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순호 생일파티에 갔다가... 유홍이가 뜬금없이 "페미니즘에 관심있니?"라고 묻길래 "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말하고 나서 바로 다음 순간에 아차 이건 아닌데, 참 비겁한 대답을 했군. 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남성을 이기고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이건 여성 뿐만이 아니라 남성으로서도, 아니 어느 성이라 칭할 수 없는 제 3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그때 나의 심리는, 유홍이는 꽤 취해 있었으니 귀찮은 언쟁을 벌이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혹은 '그럼 그렇지, 말 많은 여자애들은 다 저런다니까'라고 생각할 남자 친구들의 시선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비겁한 대답을 듣고 안심한 유홍이가 말했다. "사실은 난 남성 우월주의자거든? 근데 현정사 발표를 해야되는데 주제가 페미니즘이야.. 정말 하기 싫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듣고 충격받았다. 실망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늘상 '착하게 살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를 표방하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사람을 사랑하겠다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니?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내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서 "여성이라면, 아니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거 아냐? 너도 그렇지?"라는 식으로 말을 했으면 그는 적어도 자신이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극단적인 발언은 하지 못했을테니까. 어쨌든 그때의 내 대답이 종종 생각날 때면 나에게 화가 나지만,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곤 한다. 인종차별주의처럼,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편견들은, 말로써 설득시키려 한다고 쉽사리 바뀌는게 아니라고.
음 그래, 이런 말 조차도 여전히 비겁하다. -_-;

오늘 읽은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책인데 특별히 여자들에게는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책, 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듯 하다. 제목만 보고도 벌써부터 경기를 일으킬 남자분들이 눈에 보인다. ㅎㅎ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공존할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여튼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했다. 저자는 CNN의 선임 부사장인 게일 에반스. 양성간에 어쩔 수 없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서, 굉장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고 실용적인 해결책까지도 제공하는 책이다. 멋지다! 읽으면서 '어 이건 내 얘기잖아?'라고 생각한 구절들이 꽤 있었다.; 이런건 적어뒀어야 하는건데 말이지. 기억나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어떤 여자분의 사례. 늘 혼자 엄청난 양의 일을 떠맡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 문제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까지도 떠맡는다는 것.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문제를 설명해주고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게 나아요'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을 집에서 상을 치울 때 아이들이 치울 때보다 어머니가 치울 때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리기 때문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모두 떠맡는 것에 비유한다. 이것은 슈퍼우먼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만 좋지 않은 행위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상을 치우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일을 함에 있어서도 나누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말.
이 케이스는 최근의 나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동문회 홈페이지를 맡은 이후... 같이 만들기로 한 우현이가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다지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얘기를 좀 해보고야 안 사실인데 사실상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웹마스터를 해보긴 했어도 웹프로그래밍은 아주 조금 다루었을 뿐이고, 서버 관리 경험은 전무하다고 했다. 그래서 뭐... 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혼자서 꾸역꾸역 만들고 있었다. 내가 궁시렁거리면서; 작업하고 있는걸 보면 사람들(이라고 하면 내 주변엔 거의 다 남자분들 뿐이다;;)이 물었다. "왜 혼자 하니? 같이 하기로 한 친구가 안 도와줘?" 그러면 난 대답한다. "에휴... 사실 그 친구가 웹프로그래밍 잘 몰라서... 그냥 혼자 하는게 편해요." 그러면 남자분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 모르면 니가 가르쳐서 하게 만들어야지~!" 그땐 그다지 심각하게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그 책에 나온 정답인거다.;;;
뭐 여하튼 몇 주 동안 용수 뺨치게 연락이 안 되던(^^;) 우현이에게 결국 조금은 직설적으로 내 의사 표시를 했었고... 서로 오해를 풀고 다시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지금도 사실, 상을 치우는 임무를 아이에게 맡긴 어머니처럼 ^^;; 약간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 친구한테 너무 어려운 수준을 맡긴 건 아닌가, 내가 하면 훨씬 빠를텐데 그냥 내가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적어도 '동문회 홈페이지를 공동으로 제작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려면 그 친구도 이 정도는 해봐야 할거라고 생각한다. 웹프로그래밍 경험 쌓아둬서 나쁠 것도 없고. ^^

또...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한 것.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암시만을 주면 안 된단다.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암시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이 대목을 읽고, 작년 가을학기 시작할 즈음에 내가 스카 개발에 관심을 표명했는데도 왜 나를 개발팀에 끼워주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끌렸음에도, 나는 "저는 Perl을 잘 모르는데요..."라는 식으로 빙빙 돌리면서, 정작 마음 속에 있는 얘기, '잘 아는 건 없지만 같이 해보고 싶어요! 언어야 뭐 금방 익힐 수 있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_-;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자신감 넘치는 직설적인 언어는 잘난 척 한다거나; 재수없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우물쭈물하면서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줄어든 것 같다. FreeBSD 시스템은 전혀 다뤄본 적 없고 NNTP라는 단어조차 몰랐으면서도, 무작정 카이스트 뉴스 서버 관리자를 지원했다. 실제로 해 보니 그렇게 겁먹을 일도 아니었고, 모르는 것은 이제부터 알면 될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또 다른 경우는... 동문회 홈페이지 만들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웹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었다. 웹프로그래밍은 정말로 단 한 줄도 해본 적 없고 내 홈페이지는 여기저기서 자바스크립트를 퍼와서 꾸민 것이었으니 -_-; 그렇지만 해보고 싶었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웹프로그래밍이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내 동문을 위해...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도 일단, 내가 존경해오던 선배님들이 하시던 일을 내가 맡을 수 있게 된다는 데에 욕심이 났다. ^^; 그래서 '저 플래시나 PHP는 한번도 안 써봤는데요, 서버 관리는 좀 해 봤고 Perl도 좀 쓸 줄 압니다!"라고 주장해서 이걸 맡게 되었다. ^^; (음 위 스카 이야기엔 Perl을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그 이후 겨울방학에 혼자서 조금 다뤄봤었다^^;)
내가 맡은 이 두 가지 일 모두 아직도 진행형이고, 이것들 때문에 쏟아부은 시간과 새운 밤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얻었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 물론 아직 남은 일들도 잘 마무리해야지.

우악.... 글이 엄청 길어졌다. 오늘 읽은 책이 이거 말고 또 있는데... <도둑맞은 인생>이라는, 20년간 사막의 감옥에 갇혀 지낸 한 어머니와 그 여섯명의 아이들의 이야기. 이 책이 훨씬 두꺼웠으나 이 얘긴 나중에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