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8. 9. 15. 15:51

Ars Electronica (1/2)

일주일이 한 달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어쩐지 시간감각을 좀 잃었어요. 연락이 뜸하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근황을 한토막씩 쓰는 건 재미없을 듯 해서, 지난 주말에 다녀온 알츠 일렉트로니카 얘기에 간간히 썰어넣겠습니다.

아, 피터가 찍은 사진들: http://flickr.com/photos/skatey/sets/72157607205649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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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처음으로 그럴싸한 휴가를 냈다. 슬로베니아 친구들이랑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리는 'Ars Electronica'에 가기로 한 것. 아예 좀 놀다 오자 싶어서 주말을 끼고 5일짜리 휴가를 만들고 한 달 전부터 기차표도 예매해뒀다. 물론 나중에 종이 더미 속에서 찾느라 고생했지만.

창 밖 풍경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원 풍경은 언제나 그림같이 예쁘고, 똑같다. 익숙해진 풍경을 별 미련없이 외면하고 노트북을 펼쳤다. 성과 평가 기간이라 자기평가서를 써야 했다. 지하철처럼 혼잡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좁은 '자기 공간'을 느낀다고 하던데, 참 맞는 말이다. 저쪽 맞은 편에 앉은 여자분도 딱 나같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데, 혹시 구글에서 일하시나,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집중해서 자기평가서를 끝냈다. 반 년의 성과를 마무리하면서 떠나는 기차 여행이라니 참 시의적절하지 않은가. 아직 여정은 한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완만한 구릉지와 야트막한 숲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이적 3집을 귀에 꽂고, 참으로 이런저런 사념이 쏟아졌다. 여기서 만난 온갖 종류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머릿 속을 왕왕 맴돌았다.

잘즈부르크에 들렀다. 사전지식을 준비할 여유같은 것도 없었지만, 실제로 내가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 그렇다. 아예 작정했으면 좋은 가이드북을 사든지, 아니면 그냥 지도 한 장만 구해서 걸어다닌다. 독일어로 된 안내문들이며 교통카드 자동판매기까지 취리히와 비슷해서 편안함을 느꼈다.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에메랄드빛 강이 큰 산을 향해 흘렀고, 바람이 산 내음을 닮아 향긋했다. 막연히 크고 현대적인 도시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작고, 무엇보다도 무척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현대적인 것의 침략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따뜻한' 날씨와 밝은 햇볕에 들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노천 와인카페에서 와인 한 잔과 디저트를 음미하면서,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한동안 그렇게 늘어져있었다. 아, 이렇게 좋은 건줄 알았으면 휴가 좀 자주 다닐걸. 오스트리아의 별미라는 이 디저트 이름은 또 까먹었지만 아무튼 훌륭했다. 저녁 무렵까지 잘즈부르크 강변을 맴돌다 다시 린츠행 기차에 올랐다.

린츠의 숙소에서 느지막히 일어나 아침식사를 놓쳤다. 지도 한 장을 구해서 트램에 올랐다. 음, 도나우 강이 여기 흐르고, 중앙역이 여기에 있고, 여기에 중앙광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틀림없이 여기에 내 일용할 양식과 카페인이 있을지어다! 예상대로 도착한 그곳은 100미터 전방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노천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나의 탁월한 '독일어권 도시 여행 능력'에 혼자 괜히 뿌듯해하며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아싸 무선랜도 잡힌다. 아이폰으로 트위터를 한 줄 날렸다. "In Linz Austria. Hat einen kaffe und eis in der hauptplatz. Warte meinen freuenden. Well hope this sentence makes sense :D" 한참을 늘어져있다가, 다시 길 잃은 강아지모냥 또 열심히 쏘다니고 햇볕을 만끽했다. 피부 좀 타면 타라지. 취리히의 부슬비에 갇혀있었을 구글러 친구들한테 자랑도 할 겸.

조금 후 슬로베니아 친구들이 린츠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루블리아나에서 운전해왔다고 했다. 피터, 유레, 보슈티안, 카야. 카야를 제외하고는 다들 2년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다. 현재 Zemanta라는 벤처를 차리고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다. 피터는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다 최근에 디자이너로 합류했고, 유레는 에반젤리스트로 전세계의 컨퍼런스며 캠프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보슈티안은 초기 창업멤버 중 하나로 CEO였다가, 이쪽 경험이 많은 형에게 자리를 물려준 상태. 카야는 보슈티안이 최근에 채용한 대외협력담당 쯤 되는데, 슬로베니아의 텔레비전 스타라고 했다. 카야와 보슈티안이 프레스 명찰을 받으러 가고 우리 셋은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반 년 만인데, 모두에게 많은 것이 변했다.

"유레, 이제 정말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삶이네. 멋진데. 기분이 어때?"
"그 장소에서는 대개 즐거워.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온갖 이야기들을 듣고 하는 것. 여행을 준비하고 이동하는 과정은 성가셔." 그리고 그는 한 다섯 가지쯤 되는 일화들을 죽 열거했다. 영국에서 환승기차를 놓치고 야간버스를 간신히 타고 새벽에 길 한 복판에 떨어진 일, 샌프란시스코 어느 공항에서 항공기 지연으로 밤샌일 등등. 피터가 스웨덴에 있던 유레를 방문했을 때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게 도착해 10월의 새벽에 짐을 끌고 라피스까지 걸어가야 했던 일화도 나왔다. "새벽 2시 3시쯤 되었을거야. 그 지역에 살아온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 스톡홀름에서 나는 아무도 몰랐어. 그러니까 중요한 건 네트웍이야. 미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가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이지. 그냥 처음부터 시작하는거야."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어떻게 처음 그 시작점을 만들지?"
유레가 씩 웃었다. "나만큼이나 지루해하고 있는 듯한 사람을 찾아. 대화를 시작해. 이 대화를 듣고 흥미를 느낀 몇 사람이 동참하기 시작해. 그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군중 하나가 만들어져. 거기에 있던 사람들과 모두 안면을 트도록 노력하지. 이게 시작점이야."
"흐음, 그게 스웨덴에서 나한테 접근한 방식인거야?" 웃음. "아니."

Ars Electronica라는 행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미디어 아트 페스티발'인데,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디어 아트'보다는 뭐랄까 좀더 geeky한 면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미디어 아트 행사이고, 전시작으로 선발되기 위해서 매우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린츠에서는 이 외에도 다양한 문화 행사를 많이 개최되지만, 미디어 아트 분야에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면 린츠라는 도시에 이목을 집중하곤 한다. 그리고 나처럼 geeky and artistic이라는 수식어에 혹한 사람들도 린츠를 찾는다. 행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설치예술인데, 간간히 세미나도 있고 라이브 퍼포먼스도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의 시가지에 20여군데의 크고 작은 전시장이 설치된다. 열심히 발품을 팔면 하루만에도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걸을 만한 거리이면서도, 도시 전체에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배치였다.
"흥미로운 게 있으면 시간을 들여서 봐. 뭐든지 궁금한게 생기면 부스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5일 동안 내내 그 부스를 지키고 있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슥 훑어보고 지나갈 뿐이고, 따분하지. 관심을 보이면 굉장히 기뻐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줄거야."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카페인을 충전하고, 하면서 돌아다녔다. 저게 뭐지? 싶은 것들은 피터가 종종 설명해주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보면..

- 새들과 상호작용하는 새 로봇. 얼핏 봐서는 둥지처럼 생겼는데,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을 휘익휘익 낸다. 숲에 놓아두면 새들의 울음소리를 학습하고 그에 맞게 자기 울음소리를 바꿔나간다고. 실제로 숲에서 실험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어떤 새들은 몹시 경계하며 달아나는 반면 어떤 새들은 지속적으로 주변을 맴돌면서 상호작용을 한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네 개의 로봇이 놓여있었는데, 로봇들끼리 서로 학습하면 간섭이 생기지는 않는지 궁금했..으나 부스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 비누방울 하프. 금속으로 된 막대기들이 하프처럼 꽂혀있고, 그 앞에 손잡이 달린 상자가 놓여있다. 손잡이를 드륵드륵 돌리면 비누방울이 나오면서 금속 막대에 부딪히고, 이것이 전도체 역할을 해 소리를 낸다. 비누방울이 퐁퐁 날리고 랜덤하면서도 듣기에 나쁘지 않은 멜로디가 울려퍼지는, 동화적인 컨셉이 귀여웠다. 보슈티안이 모델을 하고 피터는 줄곧 사진을 찍었다.

- 콘크리트 테이블 악기. 콘크리트로 된 단순하고 우직하게 생긴 테이블이 조명 아래 놓여있다. 테이블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 멜로디가 흐른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멜로디가 달라진다. 보슈티안은 한동안 그 콘크리트 테이블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 이 테이블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어떻게 만들 수 없을까. 어렵지 않을 건데." 나중에 알아본 원리는 광섬유로, 테이블에 뚫린 작은 구멍들로 들어오는 명도를 인식해 멜로디를 조합하는 것.

- (비디오 전시작) 뭐라고 불러야 하지... 스크린에 얼룩이 하늘하늘 흘러다닌다. 손을 대면 이 얼룩이 손을 따라 팔로 번져나온다. 스크린 밖의 얼룩은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인 듯 했다. 이걸 보며 떠오른 것이 유시진의 클로저라는 만화였다. 한 세대마다 '초즌원(;)'이 있고, 이 초츤원은 팔에 문신 비슷한 산스크리트어 문양을 가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초즌원에게 역할을 넘겨주는 의식에서, 그들은 서로 손목을 잡고, 이 문양이 손을 타고 흘러가 전달된다. 내가 이 얘기를 했을때 보슈티안에게 누군가가 싱거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우리들의 초즌원이냐?" "당연하지."

- (비디오 전시작) LED 속눈썹. 단 하나 뿐이었던 우리나라 작품이다. 눈 밑에 붙이는 점점히 박힌 LED인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반짝인다. 비디오에는 이 속눈썹을 달고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자신(박수미 씨)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한국 여성들의 큰 눈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는 거라고.

- 벽면 전체에 그리드로 붙은 스티커. 떼어서 다른 곳에 붙일 수 있다. 뗀다라는 것 행위가 그리드에 자국을 남기고, 붙인다라는 행위는 새로운 자국을 만들어낸다... 는 건 그냥 내가 대충 둘러댄 해석이고 중요한건 여기에 한글로 선명하게 '카이스트'라는 자국이 있었다! 동경대가 올해 이 행사 초청대학이라 일본 사람들은 잔뜩 봤지만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더랬는데. 누군가가 카이스트에서 왔다 간 모양이다.

- (퍼포먼스) 유리로 된 상자 안에 텅 빈 표정의 한 남자가 앉아있다. 눈과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파란 물 자국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그냥 그린 건 줄 알았는데 애들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음독을 한 거라고 한다. "해독을 하느라 몸이 파란 물을 뱉어낸거지". 그날 저녁 블랙베리를 확인하던 누군가가 어떤 블로그 포스트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아티스트들의 자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나> 카야는 강한 인상을 받은 듯 했다.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봤는데, 어쩐지 압도되었어. 정말로 텅 빈,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었어. 한참을 쳐다봤어." 그렇게 말하는 카야도 어딘가 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난 얼굴에 파란 물 자국을 하고 유리 상자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몇 백명의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그 경험 자체가, 뭔가 엄청난 느낌일 것 같아."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
Ars Electronica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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