박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느타리 버섯과 양파, 대파를 흐르는 물에 씻어 송송 썰어준다. 달걀을 풀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맞추고, 버터를 프라이팬에 녹인 후 풀어 놓은 달걀을 붓는다.
지금의 자유로움이 좋다. 친구들이 하소연하는 상사의 잔소리도 없고, 언제 들어올 거냐고 바가지 긁어대는 남편도 없다. 일터에서 걱정해야 할 아이들도 없고, 사실 하루 종일 묶여있어야 할 일터도 없다. 말하자면 프리랜서다. 아, 달걀이 엉겨붙기 시작한다. 프라이팬의 밑바닥에 틈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면서, 주걱으로 프라이팬을 젓는다. 오늘 낮의 계약은 꽤나 만족스런 조건으로 성사된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나는 서서히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만큼 내가 내걸 수 있는 조건도 늘어갔다. 하는 일이 뭐냐고? 얘기하자면 긴데... 소금을 어디에 뒀었지?
달걀 표면이 연한 갈색이 된 것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아까 썰어둔 채소들을 프라이팬에 얹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쉬운 대로 양배추 대신 있는 과일들을 깎아 볼에 담고 드레싱을 뿌린다. 과연 이 일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던 것들이 결국은 내게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을 난 많이 겪어왔다. 그러니까 이제는 무엇에도 초조해하지 않을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느긋하게, 될 수 있는 한 이것저것 최대한 보고 듣고 지금처럼 맛보고 요리하면서 즐기는 것이다. 어이쿠, 오늘의 나는 묘하게 철학적이고 싶은 모양이다. 부친 달걀로 익힌 채소들을 감싸서 접시에 놓고 토마토 케첩을 얹는다. 이제 다 된 오믈렛과 샐러드를 식탁에 차린다. 혼자만의 호화로운 식탁 완성!
첫 술을 떠서 맛을 본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군, 혼자 중얼거려본다. 내 인생에서 처음 끓였던 라면은 퉁퉁 불은데다 국물이 너무 많아 반쯤 먹고 버려야만 했고, 내 인생에서 처음 타 본 커피는 내가 맛봐도 끔찍하게 싱거웠지만 우리 부모님은 딸의 노고를 생각해서인지 뭐라 핀잔도 하지 않고 끝까지 마셔주셨었다! 물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계신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는 가끔 부모님 댁에 가서 특별요리를 해 드리고 칭찬도 받곤 하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흔이라는 나이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일흔의 부모님 앞에서 칭찬을 받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소녀처럼 행동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소녀라... 불현듯 내가 소녀였던 시절이 떠오른다. 우연히 나가게 된 컴퓨터 경진대회에서 입상하게 되고, 매년 개최되는 그 대회에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던 열두 살 무렵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마침내 과학고를 거쳐 카이스트로 진학하며 품었던 컴퓨터공학도로서의 포부도 기억해본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컴퓨터 동아리에 들어가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깨달았던 순간도 상기해본다. 동아리 회장을 맡아 프로젝트 팀장도 맡아보고 나름대로 열정적인 전산과 학생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지, 아마도 그때부터 내 인생에 전환이 시작된 것이리라.
이전까지 방학마다 학교에 남아 홈페이지 제작 아르바이트니 동아리 프로젝트니 법석을 피우던 나는 그 해 여름, 훌쩍 인천의 집에 올라와 부모님께 유학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매일같이 지하철로 인천의 집과 서울의 영어학원을 오갔던 그 여름방학.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난 영어공부를 한다는 허울좋은 핑계를 대며 영화에 빠져들었고, 영어학원의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근처의 대형서점에 들러 서가를 누비며 마냥 설레어 했다. 마침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소녀 적부터 품어왔던 문학에 대한 동경이었다. 이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끓였던 라면이나 커피 뿐만이 아니라, 다섯 살에 쓴 내 생애 첫 일기나 여덟 살에 쓴 내 첫 소설에도 앙증맞은 추억담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책이든 뭐든 좋았다. 문학은 물론이고 미술이며 음악이며 영화까지, 인간의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라면 무엇이든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기가 다시 시작되어 학교로 돌아왔을 때,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은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전공 과목 수업들은 여전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지만 더이상 흥미 이상의 것, 가슴뛰는 설레임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여백이 많은 스케치북을 원했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온통 매료되어 버린 나는, 그 스케치북에 좀더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는, 내 손끝의 터치가 듬뿍 묻어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카이스트에서 학부를 마치고, 나는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미디어컨텐츠에 대한 것을 공부하면서, 나는 점차 이것을 경영학에 접목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나는 미국의 유수 기업들에서 경험을 쌓으며 나만의 독창적인 ‘미디어경영프로세스’라는 개념을 실현해 냈다.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이제 아름다운 제품, 아름다운 기업이라는 꿈을 만들고싶다는 욕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택한 것이 바로 ‘컨셉디자이너’라는 이름이다! 사실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컨셉디자인의 개념이 좁아서 컴퓨터 게임 등에 들어가는 원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좀더 거시적인 것, 그러니까 제품의 개발이나 회사의 경영 컨셉을 잡는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제품은 그 제품 하나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어떤 부분에 자리잡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지 등등, 그 제품을 둘러싼 주변의 문맥까지가 모두 제품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간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진 제품은 그 자체가 이미 환상이며 꿈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닌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나는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잡는 것을 돕는다. 제품의 기능, 외관 디자인에서부터 광고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이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회사의 경우도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빼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한부의 고용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살고있는 현대에, 회사 전체가 한 마음이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가슴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컨셉디자이너는 먼저 그 회사의 사람들, 중역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를 두루 만나보며 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 등을 파악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병행하게 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표점, 그들 모두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이상이자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지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획자나 경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경영 컨설턴트, 통계학자, 종종은 심리학자들까지도 동원된다.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는 각본이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고, 한 줄의 카피가 되어 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고, 그림이 되어 건물 전체의 외벽에 도색되기도 한다. 좌우간 회사 전체의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전산학과 밀접해보이지는 않지만, 카이스트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것은 컨셉디자이너로서의 활동에 상당히 유익한 도움이 되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의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에서 나온 추진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공학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논리적인 사고력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차별화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각종 컴퓨터 도구를 다루는 능숙함은 기본이고, 수학과 논리의 기초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시스템을 분석하는 능력, 여러가지 형태의 미디어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다양한 표현 방식을 고려하는 능력 등은 모두 전산학과에서 배운 것들이다. 덧붙여, 살다보면 생기는 무식한 수작업을 요하는 일은 슥슥 만들어 낸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소한 편리함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런, 생각에 골몰하느라 식사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얼른 한 술을 가득 떠서 입에 넣던 차에 조용한 공기를 깨는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입 안에 잔뜩 든 것을 우물거리느라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은 체 한다. 아니, 식사중이라는 건 사실 핑계고 아까 그 남자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다행히도 이내 벨소리가 끊겼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급하면 다시 걸어보겠지, 생각하며 또 다시 한 숟갈을 뜬다. 아, 다시 전화가 울린다. 급한 일인가?
여보세요.
“저, 접니다.”
이름도 없이 다짜고짜 말하는 태세를 보아하니 정말로 아까의 그 남자인 것 같다. 아깐 내가 조금 심했을지도 모르지, 잘 기억이 안 나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건넨 다음 물어준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저 그러니까... 드림미디어의 김 부장...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에게 첫 눈에 반한 남자입니다!”
저 당당함에 오히려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서른 후반쯤 된 남자가 왜 저리 서투르고 무모한 것일까. 물론 마흔이 넘은 아가씨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그리 흔하진 않으니 아주 약간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만...
아니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웃고 있는거지? 깔깔대며 웃고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이미 외출복을 걸치고 핸드백을 집어들고 있다. 뭐 그래,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저 남자 말마따나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눠보자.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혹시나 어쩌면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르고. 사실 환하게 웃어보일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렐 뻔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에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쨌든 저 사람이 서투르고 어색해 보이는 건 내가 아직까지 철딱서니 소녀인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철딱서니 소녀는 철딱서니 소년을 만나는 게 이치일지도 모른다. 문을 나서며 어깨를 으쓱해본다. 그래, 오늘 하루의 자서전을 써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쩌면 역사적인 날이 될 지도 모르니까.
헛. 다 읽으셨어요? ^^;
그러니까 이 상황인즉슨... 이미 반쯤 넘어간겁니다. 벌써부터 역사적인 날이 될거라고 예감하는 걸 보면요. 그 남자 눈웃음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예요. ^^;
뭐 만나고 오면 실망스런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정도 뱉어줘야겠지만요. 20년을 꿋꿋하게 솔로로 살아온 고집이 저렇게 쉽게 꺾여서야..!!
마흔 치고는 확실히 심하게 발랄하군요. 서른이라고 해도 못 믿겠다;;
오믈렛 레시피를 제공해준 네이버 백과사전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