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6. 11. 4. 08:02

말, 그리고 생각들

"Maslow's Triangle을 생각해 봐. 네가 뭔가 기분이 나쁘면 체크해 봐야 할 리스트가 있어.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밥을 제대로 못 먹었나? 샤워를 안 했나? 어디가 아픈가?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는거야. 친구들이랑 주기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고 이런 식으로. 이건 bottom-up이야. 피라미드의 아래쪽이 없는 상태에서 윗쪽을 먼저 채울 수는 없어. 뭔가 대단한 걸 이루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 그럼 너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거야. 그건 치팅이야."

유레가 했던 말. 사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들은 당연한 말인 거 같은데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걸 잊고 살았다. 학교 공부에 매진하고 동아리 프로젝트에 매진할 때면 잠을 세 시간을 자건 밥을 거르건 방이 난장판이 되건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생활의 밸런스가 깨져있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깨달았지만, 그건 치팅이었던 거다.

그리고 또 떠오른 생각.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게 사실 별 거 아니야. 의식주 적당히 해결하고, 예쁜 마누라랑 아이들이랑 살고, 결국은 그거면 되는거야. 사회적 성공이니 뭐니 하는 건 사실은 진짜 행복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야' 라고 말했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지만 갑자기 이 친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긴 것 같다. 기본적인 욕구 - 의식주와 가정 등 - 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건 물론 허상이지만, 그런 기본적인 욕구가 또 행복이라는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도 사실은 대단히 어렵지만, 그게 충족되고 나면 다음 단계의 더 큰 욕구가 있고 이걸 충족해나가는 게 또다른 행복이 되는 것 같다고. 하긴 그 친구에게는 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나름의 논리가 있는 거겠지만서도.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가 뭘까. 타고난 능력의 차이일 것 같지는 않잖아. 내 생각은 그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계획성없이 소모해왔던 사람들이야. 즉각적인 욕구만을 충족하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뤄온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희생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겨온 사람들이야. 이를테면 나는 요즘 테드톡 보는 게 너무 재미있어. 그냥 이거나 하루종일 보고 싶어. 그렇지만 자, 나는 숙제를 해야 하고 내 프로젝트들을 해야 하니까 조금만 보고 차후로 미뤄두는거야. 그런 희생이 결국은 내 미래를 만드는 거니까."

이것 역시 지극히 정석적인 말이지만 늘상 스티븐 코비의 3사분면에 매달리고 있거나 4사분면으로 도피하곤 하는 나에게는 또 몹시 찔리는 얘기였다.;;


"내가 파티에 열광하는 건 사실 외로워서예요. 나는 사람들하고 끊임없이 만나고 얘기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이렇게 타지에 와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거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지 않아요?"
"글쎄...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 인생은 항상 외로웠거든요. 오히려 여기서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것 같아서 덜 외로운 편이랄까요."


살로메와, 줄리아 남자친구의 대화. 옆에서 설거지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얘기에 슬쩍 웃음이 났다. 나도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된게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다'라는 거였으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빈 시간들을 온통 친구들과의 수다로 보내왔던 나는 대학 초년에는 하루를 수다로 정리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남자친구에게 모든 일상을 보고하며 살기도 했고, 때로는 사람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시러 다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혼자 있는 것 자체를 즐기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잘 되고 있는 건 아니고, 그게 어떨 때는 지금처럼 쓸데없이 긴 글을 쓰는 걸로 분출되기도 하지만. 하하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에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몫인 거라면, 인생이란 게 원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을 수 있겠지. 오히려 우연히 다른 위성과 조우하게 되는 그 드문 이벤트를 더욱더 소중하게 반길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