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10. 3. 4. 07:17

수트케이스 인생

Doctor Who 시리즈 중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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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roamed about this Earth
With just a suitcase in my hand,
And I've met some bog-eyed Joe's,
I've met the blessed, I've met the damned.
But of all the strange, strange creatures
In the air, at sea, on land,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I love you, you understand.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No, no.

I have wandered, I have rambled
I have crossed this crowded sphere,
And I've seen a mass of problems
That I long to disappear.
Now, all I have's this anguished heart,
For you have vanished too.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Just what is this man to do?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 "Love don't roam" Doctor Who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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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 처음 도착해서 다양한 몬스터들사람들을 마주치고 함께 일하면서, 분명 나는 이 '수트케이스 인생'의 감수성에 자극받았다 (가사는 이 짓 그만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표현이 또 괜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할 일 없는 주말이면 닥터후 시리즈를 마냥 틀어놓고 그들의 광활한 시간여행을 즐겼음은 물론이다.

허나 2년 후 나는.
만년 학생마냥 단칸방 사는 것에 싫증이 나서 이사를 한다.

굳이 이사를 해야하나, 그 수많은 잡일은 어떻게 감당하나, 회사 일은 늘상 바쁘고 살림 재주는 시원찮아 손님 하나 와도 내 마음의 평화가 위협받는-_- 마당인데 정말 구태여 일을 벌여야 하나, 지금 사는 집도 좁다는 거 빼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언제고 마음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으려면 살림살이는 가벼워야 하지 않나,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들 타국에서 짐 바리바리 싸들고 가족들 데리고 스위스엘 온 사람들이다. '난 몇 년 뒤에 여길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난 평생 여기 뿌리내리고 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인생에 변화가 생기면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새로운 지역에 가면 거기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누리며 살다가, 다른 지역에 가면 또 그렇게 적응해 나간다. 지금껏 나는 언젠가는 어딘가에 정착하고 살아야지, 그때까지는 편안함을 추구할 필요없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해왔는데, 어느덧 그런 무기한 연장이 지겨워져 버렸다. 떠돌이 살림도 이젠 할 만큼 했지.

2년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진 독일어로 떠듬거리며 집을 보러 다니고 지원서를 내고 계약을 하고, 이 집 물려받을 세입자를 구하러 부지런히 청소하고 집 보여주고, 이삿짐 센터들에 연락해서 가격 비교를 하고, 아 나갈때 청소 용역도 불러야지 걱정하면서, 이게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가 싶긴 하지만, 뭐 이게 다 훗날 돈 주고 못 산다는 경험이 아닌가, 그냥 그렇게 다독이고 있다. (또 모르지 막상 이사가면 좋다고 춤출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