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감상 | Posted by Mirae 2006. 2. 13. 22:05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자신도 말하길, 그에게 있어 역사적 상황은 그를 매혹하는 실존의 주제를 새롭게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내리쬘 때만이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 이국에 있는 어느 편협한 독자가 관심있는 부분만을 조각조각 기워내더라도 작가는 신경쓰지 않을 거란 얘기다. 궤변이지만.





요즘 시대에서 진지함이라는 건 코미디에서 놀려먹기 위한 도구로 더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시대의 철저한 일원이면서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그건 내가 비교적 진지함을 좋아하는 사람 축에 속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같이 모여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진지함은 재채기만큼이나 환영받지 못한다. 실수로 진지한 말을 내뱉었다면, 'excuse me!'를 붙이는 것만큼이나 잽싸게 '뭐 그냥 그렇다는거지!' 하면서 소탈한 웃음으로 마무리해주는 것이 관례다. 정말이다.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꽁꽁 얼려서 남극으로 보내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색을 하고 '아니, 정말로.' 같은 말을 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진지한 사람들이 좋다. 정확히 말하면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난 모든 사람들의 근원 깊숙한 곳에는 진지한 사람이 한 명씩 들어앉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진지한 말보다는 농담과 냉소로 비틀어놓은 말이 더 많은 까닭은 자기의 진실한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진지해지는 것보다는 농담으로 몸을 가볍게 하는 쪽이 더 쉽다. 농담만 하면서 실없는 사람 행세 하기는 싫고 진지해지기는 부담스러운 사람은 조금 더 머리를 써서 냉소라는 것을 택한다. 진지한 척 하다가 돌아서서 거기에 침을 뱉고 비웃는다. 그게 사실은 스스로의 진지함을 모욕하는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삶의 무게에 걸맞지 않는 진지함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선량함이, 악의없음이 드러나보여서 오히려 매력적일 때도 있는 것인데. 삶의 무게에 걸맞지 않는 냉소는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울 뿐더러 겉멋 든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피곤하다.
그렇지만 나라서 그런 치기로부터 자유로우냐면, 그건 또 자신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뻔뻔스럽게도 스스로를 '고작' 스물 두 살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런데 난 왜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 걸까. 내가 진지함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농담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무참히 짓눌러 버릴 수도 있었던, 열렬한 진지함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가벼운 낭만을 용납하지 못하던 그 세계가 부러울 정도는 아닌데. 아마 그동안 어지간히 언짢았던 모양이다. 실컷 써 놓은 심각한 문장을 희석하는 것이 가끔은 타협처럼 느껴지니까.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에서 발췌)

당시에 나는 그에 대해 증오밖에 없었으며, 이 증오란 것은 너무도 강렬한 빛을 발사해서 그 속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사라져버리는 법이다. 중대장은 내게 그저 앙심을 품은 교활한 쥐새끼같이만 보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 전체에 걸쳐서 끊임없이 젊음이 저지르는 오류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이해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포함한 내 나이 또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때때로 신경에 거슬렸던 부조화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