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하고도 절반이 되었다. 시간은 천천히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여러 사람이 팀을 떠나고 새 사람들이 자리를 메꿨다. 졸탄은 유부남이 되었고 라슬로는 어느덧 건강한 아들 둘을 거느리게 되었고 브루스도 딸을 둔 애아빠가 되었다. 사람들이 점잖아서 미래씨는 언제 결혼하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다. -_- 팝은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나는 취리히에 온 이후로 여지껏 크게 자르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이제 너무 길어 불편한 지경이 되어 슬슬 자를 생각을 하고 있다.
# 브루스의 버즈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왜 작은 인간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은 트름 없이는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못하는 겁니까?"
# 애아빠의 고통
미하올이 종종 브루스에게 인사를 대신해 하는 말이 있다.
"요새 잠은 자고 다녀요?"
그러면 브루스는 대답 대신 잠이 부족해 초췌한 얼굴을 보여준다.
# 헝가리 마을 하나
라슬로가 말했다. "헝가리 시골에서는 부동산 값이 바닥을 기고 있어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집을 처분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방이 몇 개나 되고 모든 설비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아늑한 집인데 고작 몇백만원 밖에 못 받는 거예요. 시골 마을들에서는 멀쩡한 별장 한 채가 몇십만원 밖에 안 되는 일도 허다해요. 시골에는 일자리가 없고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스웨덴 사람 잉게마가 물었다. "혹시 외국인으로서 몇 채까지만 살 수 있다는 제약 같은게 있나요?"
"글쎄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사고 싶어서요."
# 주민들의 반발
라슬로가 말했다. "헝가리의 한 지역에 공항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정부가 소음 등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해 주지 않아서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요. 그들이 생각해낸 유일한 대응책은 집집마다 마당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하는 거예요. 파일럿들이 보고 눈이 부셔서 운항에 지장이 있으라고."
내가 물었다. "정말 이상한 대응책이네요. 왜 정부를 고소해서 합의금이라도 받아내지 않는거죠?"
"그렇게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가 아니니까 그렇죠."
# 잉게마의 취미
날씨가 노곤노곤 따뜻해지던 봄날에 잉게마가 말했다.
"지난 주말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무 화단에나 해바라기 씨를 심었어요."
"아니 왜 남의 화단에다..?"
"나랑 내 여자친구는 해바라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여기저기 씨를 뿌려두면 나중에 지나다니다 보이지 않을까 해서.."
# 토마슈의 취미
점잖은 폴란드 사람 토마슈가 신기한 박쥐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길래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작년에 박쥐 구경 행사에 갔었어요."
"뭐하는 행사예요?"
"박쥐가 잘 나오는 지역에 가서 박쥐를 관찰하는 거예요."
# 리차드의 취미
"어릴 때부터 내 폰트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어요."
"아, 지금 수업 듣는게 도움이 되나요?"
"지난 번에 '반 아이들' 밴드 씨디 봤죠? 거기 사용된 폰트가 내 폰트예요."
# 한반도 문제
지도 자료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영국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관련 팀에 고쳐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그다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라슬로가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으니, 나중에 남한 도시랑 북한 도시가 합쳐지는 일이 생기거나 하면 다시 그 팀을 찔러보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그 팀에 다시 압력을 넣겠다는 얘기다. 내가 팀에 있다보니 사람들이 종종 한국 관련 농담을 하곤 한다. 이번에도 그냥 우리는 킬킬 웃고 있었는데 디에나가 정색을 했다. "남한이랑 북한이 뭐가 어떻게 됐다고요?"
"아니 그냥 가상의 예제예요.."
# 한반도 문제 2
사랑니 근처 잇몸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못 견딜 지경이 되어 치과에 갔다. 잇몸 치료를 받고 왔는데 더 아파서 밤새 응급실까지 다녀오는 드라마를 연출한 후 당장 그 다음날로 발치 수술을 받으러 갔다. 마음 좋아보이는 스위스 사람인 치과 의사가 딴에는 신경을 써 준다고 내게 물었다.
"참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북한이 남한 선박을 공격했다고 하던데요?"
"뭐라고요?"
꼭 내가 뉴스를 안 챙기는 날이면 나라에 일이 생기고 남들이 먼저 안다..
# 기술의 중심에 선 촌스러운 사람들
팝은 말한다. "사실 아직까지도 나는 트위터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라슬로는 말한다. "나는 내 사생활을 내가 자발해서 공개한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요. 그런데 내 마누라는 자꾸 우리 가족 사진이랑 얘기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는데 말릴 수도 없고…"
졸탄은 되묻는다. "시장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foursquare 얘기)"
나는 그냥 귀찮아서 안하는 축이다.
# 기술의 중심에 선 촌스러운 사람들 2
뉴욕 팀들에서 활발하게 쓰는 IRC 채널이 있다. 취리히 쪽에서 워낙 반응이 없으니 이들이 기괴한 통계 수치를 들여가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하는데..
- 대화방에서 말한 단어의 양과 코드의 양에는 양의 상관관계는 없지만 음의 상관관계도 없다.
- 대화방에서 말한 단어의 양과 직급 사이에는 경미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듯 하다.
그밖에 각 팀의 규모와 팀이 언급된 횟수에 대한 그래프 등이 줄줄이 따라왔다. 문제는 우리 팀 사람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시간낭비예요."
"아무래도 쓸데없는 잡음을 잔뜩 생성하는 대화방 로봇을 개발해서 사람들을 쫓아낼까봐요."
# 화장실 비치 물품
구글 오피스들에는 화장실에 무료로 쓸 수 있는 물품들이 비치되어 있는데, 품목이 오피스마다 조금씩 다르다.
취리히 오피스의 여자 화장실: 디지털 탐폰. 데오도란트.
뉴욕 오피스의 여자 화장실: 애플리케이터형 탐폰. 데오도란트. 콘돔.
서울 오피스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나중에 다시 들러봐야겠다.
# 엘리베이터 문화
배드민턴이 끝난 후 식사 시간. 내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언젠가 회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여느때처럼 가만히 서서 계기판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같이 탄 스위스 아저씨가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너 참 수줍음이 많다고. 아마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무 대화가 없어서 그랬나봐요. 근데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둘 중 어느쪽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수줍은 사람이 되는 거지요?"
독일 아저씨 마이클이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불편한 장소야. 신체적으로 굉장히 근접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면 유럽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그래서 무슨 시덥잖은 대화든지 나누길 바라는데, 이경우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 건 보통 여자들이야. 북서부 유럽 지역,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남자들일수록 여자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거나 심지어 말을 거는 것조차 꺼리는 경향이 있지. 마초로 오인받을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랄까."
옆에서 듣던 소냐가 말했다.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내가 살던 북미 지역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즉시 사람들이 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예의예요. '나는 당신의 바쁜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 언제든 문이 열리는 즉시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거든요."
# '구글년'
배드민턴 후 식사 시간. (IBM에 근무하는 오스트리아 청년) 토마스가 와인 한 병을 주문해 나눠 마실 것을 제안해 그리 했다. 저녁을 먹은 후 계산을 하러 점원이 테이블로 왔을 때, 나는 내가 주문한 음식들을 말해주고 와인 반 병 값을 더해 값을 치렀다. 이윽고 토마스가 계산을 할 차례가 되었고 그는 내가 반 병을 지불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거 뭐야, 내가 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과장해서 자존심이 상한 척 했다.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마이클이 옆에서 심술스럽게 말했다.
"구글년이라서 그래.."
# 스위스의 경찰 업무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스위스의 경찰 업무는 다음과 같다.
-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 처리 이후 사고 현장을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묵묵히 청소한다.
- 주말에 호숫가 주변을 자전거로 느긋하게 순찰한다.
- 일광욕 하던 주민에게 봐 줄 것을 부탁하고 경찰복과 권총을 호숫가에 두고 물에 뛰어든다. (-_- 들은 얘기라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다)
- 식당가. 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이 기준보다 xx센티가 더 삐져나왔다는 이웃 식당의 민원에 줄자를 들고 나와 성화를 열심히 들어주고 한 시간 동안 테이블을 잰다.
가끔 이런걸 보면 난 참 희한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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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쓰려니 기억이 가물가물.. 별 순서도 없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며칠만에 햇볕이 났으니 햇볕을 보충하러 나가야겠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다음에!
간만의 포스팅으로 취리히에 살면서 두 차례 셋집을 구하고 이사를 한 저의 조촐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침을 적어보기로 합니다. 혹시 취리히에 처음 정착하려는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젤이나 베른 등 다른 칸톤은 또 규칙이 살짝 다르기도 하니 기본적인 틀만 참고하셔야 하겠습니다. 스위스에 정착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 분들에게도, 스위스라는 특이한 나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적어보았습니다. 제 독일어 수준이나 여기 살아온 내공이 부족하여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고치겠습니다.
스위스의 임대주거환경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세를 얻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취리히에서 조건이 좋은 집들의 경우 30여명의 희망자가 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위스에는 전세라는 개념은 아예 없고 월세가 주를 이룬다. 가구가 들어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가구가 있는 경우는 집세가 더 비싸고 단기 계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구가 들어있지 않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냉장고, 스토브, 오븐, 때로는 식기세척기 등을 갖추고 있다.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월세가 연립 주택 형태의 아파트들이며, 대개 이들 건물 지하에는 공동 세탁실이 있다.
스위스에서는 거실도 방 한 칸으로 친다. 보통 분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열린 형태의 거실인 경우에도 방 한 칸으로 친다. 방 개수가 0.5로 끝나는 것은 식사 공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거실에 연결되어 있든지 독립된 공간이든지).
스위스에서는 층수가 0부터 시작한다. 0층 또는 EG라고 하면 지상의 첫번째 층을 말한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집세가 높아진다. 발코니가 딸린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외부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트인 공간이다.
집세는 천차만별이다. 공동 생활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취리히에서 부엌과 샤워가 딸린 단칸방은 대략 1000프랑 내지 1500프랑 정도인데 (2010-08-16 기준, 1프랑 = 1123원), 이보다 낮은 가격인 경우 관리 상태가 좋지 않거나 사기(!)인 경우가 많다. 두 칸짜리 집 (침실 하나 거실 하나)은 1500프랑 내지 2000프랑, 건축 연도나 레노베이션 여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세 칸짜리 집은 2000프랑 내지 3000프랑이 일반적인데, 취리히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에 널찍하고 설비가 최신식이고 등등 옵션이 붙으면 월세는 끝도 없이 올라간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정원이 딸린 독립 주택의 경우 10000프랑 월세도 드물지 않다.
스위스의 일반적인 서민 아파트들은 스타일리쉬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깔끔하고 건축 연도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있는 편이다. 취리히는 월세가 다소 비싼 편이지만, 도시 내의 어느 지역에 살든지 치안 수준은 대략 비슷하며 주변 생활 환경도 균일하게 쾌적한 편이다. 도시 중심으로부터 기차로 20분 - 1시간 거리 내의 지역들은 세금 혜택이 있고, 월세가 많이 저렴하며, 자연과 가깝고,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분위기를 가진 마을들이다.
자 이제 셋집을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Step 1. 정보 구하기 방법 1. 스위스에서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는 월세 시장 웹사이트가 있다. www.homegate.ch 본인이 원하는 예산, 평수, 방 개수 등을 입력하고 이메일 알림 서비스를 등록한다. 물론 무료.
방법 2. 이민자 커뮤니티 포럼, 메일링리스트 등을 구독하고 몇 가지 키워드로 (rent, apartment 등) 필터링을 한다.
방법 3. 주변 아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열심히 흩뿌린다. 이 방법의 장점은 비교적 적은 경쟁률을 뚫으면 된다는 것과, 집 나가는 사람과 대개 안면이 있는 경우이므로 이사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가구를 싸게 물려받거나 하는 편의를 봐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법 4. 시간이 없고 돈을 쓸 용의가 있다면 아파트 헌터를 고용하는 방법도 있다. 헌터들이 정보를 구하는 경로도 거의 homegate로 비슷한데,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이들은 임대 관리회사들과 연락망이 있어 homegate에 올라오기 전에 매물 정보를 입수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물론 독일어를 할 수 있으므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 또한 직업상 부동산 보는 눈이 있으므로 방 배치나 집 위치등을 보고 가격 대 품질 비 등을 말해준다. 서류 작성을 대신 다 해주니 본인은 서명만 하면 된다.
스위스의 이사철은 4월 1일 전후와 10월 1일 전후로, 이사를 계획한다면 이 시기를 노리는 것이 좋다. 시장이 활발하여 선택의 폭이 넓다.
Step 2. 집 보러 다니기 조건에 맞는 집을 발견했다면 가서 들여다 볼 차례이다. 대개 정해진 날짜와 시각에 공개 방문이 한 차례 있다. 방문하겠다고 따로 등록할 필요는 없고 그냥 그 주소로 직접 찾아가면 된다. 그 집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성)을 알고 가야 어느 벨을 눌러야 할지 알 수 있다. 공개 방문 일정이 없는 경우에는 전화연락으로 따로 일정을 잡는다.
대개 현 세입자가 살고 있는 상태에서 집을 보여주는 경우이므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여 세입자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지 미리 물어보는 것이 예의이다. 상식의 한도 내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괜찮다. 이웃들은 어떤지, 거리로부터의 소음은 어떤지, 왜 이 집을 떠나는지 (보편적인 질문으로, 묻지 않아도 먼저 말해주기도 한다. 집에 결점이 있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목적이 큰 듯 하다) 등등. 한국에서의 상식적인 항목 외에 기본적으로 눈여겨봐야 할 점들:
- 난방 방식 (라디에이터가 가장 흔하지만 바닥난방도 드물지 않다. 한국인으로서야 바닥난방이 최고..)
- 창문들은 빈틈없이 잘 밀폐가 되는가? (난방과 방음, 방충에 영향을 준다)
- 주방 취사 시설이 마음에 드는가? (스토브는 세라믹 열판이 신식이고 금속 열판은 비교적 구식이다. 가스 스토브는 드물며 종종 구식으로 친다.)
- 공동세탁실 사용에 예약이 필요한가? (예약이 없는 쪽이 물론 좋다. 가능하다면 세탁실도 둘러본다.)
- 건축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돌아다녀보면 타일이나 바닥재, 빌트인 가구들의 차이로부터 대략 감이 온다. 이것을 보는 이유는 건축 시기가 이 집 구석구석의 스탠다드를 어느 정도 말해주기 때문이다. 부엌 설비며 화장실 내부까지, 지어진 당시의 표준적인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Step 3. 지원하기 (Anmeldung) 꼼꼼히 따져본 결과 집이 마음에 들었다면 지체없이 지원을 해야 한다. 공개 방문 직후에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좋다. 기본적인 서류는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지원서와 함께 팩스로 보내고 서면으로도 보낸다. 팩스는 품질이 나빠 잘 안 들여다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소홀히 할 수 없다. 지원서는 보통 공개 방문을 통해 직접 받아온다. 모두 독일어로 되어있으나 겁먹지 말고 번역 차근차근 돌려가면서 하면 어렵지 않다. 주의할 점은 어떤 경우 지원서를 내고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 벌금을 내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항은 지원서에 적혀 있다. 다음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지만) 지원서와 함께 보내야 하는 필수 서류들:
- Pass: 여권 사본
- Auslaenderausweis: 거주허가증 사본
- Bestaetigung des Arbeitgebers: 본인의 직장으로부터의 고용 사실 확인서. 연봉도 함께 적혀있으면 좋다. 풍문에 의하면 세입자를 결정할때 대체로 연봉 순으로 한다고 한다. 선호 직업군도 있어서, 스위스 은행에 근무한다면 단연 1순위이다.
- Betreibungsauskunft: 채무관계 확인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문서가 첨부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집주인이나 임대 회사들은 지원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문서는 현재 본인이 이 나라에서 가진 채무 액수를 증명하는데, Betreibungsamt라는 정부 기관 사무소에 가서 일정 수수료를 내고 받아온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일주일 내로 우편으로 도착한다.
서류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본인의 직업과 인간 됨됨이와 기타 등등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스위스 사람이 있으면 지원서에 적으면 큰 도움이 된다. 집주인이나 임대 회사가 이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서류 상에 나타나는 다른 여러 지표보다도 다른 스위스 사람의 한 마디를 더 신뢰하는지도 모른다.
Step 4. 새 집 계약 체결하기 (Mietvertrag) 좋은 소식은 전화로, 나쁜 소식은 편지로 온다. 지원서를 내고 1-2주일 내로 연락이 오니 항상 전화 대기하자. 삼대가 덕을 쌓았다면 한방에 연락이 오겠지만 일반적인 경우 서너 번 지원을 하면 한 번 가량의 행운이 있다. 열 몇 군데를 지원해서 싹 떨어졌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낙담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리자.
합격의 기쁜 소식을 받았다면 며칠 내로 계약서가 서면으로 도착한다. 두 부가 오는데 둘 다 서명해서 보내야 한다. 한 부는 집주인의 서명을 얻은 후 돌아올 것이다.
Step 5. 살던 집 계약 종료하기 (Kündigung) 새 집과의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현재의 집주인에게 계약을 종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절차는 반드시 서면으로 해야 하며 (독일어든 영어든 상관은 없으나, 의사가 명확해야 한다), 가능하면 우체국에서 '몇날 몇시에 누가 누구에게 우편물을 보냈다'는 보증을 받는 것이 좋다. 5프랑을 내면 우체국 측에서는 우편물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긴다. 후일에 집주인과 문제가 생길 경우 이 보증이 필요할 수 있다. 편지를 보낸 후 집주인 혹은 임대 회사와 구두로 재차 확인하여 확실히 한다.
계약서는 보통 일년에 2회 (새 계약서인 경우 3회), 특정한 날짜에만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고 적혀있다. 보통 4월 1일과 10월 1일이 계약 종료일이며, 이 날짜가 되기 3개월 전에 서면으로 의사를 알려야 유효하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아무때나 계약을 종료하는 것이 가능한데, 새 세입자를 구해와서 집주인이 승낙하거나, 새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해서 월세를 낸다거나, 둘 중 하나의 조건 하에 가능하다.
Step 6. 살던 집 새 세입자 (Nachmieter) 구하기 3개월 앞서 계약 종료를 통보한 것이 아니라면, 새 세입자를 구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지금 당장 현재의 집을 물려받을 세입자를 구하기 시작해야 한다.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로부터 지원자들에게 나눠줄 지원서를 받는다. 주변 아는 사람들 중에 희망자가 있다면 집주인에게 간단한 소개를 해 주고 그 희망자에게 지원서를 건네주는 것으로 문제가 끝날 수도 있다. 주변에서 새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까 언급한 homegate 웹사이트에 집주인이 광고를 내게 되고, 집주인과 협조하여 공개 방문 날짜를 정하고 희망자들에게 집을 보여주게 된다. 공개 방문이 곤란한 경우는 본인의 전화번호 등을 광고에 올려 방문 일정을 잡기도 한다. 희망자들에게 지원서를 나눠주고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에 서류를 보내라고 말해준다.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했음을 알려오면 책임은 끝난다.
Step 7. 이사 (Umzug) 준비하기 집 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취리히에 갓 도착해서 달랑 수트케이스 하나가 살림의 전부라면 문제는 간단하겠으나, 이미 살림이 있다면 이사를 해야 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가장 권하는 방법은 이케아 등 가구점에서 이사박스를 사다가 직접 짐을 싸는 것. 짐을 나르는 데는 이사용 밴과 친구들의 도움을 빌리는 방법이 있고, 이삿짐 센터를 부르는 방법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삿짐 센터를 부르는 것을 추천한다. 짐은 날라본 사람들이 잘 나른다.. 시간당 120프랑 내지 150프랑인데 조건이 약간씩 다르므로 여러 회사에서 견적을 받아서 비교해보고 결정할 것. 미리 예약을 하고 계약서가 서면으로 오간다. 보험 적용 범위도 확인하자.
직접 짐을 쌀 여력이 없다면 포장이사를 부르는데, 가격은 대략 3명에 시간당 200프랑이라 한다.
Step 8. 새 집 물려받기 (Übergabe) 새 집을 물려받는 절차는 그냥 열쇠만 건네 받는 것이 아니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를 예상하자. 이전 세입자와 새 세입자가 만나 열쇠를 건네는 것은 물론,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에서 전문가가 나와 청소 상태와 기물의 상태를 꼼꼼히 검사하고 규격 문서에 기록한다. 이 규격 문서는 기입이 끝난 후 집주인이 한 부, 이전 세입자가 한 부, 새 세입자가 한 부씩 나눠 가진다. 새 세입자는 집의 결점이 발견되면 자신의 입주 전에 고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집주인과 이전 세입자가 동의한다면 실제 계약일보다 며칠 앞서 이 건네주기 절차를 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전구나 전등, 샤워 커튼 등은 집의 일부가 아니므로 이전 세입자는 몽땅 가져갈 수 있다. 없으면 당장 불편한 것들이므로 새 집에 이사갈 때는 이것들을 미리 준비해가자.
Step 9. 살던 집 청소하기 (Reinigung) 취리히에서는 집에 이사를 들어갈 때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갈 때 청소를 한다. 이 청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얼룩 한 점 없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위스 집주인들의 청소검사는 그 악명이 대단한데, 흰 장갑을 끼고 온 구석을 쓸어본다는 말은 사실이고, 가방 한 가득 온갖 종류의 거울들을 가져와서 다양한 각도로 구석구석을 살펴본다는 말도 있고, 화장실 변기를 핥아봐서 아무 맛이 안 나야 한다는 낭설까지 있다. 스위스의 모든 집주인이 이리 악독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검사하는 최소한의 필수 종목으로 알려진 것들로는 다음이 있다:
- 문짝과 각종 선반 윗 부분의 먼지
- 창문, 창문틀, 창문 밖의 블라인드 먼지
- 부엌 환풍기 내부
- 수도꼭지와 배수구 내부 (나사를 다 풀어서 내부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 (드물게) 콘센트 내부
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처음 집 들어갈 때 냈던 보증금에서 청소비용을 제하게 된다.
검사 항목이 이러하므로 이것을 일반인이 직접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전문 청소 용역업체를 부르면 집의 면적에 따라 500프랑 내지 2000프랑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용감한 사람들이 직접 청소를 하기로 결심하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의 한결같은 소감은 '친구/배우자와 둘이서 이틀 내지 사흘 꼬박 청소를 했는데, 몸이 고된 것도 고된 것이지만 이렇게 고생하고서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덤태기를 쓸 수 있다는 공포가 더 힘들더라'는 것이다. 그냥 웬만하면 용역을 쓰자. 프로페셔널들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용역업체의 또다른 장점은, 청소검사에서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을 해결할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보증 항목이 있는지 계약서를 잘 확인할 것.
Step 10. 새 집 즐기기 처음 몇 주 간은 이웃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살피자. 정말로 저녁 10시 이후에 변기 물을 내리면 득달같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인지? (이것은 일반적인 스위스 아파트들의 규칙으로 적혀있는데, 체감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물론 철저히 지키지 않는다. 은퇴한 노년층이 주로 사는 아파트들에서는 좀더 엄격하다고 한다) 정말로 일요일에 빨래를 하면 주의를 받는지? 세탁실 사용후 청소는 어느 수준으로 하는지? 저녁 몇 시 이후에 건물 출입문을 잠궈야 하는지? 발코니 난간에 붉은 꽃이 담긴 화분을 달아야 하는지? (그런 것이 암묵적인 규칙인 건물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계약서와 부록으로 딸려온 규율로 적혀있는 수많은 것들을 다 지킬 수는 없다. 이웃들이 꼬박꼬박 지키는 것, 느슨한 것, 등을 파악하고 사람사는 것처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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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roamed about this Earth
With just a suitcase in my hand,
And I've met some bog-eyed Joe's,
I've met the blessed, I've met the damned.
But of all the strange, strange creatures
In the air, at sea, on land,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I love you, you understand.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No, no.
I have wandered, I have rambled
I have crossed this crowded sphere,
And I've seen a mass of problems
That I long to disappear.
Now, all I have's this anguished heart,
For you have vanished too.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Just what is this man to do?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 "Love don't roam" Doctor Who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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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 처음 도착해서 다양한 몬스터들사람들을 마주치고 함께 일하면서, 분명 나는 이 '수트케이스 인생'의 감수성에 자극받았다 (가사는 이 짓 그만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표현이 또 괜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할 일 없는 주말이면 닥터후 시리즈를 마냥 틀어놓고 그들의 광활한 시간여행을 즐겼음은 물론이다.
허나 2년 후 나는.
만년 학생마냥 단칸방 사는 것에 싫증이 나서 이사를 한다.
굳이 이사를 해야하나, 그 수많은 잡일은 어떻게 감당하나, 회사 일은 늘상 바쁘고 살림 재주는 시원찮아 손님 하나 와도 내 마음의 평화가 위협받는-_- 마당인데 정말 구태여 일을 벌여야 하나, 지금 사는 집도 좁다는 거 빼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언제고 마음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으려면 살림살이는 가벼워야 하지 않나,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들 타국에서 짐 바리바리 싸들고 가족들 데리고 스위스엘 온 사람들이다. '난 몇 년 뒤에 여길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난 평생 여기 뿌리내리고 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인생에 변화가 생기면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새로운 지역에 가면 거기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누리며 살다가, 다른 지역에 가면 또 그렇게 적응해 나간다. 지금껏 나는 언젠가는 어딘가에 정착하고 살아야지, 그때까지는 편안함을 추구할 필요없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해왔는데, 어느덧 그런 무기한 연장이 지겨워져 버렸다. 떠돌이 살림도 이젠 할 만큼 했지.
2년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진 독일어로 떠듬거리며 집을 보러 다니고 지원서를 내고 계약을 하고, 이 집 물려받을 세입자를 구하러 부지런히 청소하고 집 보여주고, 이삿짐 센터들에 연락해서 가격 비교를 하고, 아 나갈때 청소 용역도 불러야지 걱정하면서, 이게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가 싶긴 하지만, 뭐 이게 다 훗날 돈 주고 못 산다는 경험이 아닌가, 그냥 그렇게 다독이고 있다. (또 모르지 막상 이사가면 좋다고 춤출지도)
유난히 길고 눈이 많았던 겨울이 끝나고 꽃피는 계절에 찾아온 부활절 연휴. 회사 친구들과 함께 드미트리가 살고 있는 탈린에 놀러가기로 했다. 전날까지 감기로 고생하던 나는 약 네 봉지를 입에 털어넣고 12시간의 수면 뒤에 가까스로 원기를 회복했다. 여전히 정신없는 공항의 아침. 일단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공항 도착했어. 근데 우리 어디 가는거야?"
수화기 너머로 저희들끼리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콕이라고 해 방콕'
4시간 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탈린에 도착했다.
취리히에는 눈부신 햇살 아래 사람들이 죄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봄꽃이 만발하고 있건만. 이 북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봄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항 건물을 나서면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나는 황급히 옷깃을 여몄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북방 지역엘 또 왔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에릭은 계속 내 구겨진 얼굴을 보며 좋아라했다. 다행히 드미트리의 집은 무척 따뜻한 온돌집이었다. 거리에선 을씨년스러워보이던 겨울나무들도 홍차 한 잔에 몸을 녹이며 발코니에서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은가. 간사하게도.
탈린은 저 먼 중세의 느낌이 곳곳에 남아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옛 시가지는 붉은 지붕들이 널찍하게 이어져있고 여린 겨울햇살을 받은 담벼락이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수도사 복장을 한 웨이터들이 서빙을 하는 카페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누군가가 투덜거려 도로 거리로 나왔다. 중세의 레시피대로 요리를 하는 식당에서는 푸짐한 오리요리와 꿀맥주가 일품이었다. 웨이터들이 모든 요리에 대해 재료를 일일히 설명해주었다. 실내가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나. 러시아 전통음식 식당은 첫 음식이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맛은 꽤 훌륭했다. '저 주방에 요리사 딱 한 명 있다'고 빈정거리던 우리도 결국 하나씩 나오는 음식에 느긋하게 배가 불러왔다. 평소에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샤오펑도 이날은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도시 이곳저곳에 조금씩 남아있는 구소련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선함이었다. 샤오펑을 제외하고 구소련의 유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은 그 시대의 조각상이나 기념비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댔고 드미트리는 그런 우리를 더 신기해했다.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던 시점에 에스토니아인들은 구소련에 관련된 모든 유적 유물들은 철저히 부숴버렸다고 한다.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의지에는 십분 공감을 하지만, 그래도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에 더 끌리는 법이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마니쉬가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스탈린 아내가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다고 하던데."
"그야 당연하지."
"왜?"
"네가 하루종일 세계정복을 위해 힘쓴다고 쳐. 어느 나라의 전쟁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울먹이지.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애정이 식었어... 어쩌고저쩌고."
탈린에서 해로로 두 시간 반이면 헬싱키에 다다른다. 이미 탈린에서 볼 만한 것도 다 봤겠다, 핀란드에 있는 친구를 방문할 예정인 에릭을 따라 일행은 예정에 없던 바이킹라인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핀란드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고 시스템은 사회주의에 가깝다. 길고 음울한 겨울 탓에 우울증 환자나 마약 중독자가 많은 편이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주류 판매가 주중의 특정 시간, 특정 판매처로 제한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에는 주류 판매처마다 줄 서서 기다리는 알콜 중독자들을 볼 수 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스톡홀름처럼 탁 트인 북방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던 나의 기대는 바이킹라인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술을 박스째 끌고 갑판에 오르는 사람들의 초점잃은 눈들. 밤새 파티에서 놀고 새벽 배를 타는 듯한 십대들의 헝클어진 머리. 이 배의 단골인듯 가벼운 아침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후줄근한 옷차림. 마니쉬는 아까부터 예쁜 여자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며 야단이었다.
일단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간이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스크램블에그와 소시지, 우유 한 컵을 샀다. 한 입을 베어물고 설마했다. 다시 또 다른 것을 한 입 먹어봤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접시 위에 있는 것 중에 아무 것도 맛이 없어."
마니쉬가 열렬히 동의를 표했다. "진짜 이렇게 허술한 아침은 처음 먹어본다. 전부 다 맛이 형편없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최소한 이 소시지는 말이지. 음. 맛이 있잖아?"
곧 에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왔다. "음, 아침식사 가격이 무척 저렴하군." 포크가 몇 번을 오간 뒤 그는 말했다. "음, 품질도 저렴하군."
에릭은 친구를 만나러 떠나고 샤오펑은 새로 장만한 DSLR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부지런히 길을 나섰지만, 마니쉬와 나는 옹동하니 주저앉은 하늘과 잿빛 거리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무채색의 옷을 입었고 표정에도 활기가 없었다. 거리의 차들은 일 주일쯤 세차를 안 한 듯 지저분했다. 마니쉬가 중얼거렸다. "다 햇볕이 부족한 때문이야." 추위 속을 걷다 지쳐 무조건 눈에 보이는 트램을 타고 앉아 바깥 구경을 했다. 독특한 건물들이 종종 보였고, 스웨덴에서 보아온 익숙한 상표들도 보이고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스웨덴어로 단어 몇 개를 읽으며 아는 척도 했다.
"이케아랑 호엠이 둘다 스웨덴 상표라고?"
"실제로 유사성이 느껴지지 않아? 이케아 디자인와 호엠 디자인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잖아."
"가구랑 옷 사이에서 무슨 공통점을 찾으라는 거야?"
"...뚜렷한 원색에 큼직큼직한 패턴을 주로 쓴다든가, 매끈하게 떨어지는 선이라든가 하는 것."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동경하는 인도 남자와 겨울마다 오리털이불에 틀어박혀 사는 한국 여자. 이렇게 죽이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낮잠을 실컷 잔 다음 사우나를 하고, 몸이 좀 가벼워진 우리는 느적느적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러 갔다. 샤오펑은 '재밌게 놀아!'라는 문자 한 통만을 남기고 숙소에 들어간 참이었다. 몇 개의 바를 전전하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70년대풍의 라이브 클럽에 눌러앉았다. 어디서들 구했는지 70년대의 최신유행 패션으로들 차려입은 사람들.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의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해보였다.
"우리가 오늘 한 일이 이 나라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이었을거야."
"이 나라에 사우나가 발달한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날씨가 암울한데 사우나하고 술마시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있을리가 없지."
"아니 지금까지 불평만 했지만... 뭐... 그래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도시야."
"그 말이 불평보다 더 심하게 들리는데."
다음날 항구에서 다시 만난 에릭의 감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친구가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여기까지 자길 보러 와 줬다고. 결혼식 이후로 방문객은 내가 처음이래."
단 하루였지만 궂은 날씨와 혹독한 추위에 질려버린 우리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신이 났다. 멀어져가는 헬싱키의 항구를 바라보며 에릭은 매우 프랑스적인 촌평을 했다.
"자기 나라를 떠나는 산업이 이렇게 발달한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어떤지 알 만 하지."
배가 탈린을 향하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불평해오던 취리히의 흐린 날씨와 구질구질한 빗줄기가 이곳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같은지, 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들과 패셔너블한 젊은이들로 넘쳐나는지, 그것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얼마나 가치있었는지를 떠들어댔다. 고작 두 시간 반 거리의 탈린에는 축복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빛났다. 이 약간의 위도와 경도 차이가 얼마나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햇볕의 양을, 국민들의 성격을, 옷차림을, 삶의 질을 바꿔놓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살아갈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위대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것이 일반인에게 가능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진다.
드미트리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우리는 취리히에 돌아왔다. 일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씨 불평을 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잿빛 거리와 하늘 말고도 그 나라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 무표정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봤다면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웅크린 하늘의 도시들, 탈린과 헬싱키. 너무 혼쭐이 나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기에 괜한 궁금증이 인다.
# 취리히 미스테리
빨래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양말이 한 짝씩 사라진다는 건 고등학교때부터 깨달아온 평범한 삶의 진리건만, 취리히에 살다보니 가끔 이상한 일을 목격한다. 사라졌던 양말들이 짝을 맞춰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 참 누군지 몰라도 친절한 이웃이구나 생각하다가도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도대체 그 댁은 뭐하느라 남의 양말을 한 짝 씩 잘 모아뒀다가 짝을 맞춰주는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양말에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니고 아파트 호수가 적힌 것도 아닌데 내 양말인 줄은 어떻게 안 것일까...
# 라슬로의 의문
라슬로에게는 이제 6개월 정도 된 아들이 있다. "헝가리에 계신 부모님이랑 자주 스카이프를 하는데," 그가 말했다. "볼 때마다 '어머나 세상에, 쑥쑥 자라는 거 봐봐'라고 하시는데, 참 이상하단 말이죠. 제가 볼 때는 여전히 너무 작은데."
# 개미 사육
라슬로와 알렉스가 사무실 바닥에 앉아서 거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거미를 잡으면 헝가리에서는 재수가 안 좋다고 하는데." 둘 중 누군가가 제안했다. "그럼 가둬뒀다가 오후에 잡지요." 그들은 컵을 바닥에 뒤집어 거미를 가둬놓은 뒤, 점심을 먹고 와서 거미를 잡아서 알렉스의 개미들에게 주었다.
# 미국은 다 똑같애
점심먹으러 가기 전 스트리트뷰의 새 UI 데모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와와 감탄하면서 스트리트맨을 이 주로 저 주로 옮겨보았으나 보이는 건 온통 끝없이 뻗은 도로와 널찍한 들판 뿐이었다. 팝이 불평했다. "미국은 왜 다 이렇게 똑같이 생긴거야?" 앨런의 대꾸. "동부쪽으로 좀 가봐." 건물들이 등장했고 우리는 다시 와와 감탄하면서 데모를 구경했다.
# 한국 지도
구글 맵스 한국 론치를 앞두고, 나는 우리 팀 사람들에게 한국 팀에서 열혈 개발중인 데모 링크를 알려주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팝은 강릉과 속초 쪽을 들여다보면서 지도가 정말 상세하다며 신기해했다. "저기... 그쪽은 조금 변두리 지역이고요 서울 쪽을 보셔야 뭐가 많아요." 그리고 나는 서울역 부근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떤 정부를 둬야 이런 지도가 나오는거지?" 앨런이 몹시 감탄했다. "가끔 일본쪽 쿼리 디버깅할때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던데. 이런 색색깔 칠해진 건물이랑 특별부지들 예쁘잖아. 비즈니스 아이콘들이랑."
사실 나는 지도의 차이를 정부에서 찾는 미국인의 사고방식이 더 신기하다.
# 문화 차이
라슬로: 이 남자랑 여자랑 서 있는 아이콘은 뭐예요?
나: 예식장이요.
졸탄: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알렉스: 이 그릇이랑 숟가락 아이콘은 뭐죠? 식당인가?
나: 아 그건 약국이예요.
알렉스: 이건 성?
나: 학교예요. ㅜㅜ
# 잘못된 방향
주간 회의에서 디에나가 요즘 자신이 작업중인 코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앨런: 그거 왜 필요한건데?
디에나: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운전하잖아!
# 한국 론치
어느 화요일 아침의 출근 인사.
나: 굿모닝. 한국 론치했어요. ^^v
참고삼아 상황설명. 한국 맵스는 한국에 팀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저희 지도검색팀 관련한 업무만 간간히 도우면서 한국팀 일도 구경하고 있고요 (어쨌든 물론 한국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으하하).
# 예리한 파월
파월과 배드민턴 단식 경기를 하던 중 나는 그만 기진맥진 지쳐버렸다.
나: 조금 쉬었다 하자. 오늘 날씨가 저기압이라 몸이 좀 피곤하네.
파월: 그러지 뭐. 좋은 이유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구질구질한 날씨.
나: 끄덕.
파월: 업무과중과 스트레스.
나: 끄덕.
파월: 아프리카의 기근.
나: ...변명이 아니었다구.
# 예리한 파월 2
토마스의 집들이 팟럭 파티에 갔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들이 하나씩 테이블에 나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음식들에 대한 칭찬이 오가는 중 한 켠의 와인 코너에서 나는 빈 잔을 채우며 파월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배드민턴 클럽과, 그의 고향 바르샤바와, 각자의 주량 등에 대해 대화를 했다. 나는 슬슬 좀더 지적인 화제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참 무슨 팀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파월: 실망이야. 이제 대화는 끝났어!
나: 어?
파월: 날씨 얘기 일 얘기 나오기 시작하면 끝이라니까. '지루한 대화였어, 잘 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우리 대화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됐던 거야?
# 일 얘기
그러나 분명 때로는 일 얘기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미안하게도 이름을 까먹어버린) 한 구글러와는 마틴의 팟럭 파티에서 한 시간 가까이 '애즈에서의 검색 품질 테스트와 맵스에서의 검색 품질 테스트를 어떻게 잘 연결해서 시너지를 내 볼까' 풍의 얘기를 즐겁게 하지 않았던가!
# 좋은 소식
오랜만에 만난 현순언니가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미래씨 뭐 좋은 소식 없어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 네 한국 맵스가 얼마 전에 론치했어요."
"..그런거 말구요!"
# 기억하고 싶은 와인
나: 흠 이 와인 이름 기억해야겠어요.
소냐: 맘에 들었나봐요?
나: 아뇨, 다시 안 마시려고 기억하는 거예요. 떫은 맛이 너무 심해서요.
# 연장된 휴가
아니카가 3개월의 휴가 끝에 돌아왔다.
나: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사람들이 너 미국으로 영영 이주해버렸다고까지 했다니까. 3개월짜리 휴가라니 분명히 멋졌겠지?
아니카: 그게 사실은 말이지...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워싱턴에서 만난 한 장교와 사랑에 빠져, 남은 여행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일 주일만에 동거를 시작해서 그와 함께 두 달 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숨 돌릴 틈도 없이 해 줬다. 장갑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든가, 군부대의 수영장이며 체육관이며 편의 시설을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어서 장교 여자친구라는 거 참 할 만 하더라든가,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사려깊고 매력있는 남자인가 등등. 조만간 그가 취리히로 여행을 올 거라는 얘기도.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눈은 꿈을 꾸듯이 반짝반짝 (분명히 그랬다!) 빛나고 있었다. 나는 참을성있게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고 지금 여기에 쓰고 있)다.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축복을.
# 한국인
여성 구글러들과 함께 와인 보트 축제에 갔다. 다시 말하면, 아가씨들 열댓명이 우르르 술 마시러 몰려갔다. -_- 절반 정도는 동유럽 출신이라 지금까지 내가 어울려 다닌 어느 그룹들보다 술을 잘 마셔서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었다.
해나: 당신을 내 술친구로 임명합니다.
나: 영광이옵니다.
그레이스가 깔깔 웃었다. "미래는 진짜 한국인 같애요." (그레이스는 말하자면 한인교포 2세다)
나: 한국인 같은게 아니고 나는 정말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예요.
다음날 숙취로 집 천장만 바라봤다.
# 독일 남자친구
배드민턴 클럽을 이끄는 맥주친화적인 독일 아저씨 마이클은 볼 때마다 나를 야단친다.
마이클: 왜 아직도 독일 남자친구를 안 사귀는 거야?
나: 아니 왜 꼭 독일인이어야 하나요.
마이클: 취리히에 왔으니 독일어를 배워야 할 것이고, 독일어를 배우려면 독일 남자를 사귀어야지!
나: 혹여 누굴 만나더라도 그 사람 자체 때문이어야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만나면 쓰나요.
릴리와 옥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럼 우리가 이 남자들이랑 왜 결혼했게요?"
여기서부터는 뉴욕 출장 얘기.
# 초과업무
항상 팝의 근면함에 감탄하던 나는 출장가는 비행기를 같이 탄 김에 물었다.
나: 저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시고요... 그냥 궁금해서요.
팝: 그럼요.
나: 그렇게 맨날 늦게까지 일하면 부인께서 화 안 내요?
팝이 웃었다. "화내요."
# 다양성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야니스: 참 그 친구 이름을 바꿨죠.
앤드류: 이름만 바꾼게 아니지 말이죠.
팝: 뭐, 다양성을 존중해야죠.
# 맨체스터 동문
앤드류와 팝이 맨체스터 동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야니스가 놀란 기색을 했다.
야니스: 그런데 팝은...
우리는 흐린 말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팝은 살짝 프랑스 억양을 가진 반면, 핀란드 출신인 앤드류는 굉장히 심한 맨체스터 억양을 가지고 있는 것.
팝: 저는 억양까지 픽업하진 않았는데 말이죠.
앤드류: (독백조로) 출신을 숨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어요. 억양을 고쳐가면서까지. 불행한 출신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어요.
# 리즈
구글 맵스 전체를 통째로 책임지고 있는 리즈는 끊임없이 쉴새없이 말할 수 있는 대단한 정력과 아이디어의 소유자이다. 이메일로 간간히 그녀에게서 버그 리포팅을 받다가 뉴욕 출장에 가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나: 지도검색팀의 미래예요.
리즈: 리즈예요. 아 당신이 그 미래군요? 닌자 프로젝트(대충 이렇게 얘기해둡시다. 쿨럭) 담당하는?
나: 네. 이번 분기부터 그 프로젝트는 국제화 팀으로 인수인계 중이고요.
리즈: 나는 도대체 사람들 이름이랑 얼굴 매치하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한 번 보고 나면 그제서야 매치가 되지요. 내 머릿 속에는 '미래? 닌자 프로젝트' '닌자 프로젝트? 미래' 참 단순하지만 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기억해요. 분명히 사람들은 기분 나쁠거야 내 머릿 속에 자기들이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는 걸 알면.
그녀의 언변은 카페테리아의 끝에서 끝까지 한 걸음씩 이동하도록 계속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었기에 나는 다소 안심했다.
# 뉴욕 오피스의 점심식사
뉴욕 오피스는 과연 소문대로 다양한 요리가 즐비했다. 베지테리안 컬렉션, 온갖 종류의 커리들, 동양 음식들, 심지어 낫또까지 있었다. 나는 UI 디자이너 스캇과 잠시 내 프로젝트들과 관련한 간단한 UI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옆 테이블에 자리한 리즈와 앤드류는 물 만난 고기마냥 포크 드는 것도 잊은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인류와 철학에 이를 때 즈음 나는 내 접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스캇이 눈을 찡긋했다. '재미없죠' 그리고 그는 뉴욕에서 어디를 여행할 계획인지 물었고, 서점에 가고 싶다는 내게 길 건너 스트랜드를 추천해줬다.
# 이틀짜리 뉴욕 관광
주말에는 야니스, 앤드류, 팝과 앨리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을 실컷 했다. 토요일은 오전에 모마에 갔고 점심으로 일식을 먹었으며 타임스퀘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혼자 스트랜드에 가서 책 냄새를 실컷 맡고,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만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The 39 Steps> 연극을 봤다. 일요일에는 사라베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뉴욕 닉스 경기를 관람하고 메이시에서 옷가지 몇 개를 샀다. 앤드류와 팝은 길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아이폰과 블랙베리로 구글 맵스를 검색하다가 디버그 공방을 벌이는 낭만도 잊지 않았다.
더블에스프레소 한 잔 씩을 앞에 놓고 팝이 물었다. "이번 출장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내 매니저는 참 끝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요." 앤드류가 킬킬거렸다.
# 국제 로밍
출장 덕에 전화비가 12만원이 넘게 나올 예정이다.
나: 역시 국제 로밍은 너무 비싼 것 같애. 뉴욕에서 맵스 몇 번 검색하고 급한 전화 몇 통 했더니 이렇게 나와버렸네.
맷: 맨하탄처럼 길 잃기 힘든데서 맵스는 왜 쓴 거야?
나: 눈 앞의 광경을 스트리트뷰와 함께 보면 얼마나 근사한데.
맷: 으하.
나: 고속도로에서 차가 막히기 시작하길래 교통량 검색을 해 봤더니 우리 택시가 빨간 줄 초반에 있더라구.
맷: 제법 유용하네.
나: 그치. 다시는 데이터 로밍 안 쓰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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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구글 맵스 한국 http://maps.google.co.kr
문의사항은
구글 맵스 한국 그룹 http://groups.google.com/group/google-kr-Maps/topics
구글 맵스 API 그룹 (글로벌) http://groups.google.com/group/Google-Maps-API
공식 채널을 통하시는 것이 여러모로 가장 권장되는 방법입니다. 지도검색에 관련한 개선점은 저에게 직접 문의를 주시면 힘 닿는 만큼 봐 드릴 수는 있으나 100% 고쳐드린다는 부도수표는 남발할 수 없어 조심스럽고, 지도검색 외의 개선점에 대한 문의를 주시면 함께 공감하고 슬퍼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각자의 분야가 워낙 세분화되어 있는지라 그중에 제가 고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으니 이 역시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또 직접 사람 냄새 나게 연락할 수 있는 아무개가 있다는 건 기분이 다를 것이니, 제게 직접 귀뜸 주셔도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며 귀담아 듣겠습니다만. ^^
구글 맵스가 추구하는 큰 목표 중의 하나가 '재미'라는 사실 아시는지요. 커다란 서비스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구글 맵스가 언제나 유용하고 즐거운 서비스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가만있자 한국에서의 정식 명칙은 구글 지도인데... 킁)
# 스트리트뷰 론치기념 파티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 밀리웨이에 갔다. 평소에도 밀리웨이의 식사는 언제나 훌륭했지만, 그날따라 도가 지나칠 정도로 메뉴가 으리번쩍한 것이 아닌가. 번쩍거리는 디저트들 옆에 푯말이 붙어있었다. '스트리트뷰 파리 론치 기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스트리트뷰 영상과 함께 프랑스 음악이 흘렀다.
에릭이 불평아닌 불평을 했다. "이거 참, 나는 그저 점심을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 미국에는 버팔로가 없어
자기가 미국인인지 영국인인지 독일인인지 헷갈려하는 마틴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에는 진짜 버팔로가 없다. 버팔로라는게 뭔지 잘 몰랐던 미국인들이 엉뚱한 동물을 버팔로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동물이 미국 전역에 퍼져서 잘 서식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건 진짜 버팔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에는 진짜 버팔로 모짜렐라도 없다. 스위스에도 버팔로가 자라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버팔로 모짜렐라는 진품이라면 모두 이탈리아산이다.
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기분으로 흘려들으며 구운 치즈를 맛있게 먹었다.
# 10만원
처음 이주해와서 가구 사다 조립하고 나름대로 독립심과 자주심과 자긍심을 쌓아가던 차에, 결국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파이프 형태로 된 옷장을 샀는데, 이걸 설치하려면 천장을 드릴로 뚫어야 했던 것. 결국 가구점에 전화를 해서
10만원짜리 가구조립 서비스를 신청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전형적인 러시아 군인 체격의 드미트리가 잔뜩 핀잔을 주었다.
"날 부르지 그랬어. 10만원이면 사람도 하나 죽일 수 있는데." -_-
# 굳어진 단위 환산
다같이 카누를 타러 가기로 하고 가격을 알아봤다.
"얼마래?"
"한 사람 반."
# 본토 영어
어느날 앨런이 내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말을 했다.
"#&%^@#$Y&#%^&#&*$^&@$@"
"뭐라고?"
"아, 신경쓰지 마." 그리고 그는 다시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본토 영어 2
어느날 앨런이 내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광속으로 말을 했다.
"이게 @#!@#$한데 말이야 @$%@^&@$하고 @#&#한데 어떻게 &*&#$%#할 수가 있지?"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네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이 현상이) 이해가 안 돼."
그리고 그는 다시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본토 영어, 그러나 오레곤 사투리
팀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각 나라의 상징 동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유럽 나라들 대부분이 독수리여서, 자기 나라는 황금색 볏이네, 자기 나라는 머리가 셋이네, 이런 시덥잖은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해줬다. "한국의 상징은 타이거예요. 지도가 호랑이처럼 생겼거든요."
명색이 지도검색팀인지라 사람들이 다들 한반도 모양은 알고 있어서, 어떻게 호랑이가 이 모양에 매치되는지를 내게 묻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앨런이 한참 뒤에 말했다. "티거 말하는거야?"
# L 발음은 어려워
어느날 내가 앨런의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말을 했다.
"그래서 월드 빌드에서는 이러이러한 것과 이러이러한 것을 추출하고 있는데..."
그가 골똘히 생각해보곤 말했다. "아, 월드 말하는거구나."
# 친밀한 남미인
종종 다른 오피스에서 우리 팀을 방문하면,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나름대로 상냥하게 대접하려 노력한다. 어느날 남미풍의 이국적인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예요."
각자 소개를 하며 악수를 하는데, 이 손님이 디에나에게만 손에 키스를 했다. 디에나가 약간 당황하며 재빨리 수습했다. "아 정말 친밀하시네요."
# 뉴질랜드 영어, 영국 영어, 미국 영어
어떤 미지의 아저씨가 우리 팀에 뚜벅뚜벅 걸어와서 물었다.
"...그래서 이 브런치에서 이러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 브런치에서는..."
앨런이 미지의 아저씨의 말을 중단했다. "잠깐만. 브런치가 뭐야?"
미지의 아저씨: "브런치."
알렉스: "브란치."
앨런: "아, 브랜치."
미지의 아저씨: "브런치."
알렉스: "브란치."
앨런: "브랜치!"
미지의 아저씨: "도대체 키위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리고 셋은 어쨌든 '브런치'로 통일을 하고 평화롭게 대화를 계속했다. 괴로운건 나뿐이었다.
.........어떡해 계속 '브런치'만 들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섬세한 취미
내 멘토이자 책상 이웃인 알렉스는 매우 점잖은 영국 사람이며 한국인 부인을 두고 있다. 헌데 어느날 그가 팝에게 유리상자를 보여주며 뭔가 부탁을 하고 있었다. 개미가 든 유리상자였다.
"개미를 키우세요?"
그러자 그는 이 개미는 독일에서 수입해 온 것이며, 혈통있는 개에 보증서가 있듯이 이 개미도 보증서가 딸려 있으며, 본인 자신도 개미를 키우기 위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설명해줬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부인도 아세요?"
# 매니저
내 매니저인 팝 역시 매우 점잖은 프랑스 사람이다. 구글의 지오코딩은 이 사람을 믿고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으며 광범위한 지식과 초인적인 업무량과 그에 비례해 테이블 위에 첩첩이 쌓인 커피잔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 그런 팝이, 알렉스의 휴가기간 동안 며칠에 한 번씩 그의 개미상자를 들여다보며 세심하게 꿀 한 방울과 물 두 방울씩을 줬다.
아, 나는 내가 정녕 훌륭한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 감동할 지경이었다.
# 돕고 산다
원격 화상회의가 있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저녁 8시, 팝과 앨런과 나 셋만 남았다. 너댓 군데 오피스에 화상회의가 연결되고, 여러 질의응답이 오가고, 결정의 순간에 그들이 내게 물었다.
"@#$!#$%@#$^@$%"
나는 옆에 있던 앨런에게 되물었다. "질문이 뭐였어?" "추가적인 트래픽이 필요하냐고."
덕분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을 하고 회의가 끝났다. 나보다 팝이 더 기뻐했다.
# 빔의 아버지를 만나다
누글러 트레이닝을 받던 첫 주. 자기소개도 없이 불쑥 강연을 시작했던 이 사람이 바로 빔의 아버지, 브람 물레나였다는 것이 강연 후에 밝혀졌다. 나는 중1때 가수 이적을 처음 실물로 접했을 때만큼이나 광분했다...!
"당신이 진짜 '그' 브람이예요?"
브람이 웃었다. "'그' 브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브람 맞아요."
다른 누글러 친구들이 뻘쭘해하는 가운데 나는 그와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았다.
'Happy Vimming! - Bram Moolenaar'
# 그런데
정작 브람 본인은 요즘 이클립스를 쓴다고 한다.
# 두들의 아버지를 만나다
여느 때처럼 밀리웨이에서 감동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휙 지나갔다. 나는 다시 광분했다.
"방금 데니스 황이 지나갔어!"
"그게 누군데?"
"잠만 그거 대답해 줄 시간 없어.. 아 어떻게 가서 말을 걸지 $@^@#$ 어흑 사라졌어"
그리고 나는 라이브러리로 쫓아가서 그에게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그의 일정이 너무 바빠보여 차마 브람 때처럼 싸인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 격식있는 한국어
두들의 아버지 황정목씨와의 조우 후, 피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가 아까 옆에서 웃은 이유는 말이지."
"니네 웃고 있었어? 몰랐네."
"옆에 있던 한국분이 우리한테 통역을 해 줬는데, 네가 굉장히 격식을 갖춘 한국어로 점잖게 말하고 있다고 해서."
# 재색겸비
스페인 사람 루재가 자신의 친구인 한국 여자분을 데리고 불쑥 내 책상으로 찾아왔다. 마침 포니테일을 질끈 묶고 뿔테 안경을 쓰고 8단으로 나눈 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를 보고 그 친구분이 말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젊은 여자분이 구글에서 일을 하시네요."
"네 뭐, 전산 전공이거든요."
"세상에 공대 출신이신데 영어도 어쩜 잘하시고.."
"미모도 겸비했다는 말도 덧붙여주세요." ^^ 그분의 벙찐 표정이 생각난다.
# 금색 하이힐
내 책상 이웃인 스웨덴 사람 요한이 인천국제공항에 잠시 들렀던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 김치라는 것도 맛을 봤는데 말이죠. 솔직히 맛이 정말 끔찍했는데, 우리를 안내했던 한국 여자는 김치가 건강에 그렇게 좋다는거예요."
"네 한국 사람들은 김치 덕분에 사스도 피해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그 여자도 사스 얘기를 하더라니까요!"
그리고 그가 중요하다는 듯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를 안내했던 한국 여자가, 엄청나게도 차려입었었는데, 하이힐이 금색이었어요!"
...어쩐지 나랑 마주앉아 얘기할 때마다 내 구두를 쳐다보더라니 싶었다.
# 더이상 놀랍지 않아
요한이 다른 오피스에 출장을 다녀왔다. 알렉스가 물었다.
"어땠어요?"
"뭐 그럭저럭. 걔네 오피스도 좋던데요. 아 수영장이 있어요."
"괜찮네요."
"그죠."
# 번뜩이는 광고 재치
취리히의 어느 지역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안녕 구글 취리히! 근사한 휴게실도 갓 짠 신선한 쥬스도 스페이스 캡슐도 잠시만 잊어보세요. 한밤의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가 보다 극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팀웍을 고양시킬테니까. 분장실도 구경시켜줄게!!”
아니 이렇게까지 오라는데 못 갈 이유가 있나. 우리는 카피라이터의 재치에 감탄을 거듭하며 단체로 즐겁게 잘 보고 왔다.
# 새 인스턴스 (주: 워낙 구글 특화된 용어들이라 대충 비슷한 용어로 대체)
제프리의 아들 출산 소식이 이메일로 날아들었다.
"어제 저와 제 아내가 두 번째 인스턴스를 성공적으로 론치했습니다. 첫 번째 인스턴스보다 더 적은 자원을 사용하는군요. 서버 상태 양호. QPS는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팝이 재빨리 답장을 달았다. "오 축하합니다! 모니터링 그래프를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프리의 귀여운 아들의 인증샷이 따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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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제 블로그에서 구글과 검색 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피력하는 이야기를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앞으로도
그런 글은 올라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 그런 것은 공식 블로그에서 찾으시고. 저 자신도 얼마나 회사의 요모저모가 어썸리
어썸한지 자랑하고 싶지만, 제 수다는 여기서 일어나는 일상다반사만 얘기해도 바닥이 날 것 같지 않으니까요. ^___________^
얼마 전 규진이가 KTH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길래 이것저것 메일로 답해주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작년에 써 둔 후기를 이제야 올립니다. 취리히에서 직딩으로-_- 6개월을 더 살아보니 달리 보이는 것들도 있고 해서 주를 조금 달았습니다. KTH에, 혹은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에 교환학생을 가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KTH
교환학생
파견 후기
파견 기간: 2006년 08월 ~ 2007년 02월
2007년 06월 씀
KAIST 전산학전공
03학번
서미래 <seomirae@gmail.com>
여는
말
스웨덴에서
돌아온 지도 어느덧 넉
달 여가 훌쩍 흘렀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켠 메신저에서 ‘자,
이제
한국에 돌아갔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설명해
봐!’라던
친구의 농담도 생생한데
벌써 그게 넉 달 전 일입니다.
눈부시게
파랗던 여름 하늘이랑
그만큼 설레고 들떠
있었던 저 자신이 생각납니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캔버스에서 잘라 낸 듯
순백이었고,
대기는
맑고 시원하고 높았으며,
하루
종일 빛나는 화사한
태양에 새파란 바다가
오래도록 반짝였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에서,
파티에서,
어디서나
낯선 얼굴들을 무수히
마주치고 환히 웃음을
나누고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스톡홀름의
여름엔,
가만히
앉아서 견뎌 낼 수 없을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활기가 휘감아 돌고
있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가진 스웨덴과
스톡홀름의 추억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화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나간
추억이란 으레 그런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여러분께서는
부디 이점을 적당히
감안하셔서 들어 주시고,
돌아오셔서는
저보다 더 아련한 감상에
찬 멋진 후기를 작성하실
수 있기를 소망하며
부족한 이 후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목표
및 계획 세우기
준비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한 학기의
여정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 오고 싶은가’를
명확히 설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것을 꿈꾸고 계획하고
갔느냐에 따라서 얻어
오는 것도 달라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쁘고 고되었던
카이스트에서의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환학생을 택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외국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여행에
대한 갈망으로 교환학생을
택합니다.
또
어떤 이상한 이들은
카이스트에서 못다한(?)
공부를
더 해 보겠다고(?)
교환학생을
택합니다.
아무튼
교환학생을 택하는 데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동기와 목적이
있고, 그
모두가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어떤 불순한(?)
동기를
마음 속에 품으셔도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겁니다.
^^;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준비하는
만큼 얻어 올 수 있다’는
따분한 진리입니다.
반
년 내지는 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을 알뜰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계획과
준비는 필수입니다.
카이스트에서
들을 수 없었던 색다른
수업을 들어 보고 싶다면?
그러한
과목에 대한 정보를
미리미리 찾아보아야
합니다.
랩에서
개별연구를 하고 싶다면?
어떤
랩이 있는지 알아보고
미리 교수님과 컨택을
해야 합니다.
여행을
잔뜩 하고 싶다면?
구미에
맞는 가이드북을 잘 챙겨야 합니다.
미술사에
관련한 책을 읽어 보고
가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현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면?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보고,
영어
혹은 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준비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꿈꾸시는 그
무엇,
그에
대한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
경험을 말씀 드리면,
저는
가기 전에 크게 두 가지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외국에서 외국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
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외국에서 마치 현지인인
양(?)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 다니기 딱
좋은 유럽의 8월,
9월을
온통 유럽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데에 골몰하여
보냈고,
‘원래
서울 사람은 남산 타워에
가지 않는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왕정 박물관이니
바이킹 박물관이니 하는
것들을 마다한 채 매일
타는 40번
버스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 이런
기행이
너무 심해져도 곤란하긴
합니다만,
저는
제가 추구했던 바들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느끼고 온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해 하고 있습니다.
출국
준비
출국
준비에 관해서는 한
마디로 요약 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미리미리’
하셔야 합니다.
유럽의
이런저런 절차들은 많은
면에서 한국보다 느리게
진행되는 편이며,
담당자가
한 달짜리 휴가라도 가
버리면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빠른 사이클로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긴박하게
무엇을 계획하시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최소한 두 달
전부터 고려하여 돌아가는
이들의 사이클을 이해하고,
미리미리
준비를 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준비해야
할 서류
1)
학업계획서(SOP)
및
이력서(CV):
학업계획서에는
본인이 어떠한 포부를
가지고 이 학교에 지원하는지,
어떠한
학업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A4 1~2매
정도로 간략히 서술합니다.
이력서는
Google에서
CV나
resume 등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괜찮은 포맷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서를 아직까지 한번도
써 보지 않았다면 앞으로를
위해 좋은 연습이 될
것입니다.
2)
KTH 입학허가서:
학업계획서와
이력서를 보냈으면
이번에는 입학허가서를
받을 차례입니다.
비자를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니
코디네이터와 연락을
취해 가능한 한 빨리
받아야 합니다.
코디네이터에게
부탁하여 미리 팩스
등으로 사본을 받을 수
있다면 비자 신청을 빨리
할 수 있어 좋을 것입니다.
3)
보험증서:
입학허가서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보험을 들면
됩니다.
4)
스웨덴
비자:
입학허가서와
보험증서가 마련되었으면
비자를 신청합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대사관에
가서 평일 오전에 신청을
해야 하니 학기 중에는
조금 무리가 될 수 있으나,
서두르시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
6~7주
이상 걸리며 심하게는
두 달이 넘게 걸려 항공권을
취소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대사관에 전화하여 독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 대사관에는 제가 이랬다고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흐흐. 2008-10-05)
5)
항공권:
언제
해도 상관없는 일이나
빨리 예매 할수록 가격이
저렴하므로 역시 서두르는
것이 좋습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일정 부분
환급해 준다거나,
국제학생증을
이용하면 할인을 해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으니
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수강신청
(KTH만
해당)
KTH의
교환학생들은 모든
수강신청을 코디네이터를
통해 해야 합니다.
모든
과목의 정보가 웹으로
제공되니,
미리미리
개설과목을 잘 살펴보고
스웨덴에 도착하기 전에
계획을 다 세워 두는
것이 좋습니다.
도착한
직후에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고 인터넷
접근이 여의치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강신청과 같이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을
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주의할
사항은,
어학
관련 강좌는 개설되기
약 한 두 달 전에 신청을
마감합니다.
초급반의
경우 상관없지만 중급
이상을 수강하고자 할
경우 웹으로 배치고사를
봐야 하며,
코디네이터와
미리 연락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8월
말에 개설하는 Technical
English를
듣고자 하면,
6월
쯤에 코디네이터 및
어학센터 담당자와
연락하여 배치고사를
보고 수강신청을 해야
합니다.
7월과
8월에
스웨덴어 집중 강좌를
개설하는데,
저는
이 수업을 꼭 듣기를
권장합니다.
물론
스웨덴의 거의 모든
국민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따라서
스웨덴어를 한 마디도
모르더라도 생활하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슈퍼에서
장 볼 때는 조금 불편합니다)
그러나,
일단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나라에서 반 년을
살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조금도 배우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유럽
각국과 세계 각지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공부하는
자리가 바로 이 스웨덴어
수업입니다.
또한
교환학생을 위한 행사의
대부분이 8월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이
기간을 놓치면 교환학기의
가장 즐겁고 화려한
서곡을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출국
준비물
교환학생
준비물에 대해서는 네이버
등지에서 ‘교환학생
준비물’ 등으로 검색을
해 보시면 충분한 정보를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자료들에서 보지
못했던 준비물,
혹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습니다.
1)
학용품?
생필품?
얼마나
챙겨 가야 하나?
미국
교환학생을 가는 경우에는
학용품을 잔뜩 챙겨 가는
것이 필수라고 합니다만,
스웨덴의
경우 일본의 MUJI
등도
진출해 있는데다 스웨덴의
산뜻한 디자인의 학용품도
널려 있어,
양질의
학용품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이건
학용품 뿐만이 아니라
샴푸부터 고추장까지
모든 것에 대해 적용되는
것인데,
스웨덴의
체감 물가가 한국의 두
배 정도이기 때문에
이들의 가격도 두 배
이상으로 비쌉니다.
그러나
가격을 생각하면서 샴푸니
고추장이니 모두 꾸리면
28 kg의
제한 정도는 금세 넘기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모품은 적당히
초반에 쓸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시길 권장합니다.
그
나라의 로션을 이것저것
사용하고 비교해 보는
재미라는 것도 있습니다. (주: 그냥 몸만 가서 다 장만하는 게 사실 최고입니다. 인생이 편해집니다. ^^; 2008-10-05)
2)
외국에는
우리 체형에 맞는 옷이
없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부분입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깜찍하고
화려한 스타일의 옷들은
유럽에서 참 찾아보기
힘듭니다.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드뭅니다)
그러므로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시는
분은 입을 옷을 모두
챙겨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무난한 스타일의 옷들은
체형에도 잘 맞으며
한국보다도 더 저렴한
가격에 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스웨덴의 경우 사람들이
실용적인 옷차림을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치면 TBJ나
Maru같은
캐주얼한 느낌의 옷가게가
매우 많습니다.
H&M이
대표적인데,
합리적인
가격에 적절한 품질과
디자인을 지닌,
‘Swedish fashion’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기념품은
어떤 것을 준비해 가야
하나?
저의
한 친구는 ‘기념품은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고
아끼기 시작하면 또 끝도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적절히
한국이라는 나라를
표현하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는,
그러면서도
부담이 가지 않게 비싸지
않은 것을 선물하면 좋을
듯 합니다.
인사동을
탐사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이런
선물을 고르기엔 공항
면세점이 최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공항 면세점에서 북과
장구 모양의 핸드폰 줄을
여러 세트로 사 가서
(가격은
비싸지 않았지만 길거리에서
보이는 핸드폰 줄들과는
달리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제품이었습니다^^;),
귀국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하나씩
주었더니 매우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큰
신세를 지는 경우도 가끔
생기게 마련이므로,
한국에
관련된 문양 등이 들어간
감사 카드 같은 것도
챙겨 가면 좋습니다. (주: 한국 인삼 좋은 걸 아는 사람들은 알아서, 선물로 괜찮습니다만 부피가 큽니다. 인터넷에 보면 한산모시 세공품, 조각보 등이 있는데 가격은 좀 셉니다만 무게도 가볍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세련미가 있어 귀한 선물로 좋습니다........만 사실 이런 것 준비 안 했으면 그냥 와인 한 병 사 들고 가면 됩니다! 흐흐. 2008-10-05)
4)
그밖에
아쉬웠던 준비물?
의외로
굉장히 사소한 곳에서
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감자 깎는 칼이
아쉬웠고 결국 어머니
손을 통해 겨울 옷들과
함께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 스웨덴의
감자 깎는 칼은 영 불편합니다. (주: 스위스의 이케아에서는 제대로 된 감자칼을 팔더군요. 아마 스웨덴에도 잘 찾아보면 있을 것 같습니다. 2008-10-05)
쇠젓가락은
매우 희귀한 물건이니
잘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밥통은
이전 학기의 교환학생에게
물려받는 것이 최고지만
짐에 여유가 있다면
한국에서부터 들고 갈
수도 있고,
여의치
않다면 IKEA
등지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5)
스카이프(Skype)
들고
갈 준비물은 아니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 할
부분이라 여기에 쓰겠습니다.
스카이프는
인터넷으로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프로그램을
깔고 회원 가입을 한 뒤
헤드셋을 장만하면 일단
기본적인 준비는 된
셈입니다.
컴퓨터
대 컴퓨터로 통화하는
것은 언제나 무료이고
컴퓨터 대 전화로 걸려면
요금을 선불로 충전을
해야 합니다.
미리
한국에서 설치하고 요금
충전을 해서 사용을 해
보시고 (신용카드가
필요합니다),
부모님
및 기타 본인이 자주
연락할 지인들에게도
사용법을 알려 주고 가면
좋을 것입니다.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네이버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카이프의 요금이 월등히
저렴하며,
많은
국가에서 스카이프를
즐겨 쓰기 때문에 공용
컴퓨터실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폰은
한국에서 외국으로 걸
때의 요금이 국제전화
수준으로 비싼 대신,
외국에서
한국으로 걸 때에 음질이
매우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어 가끔 사용할 만
합니다.
교환학생으로
생활하기
코디네이터와
연락하기 (KTH만
해당?)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코디네이터는
여러분의 입학 서류
문제와,
기숙사
신청과,
수강신청
등등의 많은 일들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한
코디네이터가 수십 명
내지 백 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서류에 오류가 생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며
이메일을 보내도 일주일간
답장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침착하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언제나 적절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업
듣기
KTH의
학부 수업은 대부분
스웨덴어로 진행되나,
international master course의
수업들은 모두 영어로
진행됩니다.
교수님들이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발음도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알아듣기 쉽게 깔끔한
편이므로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KTH에서
수강과목을 고를 때의
주요 기준은 ‘카이스트에서
접하기 힘든 과목들을
접해 보자’는 것이었고,
제
선택에 대해서 비교적
만족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과목들이 꽤 있습니다.
단
시스템이 우리와 달라서,
수업
시간표가 일주일 단위로
매주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마다 바뀌고,
강의실도
바뀌며,
개강
날짜도 과목마다 천차만별이니
이 점을 잘 고려하셔서
수강신청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International
master course에서
개설되는 수업에 들어가
보면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왔으며,
나머지는
인도/동남아시아/일본/중국
등지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다양한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조별
과제가 많은 수업을 듣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저는
HCI에
관련된 수업을 들었는데,
7명이
한 팀이 되어 한 달 내내
토론도 하고,
프로젝트도
하고,
같이
리포트도 쓰면서 매우
좋은 경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 주제가 HCI였기
때문에,
각자의
문화로부터 비롯되는
특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어라는
측면에서도,
그
어떤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한 달을
같이 부대끼며(?)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밖에,
유럽권이
영국과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KTH에는
제법 괜찮은 영어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제가
들은 다른 수업 중에는
Technical English
(Advanced level)와
Research
Methodology and Scientific Writing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격식 있는 영어,
그리고
기술적인 글쓰기에 대한
수준 높고 체계적인
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과제와 토론/발표
준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한
학기를 이겨 내고 나니
‘영어로 발표하는 것’과
‘영어로 기술적인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
사귀기
아무래도
교환학생을 가면서 가장
기대를 하게 되는 부분이
외국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세계는
어딜 가나 비슷합니다.
외국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
친구들도 진지하게
친해지면 한국 친구들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곱고 정을
줍니다.
그런
친구를 단 한 두 명만
사귈 수 있다 해도 여러분의
교환학기 생활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파티가
매우 흔하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아무튼
부지런히 돌아만 다닌다면
타지 생활의 외로움이라든지
향수라든지 하는 단어는
머리 속에 자리잡을 틈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준비하셔야 할 것은,
어느
정도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언어 소통 능력입니다.
당연하지만,
말이
통하고 마음이 맞아야
친구가 되는 것이니까요.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소통 능력을
준비해 간다면,
점차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하면서 언어는 부쩍부쩍
늘 수 있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사람 대
사람이라는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이며,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한국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리 문화의
우수함만을 장황하게
설파해서는 안될 것이며,
반대로
외국의 문물에 대해서
배울 점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리 것을 비하하고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될
것입니다.
외국
친구들을 사귀다 보면
그들과 나의 이질적인
부분과 공통적인 부분
모두가,
관찰하기에
퍽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음식
해 먹기
스웨덴은
물가가 비싼데다 유럽
학생들은 대부분의 끼니를
사 먹기 보다는 직접
요리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직접 요리를 해 먹게
됩니다.
기숙사
대부분이 공동 주방을
끼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요리를 배우기에 최적의
환경입니다.
옆집
이탈리아 청년이 파스타
만드는 법을 시범을 보여
가며 알려 주고 독일
언니가 마리네이드
레시피를 적어주는 그런
환경인 것입니다.
저
또한 스웨덴에서 처음
요리를 시작했는데,
귀국할
무렵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만들고 바닐라
초콜릿 쿠키를 굽고
있었습니다.
^^; 한국
친구들과는 김밥,
떡볶이,
자장면,
탕수육까지도
제패했습니다.
^^;;
‘외국에서까지
왜 한국 음식을 찾느냐’에
대해 간단한 저의 의견을
붙여 볼까 합니다.
외국에서까지
한국 음식을 찾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향수병은
입맛에 안 맞는 음식에서
온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첫 일주일을 빵과 우유와
시리얼,
외식으로
해결하고 나서는 바로
밥통을 얻어 와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렇게 먹는 서양 음식들이
입맛에는 맞았으나 날이
갈수록 속에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확정된 것이 아침은
시리얼과 우유,
점심은
외식 또는 밥,
저녁은
직접 요리한 서양 음식
또는 밥이라는 공식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비율만 유지해도
이것저것 새로운 서양
요리를 시도해 보면서도
20여
년간 한국 음식으로
길들여 진 위장을 달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 그것도 나라 나름인 것 같긴 합니다. 스웨덴에서는 도대체 뭘 사먹어도 가격을 불문하고 참 맛이 없었는데;;
취리히에서 사는 지금은 뭘 먹어도 너무 맛있어서 여지껏 밥 한 번 지은 적이 없습니다.;; 요컨대 그저 자기 입에 맞는 맛있는
걸 든든히 잘 먹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 2008-10-05)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식생활은 정말 중요합니다.
식생활을
단출하게 하면 사실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절약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럽에서의
인간 관계란 거의 대부분이
주방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저로서는
(^^;) 다른
부분에서 조금 아끼더라도
세계 각국의 친구들과
초대하고 초대받아 함께
요리를 해 먹는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화려한
중국집 음식이 아닌 중국
사람들의 ‘진짜 평범한
일상 식사’를 대접받는
날도 있을 것이고,
오스트리아의
전통 간식 ‘팬케익
크럼블’을 대접받는
날도 있을 것이고,
포르투갈
친구와 함께 한국식도
아니고 포르투갈 식도
아닌 기묘한 볶음밥을
만드는 날도 있을 것이고,
옆집
스웨덴 청년이 파스타에
토마토케첩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이 모든 경험들은 여러분의
교환학기 생활 속에서
몹시 맛있고 행복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필요한
정보를 미처 다 적지도
못한 것 같은데 글이
길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미처 적지 못한 유용한
생활 정보 등은 아래에
적는 참고 자료들에서
찾아보실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곳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너도 나도 방학이면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떠나고,
좋은
가이드북과 패키지 상품
등이 많이 나와 있어
유럽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입장이 되어 여행을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만,
반
년 내지는 일 년을 거주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도
그리 흔히 얻을 수 있는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많은
학생들이 반 년 내지 일
년의 시간 동안 여러
유럽 국가들을 순회하고
오는 것에 목표를 두곤
하지만,
저는
이왕이면,
후일에
경제력과 시간만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단편적인 여행의
모음이 아니라,
그곳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여러 국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부대끼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춰 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떠한
것을 마음 속에 그리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얻어
오는 것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즐겁고 유익한 교환학기
생활 하고 돌아오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스웨덴인과
영국인 부모를 둔 사람이
쓴 스웨덴 문화에 대한
책입니다.
Curious 시리즈
중에서도 상당히 훌륭한
편입니다.
스웨덴
문화의 전반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풀어놓았으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수긍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만 일단
매우 재미있고,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저는
이 책을 열심히 읽고
가서 스웨덴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써 먹었습니다.
^^;
이은경
님의 홈페이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교환학기
생활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저는
스톡홀름에 가기 전 이
사이트를 두 번 이상
탐독한 것 같습니다.
매우
유익합니다.
Lappis:
라피스는
대부분의 교환학생들이
살게 되는 기숙사 구역으로,
도합
약 20여
동으로 구성된 제법 큰
규모의,
스웨덴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문화를 이루는 지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씩
재미있는 코리도 파티에
대한 공지가 올라오니
체크하면 좋고,
중고
장터 게시판도 있으니
스웨덴어 교재나 사전,
집기
등을 살 때 이용할 만
합니다.
* 보험 관련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행자 보험을 들고 영문 증빙서류를 내거나 그쪽에 가서 학생회하고
계약한 보험을 들어도 되고.. 방법이 여러가지 있는 것 같은데 추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난 그냥 삼성화재 여행자 보험 들고 갔지... 대사관에서는 원본 대조를 요구하는데, 원본에 그냥 한국어/영어 함께 씌여있어서 별도로 영문본이 필요하진 않았어. 가격은 20만원대? 30만원대? 정도였던 것 같네.
* 거기서 살 동안의 재정 확보를 증명하는 서류 -> 물어보니 지급보증서
같은 거 뽑으라는데 액수는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하는지 등이 궁금해요.
(대략 600~1000만원 정도 예상하고 있음)
대략 한 달 생활비 * 체류할 기간 정도니까 그 정도면 적당한 듯. 은행 가서 영문본으로 계좌잔고증명서 떼면 돼.
* 가기 전에 한국에서 미리 사거나 준비해가면 좋은 물건
or 가서 사는 것이 더 편한 물건
-> 전에 한국어로 된 책을 많이 가져가라는 얘길 준호한테 들었는데
스웨덴도 마찬가지..겠죠?;
이 부분은 수기에 조금 써 놓았으니 참고하고... 근데 뭐 거기까지 가서 한국어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그러나... 허허. 정 뭔가 읽고 싶으면 KTH 도서관에서 영어책 빌려 읽으시게. ㅋㅋ 책처럼 짐되는 것도 별로 없지. 버리고 올 수도 없고 입고 올 수도 없고 먹어버릴 수도 없고 ㅋㅋㅋ 심지어 여행가이드북 같은 것도 영어로 된 것들이 훨씬 나으니 가져갈 필요가 별로 없는 듯.
아 지금 생각나는 것 몇 가지:
한국 계좌 인터넷 뱅킹
한국 신용카드(비상용)
한국 소개 책자(한국관광공사 가면 공짜로 준다).
전자사전
한국 음식 생각날 것 같으면 인스턴트 식품 약간(북어국 같은 것... 해장에 최고라서-_-ㅋㅋㅋ)
여분 안경(보통들 챙겨가더라.. 나는 안 챙겼지만. 거기서 안경 맞추려면 몇 주 걸린다데)
전기장판(혹시 추위 좀 타는 편이면... 거기선 절대절대 안판다-_-)
샤워용 슬리퍼(-_-진짜 사소한 건데 거기선 찾기 힘들어! 어디 여행다닐때 물에 안 젖는 슬리퍼/쪼리;는 정말 필수)
뭐 그외 수영복. 전기방석(-_-여행다닐때 유스호스텔들이 춥더라고.. 쿨럭;) 같은 별의별 것들이 생각나지만 이건 알아서 하삼. ^^
* 노트북은 맥북프로를 준비해가려고 하는데 무리없이 쓸 수 있겠죠?
엉 문제 없음. 인터넷 뱅킹같은 것도 잘 된당. (나는 Nordea은행을 이용했었는데 시스템이 좀 많이 허접하더라;;) 한국 계좌 인터넷 뱅킹 뚫어놓고 가면 편할 듯. 막판에 돌아오기 전에 카이스트 기숙사 신청하는 것 잊지 말고.. ^^;
* 비자 발급하는 데 대충 어느 정도의 시일이 걸리나요?
아 젤 중요한거! 비자는 최대한 빨리 신청해야해! 두 달 정도 걸린다고 봐야 되고. 사람 따라 천차만별이야. 계속 독촉전화 해야 빨리 나옴. 항공권은 최대한 늦은 날짜로 잡도록 하고... 항공권 일정 변경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오. 막판에 여행도 좀 하게 될 테니 체류 기간도 좀 넉넉하게 신청하구. (최대한 길-게. ㅋㅋ)
- 스웨덴에서 신을 신발은 뭐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있나요?
(눈이 많이 오니 방수가 잘 되어야 한다든가 등등)
겨울철 옷 채비 관련하여 조언 부탁드립니다. 스톡홀름의 경우 기온
자체는 한국보다 특별히 더 추운 것 같지는 않더군요.
여기보단 좀더 추울텐데... 흠. 비가 부슬부슬 많이 오는지라 방수되면 좋긴 한데, 신발이든 옷이든 특별히 새로 준비할 건 없을 듯 하다. 필요해지면 가서 호엠에서 사.. 흐흐
- 아직 특별히 부칠 만한 짐은 못 찾았지만(굳이 한다면 이불 정도?)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 기숙사 관련 질문에 답변이 안 오고 있습니다.
처음 입학허가서 보내줄 때 즈음 기숙사 배정 메일이 날라왔는데,
거기에 적혀있는 주소로도 충분한가요?
(Amanuensvagen 02-112 정도로 적혀있었습니다)
우편번호가 있어. 메일에도 잘 보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을거야. 이게 전체 주소다.
Forskarbacken 05-240 // 기숙사
Stockholm
104 05 // 우편번호
SE
참고로.. 한국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면 ICA에서 조그마한 쪽지가 올거야 (네 기숙사 메일박스로). 안 되는 스웨덴어로 쪽지 해석하느라 골몰하지 말고 ICA에 가서 짐을 픽업해오도록. :P
규진이에게 쓴 수강과목 이야기 (역시나 말투를 양해바랍니다. ^^;)
Swedish Elementary
8월 한 달 집중코스였는데, 겨울엔 집중코스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그래도 학기 중이라도 꼭 듣기를 권장... 이왕 스웨덴에
갔으니 스웨덴어 코스 하나쯤은 필수로 들어야지. 나중에 혹시 아냐, 살다보면 독일어나 네덜란드어나 노르웨이어-_-라도 쓸 일이
생길지. 비슷해서 도움 많이 돼. 그리고 이걸 배우면 왜 스웨덴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왜 스웨덴
사람들은 영어로 말할때 이런이런 단어를 즐겨쓰고 이런이런 실수를 하는지 등도 부수적으로 알게 돼.;;
Technical English Advanced
강추 수업. 고급반은 레베카 행크스라는 교수님이 가르치는데, 이분을
만나게 되면 꼭 나의 안부를 전하도록 하려므나. ㅎㅎ 나 구글 인터뷰 간다고 했을때 그리고 취직했을 때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교수님 굉장히 깐깐하고 수업 빡신데, 잘 따라가면 정말 남는 거 많다. 중요!! 언어쪽 수업 들으려면 신청을 꽤 미리 해야되니까(라고 하면 두세 달 전을 말하는 것임) 홈페이지 잘 들여다보고 있다가 반편성시험 인터넷으로 보고 코디한테 잽싸게 신청할 것! 이거 놓친 사람들 진짜 많이 봤다.
Human-computer Interaction
원래 좀 관심분야라 들었는데, 토론하고 조별활동이 많아서 좋았던 거
같어. 꼭 이 과목 아니더라도, 조별 활동이 많은 과목들 들으면 좋아. 영어도 많이 늘고, 문화 차이도 진득하게 느끼고.. 사실
여기서 토론하다가 독일애들이랑 열 펄펄 내면서 싸운 적이 있다 킁-_-
Research Methodology and Scientific Writing
한마디로 전산과 석사생들 논문 쓰는 법 가르치는 과목인데, 테크니컬 라이팅에 대해서 상당히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가르친다. 추천할만한 수업이야. 교수법이 좀 신기하다.
일주일이 한 달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어쩐지 시간감각을 좀 잃었어요. 연락이 뜸하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근황을 한토막씩 쓰는 건 재미없을 듯 해서, 지난 주말에 다녀온 알츠 일렉트로니카 얘기에 간간히 썰어넣겠습니다.
아, 피터가 찍은 사진들: http://flickr.com/photos/skatey/sets/72157607205649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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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처음으로 그럴싸한 휴가를 냈다. 슬로베니아 친구들이랑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리는 'Ars Electronica'에 가기로 한 것. 아예 좀 놀다 오자 싶어서 주말을 끼고 5일짜리 휴가를 만들고 한 달 전부터 기차표도 예매해뒀다. 물론 나중에 종이 더미 속에서 찾느라 고생했지만.
창 밖 풍경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원 풍경은 언제나 그림같이 예쁘고, 똑같다. 익숙해진 풍경을 별 미련없이 외면하고 노트북을 펼쳤다. 성과 평가 기간이라 자기평가서를 써야 했다. 지하철처럼 혼잡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좁은 '자기 공간'을 느낀다고 하던데, 참 맞는 말이다. 저쪽 맞은 편에 앉은 여자분도 딱 나같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데, 혹시 구글에서 일하시나,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집중해서 자기평가서를 끝냈다. 반 년의 성과를 마무리하면서 떠나는 기차 여행이라니 참 시의적절하지 않은가. 아직 여정은 한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완만한 구릉지와 야트막한 숲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이적 3집을 귀에 꽂고, 참으로 이런저런 사념이 쏟아졌다. 여기서 만난 온갖 종류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머릿 속을 왕왕 맴돌았다.
잘즈부르크에 들렀다. 사전지식을 준비할 여유같은 것도 없었지만, 실제로 내가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 그렇다. 아예 작정했으면 좋은 가이드북을 사든지, 아니면 그냥 지도 한 장만 구해서 걸어다닌다. 독일어로 된 안내문들이며 교통카드 자동판매기까지 취리히와 비슷해서 편안함을 느꼈다.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에메랄드빛 강이 큰 산을 향해 흘렀고, 바람이 산 내음을 닮아 향긋했다. 막연히 크고 현대적인 도시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작고, 무엇보다도 무척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현대적인 것의 침략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따뜻한' 날씨와 밝은 햇볕에 들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노천 와인카페에서 와인 한 잔과 디저트를 음미하면서,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한동안 그렇게 늘어져있었다. 아, 이렇게 좋은 건줄 알았으면 휴가 좀 자주 다닐걸. 오스트리아의 별미라는 이 디저트 이름은 또 까먹었지만 아무튼 훌륭했다. 저녁 무렵까지 잘즈부르크 강변을 맴돌다 다시 린츠행 기차에 올랐다.
린츠의 숙소에서 느지막히 일어나 아침식사를 놓쳤다. 지도 한 장을 구해서 트램에 올랐다. 음, 도나우 강이 여기 흐르고, 중앙역이 여기에 있고, 여기에 중앙광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틀림없이 여기에 내 일용할 양식과 카페인이 있을지어다! 예상대로 도착한 그곳은 100미터 전방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노천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나의 탁월한 '독일어권 도시 여행 능력'에 혼자 괜히 뿌듯해하며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아싸 무선랜도 잡힌다. 아이폰으로 트위터를 한 줄 날렸다. "In Linz Austria. Hat einen kaffe und eis in der hauptplatz. Warte meinen freuenden. Well hope this sentence makes sense :D" 한참을 늘어져있다가, 다시 길 잃은 강아지모냥 또 열심히 쏘다니고 햇볕을 만끽했다. 피부 좀 타면 타라지. 취리히의 부슬비에 갇혀있었을 구글러 친구들한테 자랑도 할 겸.
조금 후 슬로베니아 친구들이 린츠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루블리아나에서 운전해왔다고 했다. 피터, 유레, 보슈티안, 카야. 카야를 제외하고는 다들 2년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다. 현재 Zemanta라는 벤처를 차리고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다. 피터는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다 최근에 디자이너로 합류했고, 유레는 에반젤리스트로 전세계의 컨퍼런스며 캠프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보슈티안은 초기 창업멤버 중 하나로 CEO였다가, 이쪽 경험이 많은 형에게 자리를 물려준 상태. 카야는 보슈티안이 최근에 채용한 대외협력담당 쯤 되는데, 슬로베니아의 텔레비전 스타라고 했다. 카야와 보슈티안이 프레스 명찰을 받으러 가고 우리 셋은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반 년 만인데, 모두에게 많은 것이 변했다.
"유레, 이제 정말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삶이네. 멋진데. 기분이 어때?"
"그 장소에서는 대개 즐거워.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온갖 이야기들을 듣고 하는 것. 여행을 준비하고 이동하는 과정은 성가셔." 그리고 그는 한 다섯 가지쯤 되는 일화들을 죽 열거했다. 영국에서 환승기차를 놓치고 야간버스를 간신히 타고 새벽에 길 한 복판에 떨어진 일, 샌프란시스코 어느 공항에서 항공기 지연으로 밤샌일 등등. 피터가 스웨덴에 있던 유레를 방문했을 때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게 도착해 10월의 새벽에 짐을 끌고 라피스까지 걸어가야 했던 일화도 나왔다. "새벽 2시 3시쯤 되었을거야. 그 지역에 살아온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 스톡홀름에서 나는 아무도 몰랐어. 그러니까 중요한 건 네트웍이야. 미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가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이지. 그냥 처음부터 시작하는거야."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어떻게 처음 그 시작점을 만들지?"
유레가 씩 웃었다. "나만큼이나 지루해하고 있는 듯한 사람을 찾아. 대화를 시작해. 이 대화를 듣고 흥미를 느낀 몇 사람이 동참하기 시작해. 그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군중 하나가 만들어져. 거기에 있던 사람들과 모두 안면을 트도록 노력하지. 이게 시작점이야."
"흐음, 그게 스웨덴에서 나한테 접근한 방식인거야?" 웃음. "아니."
Ars Electronica라는 행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미디어 아트 페스티발'인데,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디어 아트'보다는 뭐랄까 좀더 geeky한 면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미디어 아트 행사이고, 전시작으로 선발되기 위해서 매우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린츠에서는 이 외에도 다양한 문화 행사를 많이 개최되지만, 미디어 아트 분야에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면 린츠라는 도시에 이목을 집중하곤 한다. 그리고 나처럼 geeky and artistic이라는 수식어에 혹한 사람들도 린츠를 찾는다. 행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설치예술인데, 간간히 세미나도 있고 라이브 퍼포먼스도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의 시가지에 20여군데의 크고 작은 전시장이 설치된다. 열심히 발품을 팔면 하루만에도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걸을 만한 거리이면서도, 도시 전체에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배치였다.
"흥미로운 게 있으면 시간을 들여서 봐. 뭐든지 궁금한게 생기면 부스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5일 동안 내내 그 부스를 지키고 있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슥 훑어보고 지나갈 뿐이고, 따분하지. 관심을 보이면 굉장히 기뻐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줄거야."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카페인을 충전하고, 하면서 돌아다녔다. 저게 뭐지? 싶은 것들은 피터가 종종 설명해주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보면..
- 새들과 상호작용하는 새 로봇. 얼핏 봐서는 둥지처럼 생겼는데,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을 휘익휘익 낸다. 숲에 놓아두면 새들의 울음소리를 학습하고 그에 맞게 자기 울음소리를 바꿔나간다고. 실제로 숲에서 실험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어떤 새들은 몹시 경계하며 달아나는 반면 어떤 새들은 지속적으로 주변을 맴돌면서 상호작용을 한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네 개의 로봇이 놓여있었는데, 로봇들끼리 서로 학습하면 간섭이 생기지는 않는지 궁금했..으나 부스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 비누방울 하프. 금속으로 된 막대기들이 하프처럼 꽂혀있고, 그 앞에 손잡이 달린 상자가 놓여있다. 손잡이를 드륵드륵 돌리면 비누방울이 나오면서 금속 막대에 부딪히고, 이것이 전도체 역할을 해 소리를 낸다. 비누방울이 퐁퐁 날리고 랜덤하면서도 듣기에 나쁘지 않은 멜로디가 울려퍼지는, 동화적인 컨셉이 귀여웠다. 보슈티안이 모델을 하고 피터는 줄곧 사진을 찍었다.
- 콘크리트 테이블 악기. 콘크리트로 된 단순하고 우직하게 생긴 테이블이 조명 아래 놓여있다. 테이블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 멜로디가 흐른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멜로디가 달라진다. 보슈티안은 한동안 그 콘크리트 테이블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 이 테이블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어떻게 만들 수 없을까. 어렵지 않을 건데." 나중에 알아본 원리는 광섬유로, 테이블에 뚫린 작은 구멍들로 들어오는 명도를 인식해 멜로디를 조합하는 것.
- (비디오 전시작) 뭐라고 불러야 하지... 스크린에 얼룩이 하늘하늘 흘러다닌다. 손을 대면 이 얼룩이 손을 따라 팔로 번져나온다. 스크린 밖의 얼룩은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인 듯 했다. 이걸 보며 떠오른 것이 유시진의 클로저라는 만화였다. 한 세대마다 '초즌원(;)'이 있고, 이 초츤원은 팔에 문신 비슷한 산스크리트어 문양을 가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초즌원에게 역할을 넘겨주는 의식에서, 그들은 서로 손목을 잡고, 이 문양이 손을 타고 흘러가 전달된다. 내가 이 얘기를 했을때 보슈티안에게 누군가가 싱거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우리들의 초즌원이냐?" "당연하지."
- (비디오 전시작) LED 속눈썹. 단 하나 뿐이었던 우리나라 작품이다. 눈 밑에 붙이는 점점히 박힌 LED인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반짝인다. 비디오에는 이 속눈썹을 달고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자신(박수미 씨)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한국 여성들의 큰 눈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는 거라고.
- 벽면 전체에 그리드로 붙은 스티커. 떼어서 다른 곳에 붙일 수 있다. 뗀다라는 것 행위가 그리드에 자국을 남기고, 붙인다라는 행위는 새로운 자국을 만들어낸다... 는 건 그냥 내가 대충 둘러댄 해석이고 중요한건 여기에 한글로 선명하게 '카이스트'라는 자국이 있었다! 동경대가 올해 이 행사 초청대학이라 일본 사람들은 잔뜩 봤지만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더랬는데. 누군가가 카이스트에서 왔다 간 모양이다.
- (퍼포먼스) 유리로 된 상자 안에 텅 빈 표정의 한 남자가 앉아있다. 눈과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파란 물 자국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그냥 그린 건 줄 알았는데 애들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음독을 한 거라고 한다. "해독을 하느라 몸이 파란 물을 뱉어낸거지". 그날 저녁 블랙베리를 확인하던 누군가가 어떤 블로그 포스트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아티스트들의 자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나> 카야는 강한 인상을 받은 듯 했다.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봤는데, 어쩐지 압도되었어. 정말로 텅 빈,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었어. 한참을 쳐다봤어." 그렇게 말하는 카야도 어딘가 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난 얼굴에 파란 물 자국을 하고 유리 상자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몇 백명의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그 경험 자체가, 뭔가 엄청난 느낌일 것 같아."
이틀의 발품을 팔고, 저녁에 시작할 불꽃놀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봐버린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일식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메뉴에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회를 발견했다! 세상에. 당장 회 1인분을 주문하고 오꼬노미야끼도 시켰다. 구글러들 중에는 인도, 베트남, 일본, 중국, 심지어 한국 음식에도 익숙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제만타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회초밥이 신성의 영역인 듯 했다. 젓가락 대신 포크를 가져다달라며 카야와 우르방이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했다. 그래도 좀더 미식 견문이 넓은 보슈티안이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어차피 들어가면 다 똑같아." 다같이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인류의 문명이란 장소를 막론하고 참 공통점이 많다.;; 이런 표현에서까지.
내가 거들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정통 회초밥은 손으로 먹는대. 그러니 포크라고 안 될 거 없지."
"거봐, 우리는 문명인이라 포크를 쓴다구."
"그게 아니라... -_- 유럽에서는 물수건을 주는 문화가 없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보통 식당에서 물수건을 내놔. 식사 전에 손을 닦는 게 거의 습관화 되어있어."
"흥미로운데. 우리는 식기를 씻고 동양에서는 손을 씻는다라... 난 동양에 한 표."
"그래, 단지 관점의 차이야."
새삼 구글이라는 환경은 정말로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다 모여있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문명인'같은 표현은 나오지 못했을 터. 예를 들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그런 역사를 어찌 알겠나' 식의 뻔뻔한 반응이 아니라 잘 알지 못해 약간 주눅든 듯한 반응을 보인다던가 하는, 그런 분위기. 여전히 일에 관련해 뭔가를 의논할 때 '러시아어에서는 복수형이 이러이러하게 변형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국어에서는 복수형 변화 규칙이 한 가지이며 복수형을 쓰지 않더라도 별다른 혼동이 없다'라는 말에는 웃는 경우도 봤지만... 뭐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고 그냥 그동안은 전혀 듣지 못하던 예제가 나오니 무의식적으로 웃은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악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구글, 특히 국적 구성이 다양한 취리히 오피스에서는 정치적 공정성에 대해서 대체로 사람들이 민감한 편이며,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도도 높은 편이다.
"아 정말 횟집을 어디서 못 봤어. 회초밥이라면 구글에서 매주 나오지만. 야 이 회 진짜 입에서 녹는다." 나는 살랑살랑 '문명인'들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들 경악했다. "회초밥이 매주 나온다고?" 피터가 거들었다. "메인 요리만 여섯 가지가 넘고, 먹고 싶은 만큼 계속 가져다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이어진 구글의 각종 복리후생에 대한 이야기들... 보슈티안은 침울하게 말했다. "애들 노조 만드라고 부추기는구나."
그리고 나는 MapSearch팀에서 지난 여섯 달 동안 보고 들은 이런 저런 것들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용자들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우리 개발자들 자신은 코어 유저가 아냐. 예를 들어 지도 서비스 같은 경우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용례들이 잔뜩 있고, 가끔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이드이펙트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튼, 우리는 그 용례들을 다 알지 못해. 이 인식부터가 중요해."
"나 슬로베니아 지도 검색을 하다가 버그를 발견했어. 근데 신고할 링크가 없더라. 어떻게 신고해?"
"외부에는 직접적인 링크가 없고, 구글 내부에는 버그 리포팅 시스템이 있어. 보통 구글러들이 자기 주변에서 분개한 사람들로부터 버그를 받고 우리에게 리포팅을 해. 우리 팀에서는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 주에 새로 들어오는 버그들을 분류하고 할당하는 역할을 맡는데, 이 버그들을 보면 참 재밌어, 뭐랄까, 상당수는 그 케이스에 대한 설명만 건조하게 하고 끝내지만 가끔은 굉장히 상세하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런 식이지. '나의 더 나은 반쪽이 어느날 무슨무슨 호텔을 검색하고 있는데, 이 호텔이 그 근처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걸로 표기가 되어 있더라. 물론 이 호텔은 해변에 있지 바다 한 가운데에 있지 않다!'든지 '내가 요새 인터넷으로 뭘 좀 팔고 있는데, 나의 잠재적인 고객들이 계속 길을 잃어버리길래 봤더니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이 막다른 골목을 돌아오도록 되어있더라. 그 길은 큰 벽으로 막혀있다니까!' 등등. 한 번은 잘못 분류했다가 리포팅 한 사람이 화를 낸 적도 있어. 무슨 무슨 주소가 잘못된 주에 속한 걸로 나온다길래, 데이터를 검색해보고는 '지역 주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저 주에 속한 주소인 것 같다.'고 분류를 했더니 몹시 분개한 메일이 날아왔어. '내가 세금을 내도 이 주에 내고, 우편물도 이 주의 우체국에서 날아오는데 무슨 소리냐!'라는... 얼른 데이터 오류로 다시 분류를 하고 잘 달랬지. 많은 경우가 맵서치 쪽 잘못이 아닌데 잘못 분류되어 온 경우야."
그렇지만 가끔은 감사의 편지가 구글러들의 친구들로부터 포워딩되어오기도 한다. 내용과 어조는 대략 이러했다. '나는 뉴욕에 사는 보행자인데, 안그래도 구글 지도 너무 잘 쓰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당신들이 론치한 '보행로검색' 완전 원츄! 새벽 2시에 차 끊기고 택시는 안 잡히고 안전하게 걸어돌아갈 길을 찾아야 할 때 그 막막함 알아? 완전 내 삶의 질을 바꿔놓았어! 당신들 너무 사랑해!' 음;; 보행로검색은 우리 팀 소관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걸 보면 좋은 서비스가 가져다줄 수 있는 삶의 질의 변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구글 지도의 버그인데 맵서치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이야?"
"구글 지도는 굉장히 큰 서비스고, 수많은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용자들이 보게 되는 그 페이지 자체는 프론트엔드팀이고, 백엔드에는 지오코딩을 담당하는 우리 팀, 비즈니스검색, 경로 검색만 해도 분류가 다양하고. 데이터베이스팀은 워싱턴에 있고, 프론트엔드는 마운틴뷰에 있고, 우리 팀은 취리히에 있고, 이런 식으로 전역에 흩어져있어. 버그들이 처음부터 적절한 팀으로 할당되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야. 계속 뜨거운 감자처럼 팀들 사이에 넘기고 넘기고 하다보면 제자리를 찾아."
"너한테 분노의 이메일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 없어?"
"세사미라고, 특정 나라들에 한해서는 사용자가 직접 지오코드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슬로베니아에는 아마 론치를 안했을거야. 왜, 힘 좀 써서 론치해달라고 할까?" 우리는 다같이 웃었다.
"다른 팀들이랑 연락은 어떻게 해? IRC 채널이라도 있어?"
"IRC라니 뭘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구글톡 써." 다시 한바탕 웃음. 그렇네 당연하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사실 IRC를 사용하는 팀들도 있긴 하다.;
"그리고 물론 이메일을 엄청나게 많이 쓰지. 물론 지메일이고. 음 또, 가상회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테크톡이나 회의에 자주 이용해. 영상 음성 품질이 굉장히 좋아서 원거리여도 거의 불편을 못 느껴."
"그렇겠지, 충분한 대역폭을 확보하고 있을테니까. 그럼 가상회의가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야?"
"가장 선호되는 방식은 당연히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하는거지. 우리 팀 같은 경우에는 관련된 프로젝트들 상당수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어서 보통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서 얘기를 해. 직접 얼굴맞대고 얘기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어. 테크리드급 이상의 사람들은 다른 오피스로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한 일이주씩 관련있는 팀이랑 같이 머물면서 싱크업 하는거야. 많은 논의들이 이 방식을 통해 민첩하게 진행되곤 해."
내 오꼬노미야끼는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먹은 회와 현미차의 입가심에 매우 흡족해하며 일어섰다.
"우리 결국 불꽃놀이 놓쳐버렸네."
"이것도 일종의 전통이야. 사실 매년 놓쳤어.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나면 이 시간 쯤엔 뭔가 먹어야 했거든." 보슈티안이 대답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오케이센트룸 옥탑의 클럽으로 갔다. 가득한 인파를 뚫고 무대를 보았다. 한 서른 다섯은 충분히 넘어보이는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흠 뭐, 그냥 평범하네. 노래를 끝내고 박수를 받은 후, 다음 곡을 준비한다면서 그가 꺼낸 것은 로봇과 그의 진가였다! 멀리 보기에도 서툴어보이는 솜씨로 그는 로봇을 연결하고, 심지어 맥북을 재부팅까지 하면서, 쉴새없이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일본에서 수입해온 로봇키트인데, 급히 조립하고 프로그래밍하느라 사실 오늘 4시까지 계속 코딩하고 있었는데, 주절주절. 그는 가수나 프로그래머로서보다는 코미디언으로서 재능이 있는 듯 했다. 한바탕 소동 끝에 마침내 그가 문제의 맥북으로 음악을 틀고 로봇을 춤추게 하고 그 자신도 로봇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리고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흐음, 데모의 법칙을 아는 우리들은 조금더 관대해 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재미있었으니까. 그리고 로봇과 함께 춤을 추는 감수성, 이 페스티발 전체에 떠돌고 있는 이 감수성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가 퇴장한 후 올라온 디제이는 빔프로젝터가 쏜 0101010101010111100이 가득한 배경화면을 뒤로 하고 진지한 미래지향적 음악 실험을 시작했으나, 여기까지는 우리의 감수성이 공감대를 찾지 못해 다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여행의 대부분은 거기서 끝났다. 나머지는 그냥 찌끄레기 버리지 못하는 미련에 쓰는 디테일. 그날 밤에는 한 군데의 바를 더 들러 맥주를 마셨고, 길을 잃고 한 시간이 넘게 걸어 숙소에 도착했고, 오렌지의 그지같은 커버리지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글로벌 로밍 신청을 안 했던 탓이었다. 다음날에는 커피와 그네와 함께 느릿한 오전을 보내고 나서, 슬로베니아 친구들은 먼 길 운전을 하느라 먼저 떠났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 그동안 '젊은' 친구들 쫓아다니느라 모자랐던 잠을 오후 내내 실컷 잤다. 친구들이 알려준 인디안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느긋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사실 너무 많이 먹었다 그때. 독일어권 티비는 역시 재미가 없어서 꺼버리고 책을 읽었다. 밤에 케이블 길이가 모자라서 전기장판을 못 틀고 자서 꽁꽁 언 채로 아침에 깨어났다. 숙소의 아침식사를 먹고, 제 시간에 기차를 탔다. 7시간 동안 자다 책을 읽다 자다 취리히에 도착했고, 노드제에서 생선샌드위치를 사서 짐가방을 끌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때 걸린 감기가 아직도 낫지 않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숙제 아니면 생산적인(?) 글을 쓰지 않는 이 게으름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마감 독촉이 아니었으면 안 나왔을거라고 하니 그나마 위안을?;
이번 학기 <인류 문명과 건설>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건축가 김진애씨. 저는 이분이 첫 수업 시간에 화이트보드에 기다란 시간의 수평선을 그리실 때부터 홀딱 빠져서는 열심히 수업을 경청하고 있지요 히히. 이 과목 숙제로 제출한 에세이를 또 슬쩍 올려봅니다.
사족 1) 서론과 예의상 대칭을 이뤄줘야 할 결론의 분량이 빈약한 것은 배고픈데 식당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가서 얼른 마무리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가야 했기 때문입니당. ^^;; 사족 2) 아래 글을 보시다 보면 입실론 같은 것을 기묘하게 부르고 있는 걸 발견하실텐데 그건 나름대로 비전산인(?) 독자를 향한 배려라고나... 사족 3) 에세이에선 이론만 실컷 만들어놓았고, 이걸 실제 SF영화에 적용해 본 사례 연구는 에세이엔 없고 PPT에만 들어있습니다. 이것도 밥 때문인데..;; PPT는 다음 기회에...^^;;
아무튼 독특한 내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감상의 포인트를 그리 잡아주시고... 늘 부족하지만 즐감해주세요 ^^
<SF 영화의 도시 상상> 다음 영화 중 2개 이상을 보고 나름의 스토리를 제출. 제출 형식은 자유. PPT, HTML, 워드, 동영상 등 뭐든지 오케이. 길이도 자유. 표현도 자유. 다만, 자신의 논점만 확실히 할 것. 왜 이 영화, 이 영화의 어떤 점, 리포터의 생각과의 같은 점 다른 점, 영화적 표현, 영화적 상상에 대한 소감, 당신이 SF 영화를 만든다면? (2분 발표를 예상하고 준비할 것)
영화 목록: 블레이드러너, 매트릭스, 브라질, 마이너리티 리포트, 12 몽키즈, 토탈 리콜, 지구를 지켜라, 스페이스 오디세이 2019, 메트로폴리스, 바바렐라, 천공의 성 라퓨타, 스타워즈 1/2/3/4/5/6,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제 5원소, 아이로봇, 올드보이, 디워, 매드맥스 1/2/3, 에이리언, 우주전쟁, A.I.,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인디펜던스 데이, 이퀼리브리엄, 컨택트, 아일랜드, 미지와의 조우, 사인, 화성침공, 배트맨, 스타트랙, 스타게이트, 혹성탈출, 터미네이터, 라브린스, 가타카, 스피어, 워터월드, 포스트맨, E.T., 하울의 성, 엑스파일 등 기타 SF/판타지 등 어떤 영화도 좋음.
* 그리고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교수님의 추가 주문이 있었습니다.
“전산학도는 영화에서 시스템을 본다”
공간: 시스템의 비유
내 막역지우 찬양이는
건축학도다. 설계가 너무 하고 싶어서 그리로 갔다 한다. 나는
전산학도다. 멋도 모르고 ‘한글로 된 OS를 만들고 싶다’며 이리로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상당히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건축에서도, 전산에서도, 우리는 ‘이상’ 내지는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을 각자의 머릿 속에 가지고
있다. 그것이 깔끔하고 정연한 질서를 갖춘 성당이든지, 생선
비린내 물씬 풍기는 왁자지껄한 시장이든지 간에 [1]. 개념 속의 이상과 시스템만을 꿈꾼다면 그것은
수식과 도식을 날개삼아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학자라 불러야 하겠지만, 우리들 ‘전산인’과 ‘건축인’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현실 세계 속에 ‘구현’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다.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내
머릿 속의 시스템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훌륭한 개발자 내지는 짖궂은 ‘네 명의 일당들’이 두 학문의 유사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일이 있다 [2]. 역시나 또 훌륭했던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1977년에
정리한 건축에서의 디자인 패턴을 탐독하면서, 이들은 이 아름다운 원리들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접목시킬
생각을 했다. 전산이라는 분야는 과연, 다른 여느 공학에
비해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오히려 더 유리한 점이 있으니 바로 이웃집의 좋은 것들을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프트웨어 개발 공정의 자동화, 효율화, 정량화 등을 연구하는 소프트웨어공학에서는 태동의 시기에 자동차공학 등의 전통적인 생산 분야에서 여러 모티브를
따 오곤 했다. 그렇지만 전산인들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특별히 건축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개념 속의 체계를 현실에 구현한다’는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SF영화 몇 개 – 스타워즈와 매트릭스와 천공의 성 라퓨타. 매주 목요일 4시의 에너지 넘치는 즐거운 수업. 틈날 때마나 신나게 읽어댄 참고 서적들. 4년간 전산과에서 배워왔던
것들. 이 몇 가지를 버무려서, 공간에 대한 내 나름의 썰을
풀어볼까 한다.
공간?
먼저 공간Space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공간인가? 일상 생활에서의 공간이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면적과 부피의 덩어리를 일컫는다. 수학에서의 공간이란 벡터와 연산의 집합체이다. 전산에서의 공간이란
기억 장치 위의 섹터일 수도 있고, 웹 상에서의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가상 공간일 수도 있고, 각 모듈들이 연결되고 쌓여 이룬 거대한 시스템일수도 있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한정짓지 않기 위해, 가능한한 이 공간 저 공간을 옮겨다니며 비유를 사용하려 한다. 전산과의 미덕인 타입 체크도 여기서는 조금은 느슨하게 하려 한다.
공간을 구성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원리를 어떻게 잡으면 좋을까? 공간을 구성하는 원리는 실로 너무너무 다양할 것이지만, 크게 분류를 해 보라면 문법Grammar과 구조Structure라는 두 원리를 꼽고 싶다. 수업 시간에 배운 ‘분산과 통제’라는 모델에도 이 두 가지가 비교적 잘 들어맞을 것 같다.
공간 구성 원리 첫 번째. 문법
문법, ‘규칙으로 공간을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오토마타
수업시간에 들은 Context Free Grammar를 여기에 데려왔다. 형식 언어 이론에 따르면 문법 G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3].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은 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다. 공간에 비유하자면 구획이 모두 나눠지고 그 쓸모가 정해진 공간의 최종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씨앗에서 출발한다. 열매에서부터
시작하면 더 이상 싹을 틔울 것이 없으므로 보통은 미지수를 씨앗으로 삼는다. 다음, 여러 규칙 중에서 적절한 것을 적용해가며 미지수를 전개시킨다. 미지수의
전개라 함은 다른 미지수 또는 열매로 해당 미지수를 치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모든
미지수가 사라지고 열매만이 가득 달린 나무가 남을 것이다. 비유가 복잡하다면 아래의 예를 보자.
규칙:S → AS | ε(ε: 빈 열매)
A → 0A1 | A1 | 01
전개:S ⇒ AS ⇒ A ⇒ 0A1 ⇒ 0A11 ⇒ 00111
여기서 S는 씨앗이다. 텅 빈 어떤 광장이라고 해 보자. 이 씨앗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위의 두 규칙 중 적합하며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전개할 수 있다. 처음에는 S → AS규칙밖에
적용되지 않는다. S →ε를 적용하면 빈 공간으로 게임이 끝나버리니 제외한다.이후
우리는 AS라는 공간을 얻었다. 아직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미지수 뿐이므로 이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분화할지 알 수 없다. 가능성만 점쳐볼 뿐이다. 다음으로 S →ε 를 적용하여 A를, A → 0A1를 적용하여 0A1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이
공간이 최소한 0으로 시작해서 1로 끝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안다. 0을 잔디, 1을 보행로라고 해 보자.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미지수를 치환해나가다 보니 얻은 값이 00111이다. 잔디 잔디 보행로 보행로 보행로 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결과값은 달라질 것이다.
문법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방법의 특징은 무한한 방식의 공간을 유도해낸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어떠한 규칙을 적용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며, 이 선택의 가짓수만큼의 공간이 나오게 된다.
즉, 문법 공간의 핵심은 결과의 다양성, 자생력, 선택의 분권,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이러한 공간의 예로는 ‘언어’를
들 수 있겠고,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자연물의 생김새와 구조, 시장
등이 있다. 전산 공간에서 찾아보자면 프랙탈나무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조금 색다른 예로 위키피디아를 들 수 있다. 최초에는 소수의 문서들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문서마다 다른 문서로 분화할 수 있는 미지수(여기서는
하이퍼링크)들을 심을 수 있다. 이 미지수가 분화하면 그
문서에는 또다른 미지수가 심겨져서 새로운 문서로 분화할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4]. 계속해서 자라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밖에, Kevin Kelly의 아홉 가지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 역시 생명의 씨앗과 규칙에 기반한 성장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도 진화론을
믿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조금씩 분화해 온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5].
공간 구성 원리 두 번째. 구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구조란 ‘객체와 관계로 공간을 정의하는 방법’이다. 벌써부터 고민이 생겨난다. 어떠한 것들을 객체로 삼아야 할까? 예를 들어 환경이라는 것을 모델링하고자 할때 ‘환경’이라는 객체부터 불쑥 말해야 하나 아니면 ‘땅’ ‘하늘’ ‘바다’부터
말해야 하나? 아니 바다보다 물이 더 상위 개념이니까 ‘물’부터 말하고 나서 ‘바다’와
‘강’과 ‘호수’를 말해야 하나? 등등. UML 다이어그램을
그릴 때에도 늘상 고민스러운 것이지만, 사실 왕도는 없다고들 말한다.
뜻이 잘 통하면 되는 것이고, 상식에 맞으면 된다.
구조로 공간을
구성하는 절차를 보자. 먼저 공간을 구획한다. 좋아하는 숫자만큼
균일하게 쪼갤 수도 있고 격자로 쪼갤 수도 있고 동심원으로 쪼갤 수도 있다. 나뉘어진 공간 각각을 객체라
하자. 이제 각 객체의 특성을 정의한다. 객체의 종류와 용도, 들어오는 자원과 나가는 자원을 정의해준다. 예를 들어 구름인지 땅인지
정하고, 공업 용지인지 전답인지 정하고, 유동 원료와 제품과
정보와 농약과 가끔 오가는 다람쥐와 메뚜기 같은 것도 필요하다면 정한다. 마지막으로 각 객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한다. 교환하는 자원의 종류는? 양과 빈도와 흐름의
방향은? 자원을 누가 수집하고 가공하고 저장하는지? 그 방법과
그에 따르는 비용은? 이 객체에 접근 가능한 객체들은 누구이며 얼마나 접근 가능한가?
구조로 만든 공간의
특징은 공간이 탄생할 때부터 그 구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 공간의 목표는 효율성과 강력한
통제, 예측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안정성에 있다. 각종 건축물을
비롯한 인공물, 여러 컴퓨터 시스템도 여기에 들어간다. 게시판
및 대부분의 웹사이트들도 구조 공간이다. 계획 개발된 도시 역시 구조 공간이다. Matrix도 여기에 들어갈까? 나는 구조 공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키텍트가 세심하게 설계한 21세기 지구 모습, 오라클, 스미스, 프로그래머
등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다. 이 미리 갖추어진 세계 안에 사람들을 집어넣는다.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행동하지만 세계를 변경하지는 못한다.
공간을 평가한다
문법 공간의 목표는
다양성, 자생력, 선택의 분권과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문법이 ‘좋은 공간인가’를 판단하는 척도는 무엇이 될 것인가? 문법이 좋은 문법인지는 비교적
쉽게 검증할 수 있다. 결과로 생겨난 단어(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를 보고 이 단어가 어떤 절차를 밟아 분화되어 왔는지를 정확히 유추할 수 있다면 모호성ambiguity이 없는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법이 만들어낸 언어가 얼마나 많은 단어를 가지는 지를 살피는 것도 검증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성된 수많은 단어 중의 하나를 집어들고 이것이 좋은지를 판단하려면? 조금은 어려운 문제다. 그저 ‘신이
보시기에 좋았다’ 즉 그 문법을 준 아키텍트의 입장에서 만족스럽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구조 공간의 경우에는
조금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객관적인 평가의 기준을 세울 수가 있다. 효율성과 강력한 통제, 예측 가능성을 위한 설계이므로 ‘유효한가?’ ‘효율적인가?’라는 물음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
구조 공간에서
유효성과 효율성을 증명하기 위해 검증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자원이, 누구 사이에, 얼마나 오가는지가 먼저 필요할 것이다. 자원의 방향과 양은 효율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 정도의 접근 권한을 가지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쓸데없이 권한이 많이 열려 있어 보안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제한되어 있어 자원의 동선이 길어질 수도 있다. 또한 누가 그 정보를 수집/가공/이용하는지도
중요하다. 가공 과정에서 자원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수집하는 주체와 붙어있어야 할지 이용할 주체에 붙어있어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 또한 각 처리 과정에서의 시간복잡도와 공간복잡도를 분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정보의 흐름으로 그 공간의 유효성과 효율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검증하기 위해, 구조 공간에서 다소 수고스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시뮬레이션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뮬레이션이란 실험적/물리적 방법으로 대상을 모사하는
것이다.
검증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공간의 구조를 모형으로 만든다. 각종 설계도나 UML, DFD, ERD와 같은 각종 모델링 언어를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조금 스케일 작게 구현한다. 목업이라든지, 데모 프로그램
등이 이 구현물에 해당한다. 구현물이 완성되면 실제와 비슷한 자원의 흐름을 생성하여, 발생하는 상황을 관찰한다. 예를 들어 모의 인구를 생성해서 유동시킨다든가, 모의 정보와 자원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어디에서 병목이 발생하는가? 공간의 부담 분배가 적절히 이루어지는가? 자원의 동선 중 이상한
것이 있는가? 트래픽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 실제로
컴퓨터 시스템을 구현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기이한 동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듈의 내부
동작이 예상한 것과 달라서일 때도 있고 – 한번은 URL을
인코딩하는 모듈을 오픈소스에서 가져다 사용했다가,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동작하기도 했다 – 때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외부의 요소 – 네트워크 트래픽 등 – 가 간섭을 일으켜서일 때도 있다. 설계 단계에서 최대한 줄이려 노력해도
이러한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이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소요하므로, 좀더 간편한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디자인 패턴을 다시 살펴보자.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정의에 따르면 패턴이란 비슷한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해결법이다 [6]. 예를 들어 그는 ‘안마당은 동일한 방법으로, 적절하게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도와준다’고 쓰고 그 ‘적절한 방법’에 대해 고금의 훌륭한 건축물들을 집대성한 결과를 기술해놓았다 [2]. 패턴은 공간을 잘 구성하기 위한 것이지만 공간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훌륭히 쓰일 수 있다.
검증 순서는 다음과
같다. 이 공간의 구조가 어떤 패턴에 대응하는지 찾는다. 그
공간 자체 – 해결책 만을 보아서는 패턴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형태만
보아서는 동일한 패턴인데 각 객체의 역할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패턴이 되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둘러싼 주변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한다. 패턴을 찾았다면, 해당
패턴의 제약사항과 영향력을 검토하며 이 공간에 적합한지 판단한다 [2]. 패턴 역시 왕도가 아니다. 많은 디자인 패턴 책에서는 패턴에 집착하여 눈을 흐리는 것을 몇 번이고 경고하곤 한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편리하게 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전산
공간을 설계하는 유용한 원리로 문법과 구조를 꼽아보았다. 이 두 원리를 건축 공간에 적용해보며 생각한
것은 건축인과 전산인이 추구하는 바는 많이 닮아 있으며,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유용한 원리를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것이다.
찬양이와 나를
묶어주는 공통점은 몇 가지 더 있다. 마감을 앞두고 밤새 작업실에서 ‘어떻게
하면 골판지를 45도 각도로 이쁘게 자를 것인가’ 골몰하던
찬양이나 세그멘테이션 폴트를 잡느라 코드 한 줄씩 스택 트레이스를 뜨던 나나,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단히 ‘손’을 놀려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렇게 자조적인 농담을 하면서도 ‘아키텍트’의 경지를 향해 열심히 자라고 있다는 단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닮았다. 건축과 전산이 비슷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학문들이 최종적으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통찰력’을 심어주기 위함이기 때문일 것 같다. 이러한 통찰력은 책만으로는 쉬이 배워지지 않는다. 도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상황에 함께 맞닥뜨려 가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면 좀더 쉽다. 손을
더럽히는 수많은 삽질을 거쳐, 그 삽질의 개념을 간파하는 이론의 숙고를 거쳐, 마침내는 설계도 한 장 다이어그램 한 꼭지를 보면서 ‘어허 여기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겠구료’ 신통력을 발휘하는 도사가 되는 것이다 [7].
– 끝
–
[0] 원래 붙여뒀던 제목 <공간: 시스템의 비유>가 다소 지루한 것 같아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에서 부제를 슬쩍 빌려왔다.
[1] 이 비유는 오픈소스소프트웨어의 철학을 대표하는 에릭 레이먼드의
유명한 글 <성당과 시장 The Cathedral and the
Bazaar>에서 따 왔다.
[2] 알란 섈로웨이, 제임스
트로트. 알기 쉬운 디자인 패턴.
[3] John E.
Hopcroft, Rajeev Motwani, Jeffery D. Ullman. Introduction to Automata
Theory, Language, and Computation.
[4] Jee H Oh는 GORI Garden에서 위키피디아를 밭과 씨앗으로 해석한다.
[5] Kevin
Kelly. Out of Control.
[6] Erich
Gamma, Richard Helm, Ralph Johnson, John Vlissides. GoF의 디자인 패턴
블로그가 배고프다고 낑낑대서 오랜만에 포스팅 좀 하러 왔습니다. ^^;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디자인과 생활> 과목 숙제로 쓴 final essay입니다. 부족하지만 그저 즐감해주세용~ ^^
Ideo Design: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여는 말 지난 가을 나는 스톡홀름의 KTH에 있었다. 그 예쁘다는 유럽에 가서 여행도 사절하고 학교에 콕 눌러앉아 교환학생답지 않게(?) 빡빡한 과목들을 수강하며 숙제로 괴로워하고 있던 나날들 속에, 아무래도 가장 큰 기억을 남긴 것은 <Human Computer Interaction: Principles and Design>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인간 컴퓨터 상호 작용에 관련한 기본적인 이론을 습득하고, 과제로는 조별 프로젝트로 실용적인 실습[1] 을 주로 했다. 고되었지만 과제도 시험도 무사히 치러 내 뿌듯했고, ‘전공자만큼 깊이 이해하지는 않아도 이젠 나름대로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할 거리가 생겼겠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환학생의 여정을 끝내고 대전에 돌아왔을 때 여유로운 마음으로(?) 제출한 나의 첫 번째 숙제는 다음과 같았다.
“My idea of Design can be summarized as a way of communication, by which a designer and users and the product itself can interact.”
그리고는 그 <Human Computer Interaction>을 같이 수강했던 친구 Jure에게 자랑스럽게 완성된 PPT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친구가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설명하고 있는 건 user-centered design process야. 유럽에서의 6개월이 네겐 아무 쓸모가 없었구나!”
HCI 수업에서 같은 조 멤버들과 함께 (사진 제공: Nasim Mahmud)
1. Design: 디자인, 디자이너,, 그리고 엔지니어 석 달 전까지 시험 범위라고 줄을 그으며 읽어댔던 Donald A. Norman의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나 조별 프로젝트를 하며 다루었던 여남은 가지의 방법론들은 일단 잊기로 했다.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와 수업을 경청했다. 이건표 교수님의 다채롭고도 풍부한 강의는 들으면 들을 수록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개념들을 느꼈고, 그럴 수록 살짝 부끄러워졌다.
“디자인은 fashion도 style도 drawing도 아니다.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가시적/비가시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는 것 자체도 역시 디자인이며, 이것이 사실은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내 숙제에서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교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디자인은 내가 위에서 말한 의사소통의 수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을 정의하고, 때로는 발견하며, 해결해나가는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개념인 것이다.
“공학 또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협력은 항상 어렵다. 디자이너와 잘 협력하는 법을 익혀라. 디자인의 넓은 개념을 이해해라. 여러분이 하는 일은 모두 디자인이다.”
나의 짧은 견문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협력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NHN에 합병된 검색회사 ‘첫눈’에서 4개월 간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에도 기획자(디자이너)와 개발자(엔지니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던 것 같다. 웹프로그래밍을 5년이 넘게 해 온 한 개발자 분은 지난 회사에서 수시로 바뀌는 디자인에 따라 코드를 되풀이하여 고쳐야 했던 고충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검색 모델의 개선에 관여하고 있던 한 기획자 분은 개발자들의 기술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워 논의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 종종 열리곤 했던 각종 세미나에서, 개발자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재귀recursion’이라는 개념을 기획자들이 이해하지 못해 개발자들이 진땀을 빼며 설명하던 적도 있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실질적으로 구현이 가능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의 작은 차이가 기술적으로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짜야 기술적으로도 효율적인 설계가 나올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디자이너들이 데이터베이스와 운영체제, 대규모 시스템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방책이겠으나, 그것이 어렵다면 엔지니어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친구 Jure의 초대로 슬로베니아의 오픈소스소프트웨어 커뮤니티 Kiberpipa[2] 에 방문하여 2주간 함께 활동하면서 나는 이 원활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실마리를 엿보았던 것도 같다. 이곳에서는 오픈소스 개발 뿐만 아니라 여러 아티스트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협력하여 흥미로운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실체화하는 데에 있어 의사소통의 벽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티스트들은 엔지니어의 기술적인 관점에서부터 나오는 의견을 적극 수용했고, 엔지니어들은 아티스트의 의도를 최대한 구현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루는 류블랴나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한 아티스트의 작업을 도운 일이 있었다. Space Junk Spotting[3] 이라는 프로젝트였는데, Saso라는 아티스트가 아이디어와 기본적인 스케치, 반 년 간 개발한 미완성의 구현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완성시키고 시스템의 다른 부분에 연동하여 실제 전시장에서 3개월간 작동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전시회의 시작까지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 조금 촉박해 보였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다. 여기서 Saso와 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Bostjan의 활약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Bostjan이 한 일은 먼저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예술활동(?)에 참여해보고픈 나의 소망을 이해하고, 나의 프로그래밍 실력에 대해 비록 구두로였지만 확인하고, 현재 커뮤니티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곧바로 Saso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다소 추상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설명을 듣고 이것을 엔지니어인 내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전체 시스템의 구조를 깔끔하게 그려내어 Saso와 내가 같은 mental model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Saso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마감 순간이 다가와 초조해하던 Saso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두 시간 정도면 완성될 것 같다’고 말했고 Bostjan은 ‘개발자들이 저렇게 말할 때는 이틀 정도를 의미하니 그냥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게 좋겠다’라고 친절히(?) 귀뜸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작업은 정말로 두 시간 만에 끝났고 초조해하던 Saso와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저녁 전시회의 오프닝에서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한국에서 온 천재 해커 소녀’ 취급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 물론 Bostjan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순탄치 못했을 작업이었다. Bostjan은 Kiberpipa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프로젝트에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커뮤니티에서 그가 필수적인 존재임이 내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회사에서도 그러한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극히 적었음에도 그들은 IT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연결하여 실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혹여 없더라도,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상호적으로 노력하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간극은 조금 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Space Junk Spotting (사진 제공: Saso Sedlacek)
2. Ideo Design: 컨셉디자이너와 Google 한때 ‘컨셉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기계과에서 개설되는 <인간과 기계>라는 과목에서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을 쓰며 이 가공의 직업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바를 적어보았었는데, 이 자서전의 일부분을 여기에 붙여본다.
“제품은 그 제품 하나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어떤 부분에 자리잡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지 등등, 그 제품을 둘러싼 주변의 문맥까지가 모두 제품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간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진 제품은 그 자체가 이미 환상이며 꿈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닌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컨셉디자이너는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잡는 것을 돕는다. 제품의 기능, 외관 디자인에서부터 광고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이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회사의 경우도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빼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한부의 고용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살고있는 현대에, 회사 전체가 한 마음이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가슴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컨셉디자이너는 먼저 그 회사의 사람들, 중역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를 두루 만나보며 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 등을 파악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병행하게 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표점, 그들 모두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이상이자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지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획자나 경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경영 컨설턴트, 통계학자, 종종은 심리학자들까지도 동원된다.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는 각본이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고, 한 줄의 카피가 되어 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고, 그림이 되어 건물 전체의 외벽에 도색되기도 한다. 좌우간 회사 전체의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 <인간과 기계> 과목 숙제로 제출했던 본인의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 중에서
디자인과 생활 수업을 듣고 이제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가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그려 보고자 했던 것은 바로 Tiger의 Four Pleasures 중에서 Ideo라는 측면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개인적인 자기정체성과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 주도적story-driven 디자인. 개인의 특질을 존중하고, 개인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흐름일 것도 같다.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예로 드셨던 Apple사가 단연 이 Ideo Design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나는 내 인생에서의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졸업 후 Google의 취리히 연구 센터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할 계약을 맺은 것이다. (덕분에 20년 뒤에 내가 ‘컨셉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었다) 지인들로부터 축하와 격려와 염려를 동시에 받으면서 나는 ‘전산학도에게 Google이 멋진 직장임엔 틀림없지만, 전산학과가 아닌 사람들마저 내 취직 소식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보았었다. 단지 주변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취업 대상이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한 요인으로 Google이 그 동안 대중들에게 보여온 비전을 꼽으려 한다. 먼저, “Don’t be evil”이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모토에서부터 시작한, 외부의 정치력에 휘둘리지 않고 사람의 수작업으로 오염되지 않을 순수한 기술에 대한 그들의 포부가 사람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애정을 심어 준 까닭이다. 거대한 포탈 서비스를 옆에 끼고 수익 모델을 고안하는 여느 검색엔진들과는 달리 순수하게 검색에만 집중하여, 사람들을 그다지 성가시게 하지 않는 소박한 몇 줄짜리 광고로 돈을 벌겠다는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관성 있게 지켜 온 단순명료한 인터페이스와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로고 디자인 또한 점점 복잡다단해지는 웹 환경 속에서 피로해져 가는 사람들의 눈을 자연스럽게 길들이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해왔을 터였다. 채용에 있어 길게는 14회까지 걸쳐 진행된다는 강도 높은 기술 면접, 엔지니어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와 창의적인 사무실 분위기 역시 기술에 대한 그들의 고집스러운 애착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9년의 세월에 걸쳐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오늘날 Google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움직이는 Google의 이러한 ‘이야기’ 역시 Ideo Design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형적인 구글의 인터페이스 (http://www.google.com/에서 캡쳐)
닫는 말 내게 <디자인과 생활> 수업은 디자인의 귀중한 원리와 원칙들, 디자인을 둘러싼 각종 생각할 거리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여러 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 디자이너로서(혹은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 그리고 인생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교훈 몇 가지를 얻은 참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 마지막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developmental tasks가 몹시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교수님께서는 30대까지는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기본적인 기교를 연마하고, 40대에는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며, 50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조직을 이끌거나 좋은 책을 쓰거나 하여 사회 기여에 이바지하는 등, 사람에게는 나이에 걸맞게 따라가야 할 단계적인 성장 과정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40대 이후에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까, 애매하게 흩어져 있던 생각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이 되기 위해 어떠한 것을 다듬어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이 수업에서의 소중한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나아가려 한다.
[1] 실습 과제로는 heuristic evaluation,
rapid prototyping, usuability test 등을 주로 다루었다. [2] Kiberpipa, <http://www.kiberpipa.org/> [3] Space Junk Spotting, <http://www.sasosedlacek.com/anglesko/projects_Spacejunk_eng.htm>
"Maslow's Triangle을 생각해 봐. 네가 뭔가 기분이 나쁘면 체크해 봐야 할 리스트가 있어.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밥을 제대로 못 먹었나? 샤워를 안 했나? 어디가 아픈가?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는거야. 친구들이랑 주기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고 이런 식으로. 이건 bottom-up이야. 피라미드의 아래쪽이 없는 상태에서 윗쪽을 먼저 채울 수는 없어. 뭔가 대단한 걸 이루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 그럼 너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거야. 그건 치팅이야."
유레가 했던 말. 사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들은 당연한 말인 거 같은데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걸 잊고 살았다. 학교 공부에 매진하고 동아리 프로젝트에 매진할 때면 잠을 세 시간을 자건 밥을 거르건 방이 난장판이 되건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생활의 밸런스가 깨져있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깨달았지만, 그건 치팅이었던 거다.
그리고 또 떠오른 생각.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게 사실 별 거 아니야. 의식주 적당히 해결하고, 예쁜 마누라랑 아이들이랑 살고, 결국은 그거면 되는거야. 사회적 성공이니 뭐니 하는 건 사실은 진짜 행복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야' 라고 말했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지만 갑자기 이 친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긴 것 같다. 기본적인 욕구 - 의식주와 가정 등 - 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건 물론 허상이지만, 그런 기본적인 욕구가 또 행복이라는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도 사실은 대단히 어렵지만, 그게 충족되고 나면 다음 단계의 더 큰 욕구가 있고 이걸 충족해나가는 게 또다른 행복이 되는 것 같다고. 하긴 그 친구에게는 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나름의 논리가 있는 거겠지만서도.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가 뭘까. 타고난 능력의 차이일 것 같지는 않잖아. 내 생각은 그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계획성없이 소모해왔던 사람들이야. 즉각적인 욕구만을 충족하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뤄온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희생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겨온 사람들이야. 이를테면 나는 요즘 테드톡 보는 게 너무 재미있어. 그냥 이거나 하루종일 보고 싶어. 그렇지만 자, 나는 숙제를 해야 하고 내 프로젝트들을 해야 하니까 조금만 보고 차후로 미뤄두는거야. 그런 희생이 결국은 내 미래를 만드는 거니까."
이것 역시 지극히 정석적인 말이지만 늘상 스티븐 코비의 3사분면에 매달리고 있거나 4사분면으로 도피하곤 하는 나에게는 또 몹시 찔리는 얘기였다.;;
"내가 파티에 열광하는 건 사실 외로워서예요. 나는 사람들하고 끊임없이 만나고 얘기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이렇게 타지에 와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거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지 않아요?"
"글쎄...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 인생은 항상 외로웠거든요. 오히려 여기서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것 같아서 덜 외로운 편이랄까요."
살로메와, 줄리아 남자친구의 대화. 옆에서 설거지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얘기에 슬쩍 웃음이 났다. 나도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된게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다'라는 거였으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빈 시간들을 온통 친구들과의 수다로 보내왔던 나는 대학 초년에는 하루를 수다로 정리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남자친구에게 모든 일상을 보고하며 살기도 했고, 때로는 사람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시러 다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혼자 있는 것 자체를 즐기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잘 되고 있는 건 아니고, 그게 어떨 때는 지금처럼 쓸데없이 긴 글을 쓰는 걸로 분출되기도 하지만. 하하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에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몫인 거라면, 인생이란 게 원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을 수 있겠지. 오히려 우연히 다른 위성과 조우하게 되는 그 드문 이벤트를 더욱더 소중하게 반길 수 있을지도.
아무래도 학기 중보다 요즘이 더 정신없는 것 같네요. (그땐 글 쓸 시간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_-) 그래도 짤막하게라도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 2005년 나의 5대 키워드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_-)
1. SPARCS, 스팍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1년동안 스팍스의 회장을 맡았습니다.
뭐 힘들 때도 많았고... 임기가 다 끝난 지금에서도 차근차근 돌이켜볼 기운도 없을 만큼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지만요.
2005년 한 해가 제 지난 21년 중의 그 어떤 해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운 해였던 것은 아마도 여기에 크게 기인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없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은 오버고) 여튼 뭐 구구절절한 얘깃거리들이 많지만 잘 숙성시켜두면 언젠가 잔뜩 늘어놓을 때가 오겠지요.
일단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
2. Star Wars
(...갑자기 분위기 반전.)
(여기서부터는 좀 어처구니가 없으실지도-_-)
영화라는 것은 '데이트를 하다하다 정말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나 돌아다닐 기운이 없거나 화젯거리마저 떨어졌을 때나 보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제가 갑자기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그후로 클론워즈를 포함한 스타워즈의 모든 에피소드의 섭렵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노블라이즈 오디오북을 지른다던가 캘린더를 지른다던가 하는 주책을 비롯하여 Dark lords of the sith 등의 각종 외전까지 들이파고 있는 지경입니다...
-_- 웬만하면 발을 들이지 마시길 권유드려용.;
3. Ewan McGregor
(앞의 주책과 연결됩니다.)
제가 스타워즈에 그토록 빠지게 된 이유는 다 이 망할 스코틀랜드 배우가 연기한 오비완 때문이었습니다. -_-
그 후론 이 사람의 필모그래피에 줄 그어가며 출연작들을 챙겨보고 있지요. 본 것들을 나열해보자면 대략...
스타워즈 에피소드 1,2,3
물랑루즈 (The Moulin Rouge)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
쉘로우그레이브 (Shallow Grave)
엠마 (Emma)
Solid Geometry
아일랜드 (The Island)
빅피쉬 (Big Fish)
다운위드러브 (Down with love)
벨벳골드마인 (Velvet goldmine)
영아담 (Young Adam)
로봇 (Robots)
인질 (A life less ordinary)
스테이 (Stay)
Little voice
겜블 (Rogue Trader)
정도 되겠습니다. 어 생각보다 별로 안 많네요? 다운받아 놓은 것들 마저 봐야겠습니다...-_-
4. The Moulin Rouge
(역시나 앞의 주책과 또 연결됩니다.) 화려함. 스타일. 현대적인 아름다움. 소비되는 문화. 거대한 문화 산업.
두서없이 썼는데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받은 충격(?)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습니다.;
뭐 오비완 했던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길래, 그것도 로맨스라길래, 그 길고 긴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챙겨본 영화였는데 그 효과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전 사실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로는 티비도 거의 안 봐서, 요즘 엠넷같은 걸 보면 눈이 뒤집히고 그럽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티비프로그램'에서 저렇게 스타일리쉬한 화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펑펑 쓰게 된거지?! 내가 중학교 때 한창 방방 뜨고 있던 틴에이저 댄스그룹들 - 이를테면 신화 같은 ^^; - 은, 그 어리고 비슷비슷하고 시시하기만 하던 멤버들은 언제 또 저렇게 근사한 녀석들로 큰 걸까!! 뭐 이렇게 절규하고 있지요...;;; 화면 가득 살아숨쉬는 캐릭터들.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인 매력들. 그리고 그걸 잘 표현해주는 무대와 연출. 매일 보는 사람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전기 안 들어오는 촌구석에서 몇 년 틀어박혀있다 온 사람처럼 신기하기만 하네요-_- 이런 정도니 처음에 물랑루즈를 보고서는 그냥 넋이 나갔다고밖엔...
유안 맥그리거의 노래. 춤. 연기.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거의 7월 한 달 정도를 물랑루즈에 빠져 지냈던 기억이 나요. OST를 듣고,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외국 팬사이트 뒤적거리면서 촬영 에피소드라든지 패러디라든지를 읽으면서 킬킬거리고, 그것도 아쉬워서 영화에서 소리만 따서 MP3로 만들어서 듣고 다니고... -_-
(이런 걸 쓰고 있으니 저 스스로도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한 건가!!'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크윽;;)
5. John Maeda
(아 이젠 좀 정상적인 이야기... 일까요?)
미디어랩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 사람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존 마에다, 간단히 소개하면, 컴퓨터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래요. 이 사람이 쓴 Maeda@Media란 책, 꽤 감명깊게(!) 읽었고요. (보시면 알겠지만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입니다; 다는 못 읽었지요-_-) 덕분에 미학이라는 것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음, 여기에 대해선 앞으로도 꾸준히 탐구를 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습지요... ^^
여기에서도 또 역시나 '들이파기 신공'을 동반하여... 미술사라든지 철학이라든지 쪽의 책을 사재기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접어두고... -_-
정리하자면 동아리일로 좌충우돌 진로 문제로 질풍노도에 관심가는 쪽은 가리지 않고 별의 별 데를 다 들이판 한 해...였습니다.
동아리일 덕분에 리더쉽이라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어설프게나마 경험해볼 수 있었고요.
진로... 내가 앞으로 어떤 분야를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고민은 많았지만 아직도 답은 못 냈습니다. 이제 4학년인데 창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후진국일수록 학생들이 진로를 빨리 결정한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으며...-_-;;;
이걸 보고 있으면 '당신 전공 공부는 안하냐!!'라고들 생각하실터인데-_- 음 LKIN과 학과 공부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긴 하네요.; 사실 그 겨울에 저는 1년치의 배울 것을 다 배워버린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그 겨울의 세미나와 프로젝트 덕분에 소프트웨어공학개론이라든가 전산망개론이라든가 데이터베이스개론 같은 과목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거든요. 아 그래 저런 이슈가 있었지! 그래 저것 때문에 내가 고민했단 말이지! 우오오오 말로만 듣던 그 xxxxx를 내 손으로 구현하는 영광이!! 하면서요. ^^; 리더쉽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고민도 상당 부분은 LKIN과 관련된 것들이었네요.)
어쨌든... 후반부에 가서는 거의 전공과 상관없는 짓들;에 골몰해 있었는데, 전공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제겐 좋았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그 순간순간이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전 주로 '해야 하는 일'들만 생각했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기는 것은 항상 뒷전이었던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책임감 내지는 성실함이겠지만...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 지를 아려면 하고 싶은 것들을 즐겨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동안 스스로에게 그런 여유를 주는 것에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그걸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되도록 행동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마음가는대로 끌리는대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려고 해요. 지금 아무리 재고 따져봤자 나중엔 다 틀릴 거거든요.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게, 결국은 최선이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즐겨보렵니다.
또 <인간과 기계> 숙제입니다. -_-;;; 방금 구운 따끈따끈한 것.
성공적인 KAIST 생활이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예요.
지금은 오전 7시 22분, 스팍스 동아리방. 50평 남짓 되는 공간을 가득히 채운 형광등 불빛, 유쾌하게 웃으며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밤을 지새운 새벽이라는 걸 까맣게 잊게 된다.
LKIN screenshot - 강의평가 내역
방금 전까지도 나는 동아리에서 진행하고 있는 핵심 프로젝트, LKIN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LKIN은 Lecture Knowledge IN의 약자로, 수강지식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교의 모든 수강 과목들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이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다음 학기의 시간표를 미리 짜 볼 수 있고(그것도 대단히 편리한 UI를 통해서 말이다), 과목에 대한 알찬 정보들을 열람할 수도 있으며, 게시판과 자료실을 통해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다. 강의에 대해서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는 ‘로드, 학점, 남는 거’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별점을 매기는 것도 가능하다. 지난 겨울부터 착수해서 3월부터 베타 서비스를 선보였던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꾸준한 업데이트와 개발을 거쳐 어느 덧 1900명이 넘는 가입자를 유치하는 사이트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며칠 전 학생들이 고대하던 대로 드디어 교무팀의 강의평가 자료가 공개되었을 때, 총학생회가 이것을 제일 먼저 우리 LKIN 개발 팀에게 전달해 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늘 저녁, 그러니까 10시간 쯤 전, 우리는 총학생회로부터 강의평가 자료가 담긴 엑셀 파일을 받아들고 회의를 했다. 이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가공해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LKIN으로만 수십 번쯤, 동아리 회의까지 합친다면 골백 번은 이렇게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해 본 적이 있던 멤버들이라 진행은 순조로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과목사전 페이지에 강의평가 내역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집어넣자, 홍보 겸 강의평가 공개 기념 겸 해서 iPod nano를 걸고 이벤트를 하자, 이렇게 할 일들의 목록을 뭉게뭉게 정하고 나서 의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이 작업들을 언제 할 것이냐?
“그냥 오늘 밤에 끝내버리죠?” 한 녀석이 이렇게 말했고,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다. 강의평가 자료는 무사히, 그리고 아름답게 LKIN에 편입되었고, 경품 이벤트를 위한 로그 처리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처음은 아니다. 이렇게 하루의 밤을 활활 불태워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학교 때, 그리고 고등학교 때, 두 차례에 걸쳐 KAIST의 영재캠프에 참여하면서,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차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KAIST에 가면 매일 밤새서 프로젝트도 하고 하루종일 학문에 관한 이야기로 입씨름도 하면서, 열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꿈에 어느 정도 가까운 경험을 겪어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어느 정도 가까운’이라는 말을 쓰냐면, 사실 매일같이 밤을 새면 곤란하지 않은가. 이런 경험은 가끔이면 충분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동아리 프로젝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그만큼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이 성공적인 카이스트 생활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학할 때부터 선배들로부터 닳도록 들은, 대학 생활에서 꼭 잡아야 한다는 세 가지, ‘동아리, 연애, 학점’ 중에서도 동아리는 벌써 첫 번째로 꼽히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속한 이 컴퓨터 동아리, 스팍스의 활동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녹아들어 있다. 학업, 진로 설정, 인간 관계, 취미 생활 등등. 먼저 학업과 진로 설정에 대해. 이곳에는 시스템프로그래밍 동아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산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고, 전산에 관련된 학술 활동 또한 활발하다. 각종 세미나와 프로젝트를 통해 전산에 대한 여러 가지 주제들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전산이라는 분야 내에서도 또 자신이 갈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인간 관계이다. 뭐 이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과 나누는 정겨운 술잔 속에 피어나는 애정..... 아, 내일 회의 끝나고 나면 술 마시러 나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생산적인 여가 활동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상당수는 여가 시간을 온통 게임으로 보내곤 한다. 물론 우리 동아리에도 게임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더 열렬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생산적인 여가활동도 한다! 리눅스 서버를 가지고 여러가지 삽질을 하는 건 오랫동안 우리 동아리의 훌륭한 취미 생활로 권장되어 왔다. 처음에는 자기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더 나아가선 ara와 ska라는 비비에스 시스템을 운영하고, FTP 미러링이나 뉴스 서버 관리를 하기도 하고, LKIN과 같은 프로젝트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컴퓨터만 하다가 ‘전형적인 전산인의 체형 – 인격이 강조되는 몸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요 농구클럽이라든지 인라인타기 모임 같은 운동 소모임들도 있다.
팔불출처럼 동아리 자랑만 늘어놓았지만(사실 1년 동안 동아리 회장 + LKIN 팀장을 하며 감동받은 순간이 많다 보니 자랑이 길어져버렸다) 정리해보면 나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단 학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 여기서의 학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점이라는 수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본기를 닦아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업에 학과 과목 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실질적인 경험이 동반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주로 동아리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얻었지만, 동아리 말고도 아르바이트나 인턴 등의 기회도 많을 것이다. 둘째는, 인간 관계이다. 앞으로 학문을 함에 있어, 또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들을 얻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동아리 사람들일 수도 있고,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일 수도 있고, 교수님일 수도 있다. 연애라는 것도 일종의 인간 관계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셋째는, 인생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다. 자신이 평생동안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그 청사진의 일부이고, 또한 삶에 지칠 때마다 자신을 충전해 줄 멋진 취미 생활을 찾는 것 또한 그 일부일 것이다.
3학년도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나는 얼마만큼 성공적인 카이스트 생활을 하고 있을까? 자문하면서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 위에서 부지런히 언급한 LKIN은 http://lkin.kaist.ac.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LKIN screenshot - 과목사전 목록의 강의평가 파라미터 (배터리 잔량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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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심없이 50평이라고 썼는데... 가물가물하네요. 우리 동방이 몇 평이드라-_-;;;
지난 번에 올린 연애편지(?)의 뒷이야기입니다. 물론 픽션입니다. 픽션의 속편은 픽션을 상속받은 것이므로 픽션.... (풉)
이것도 숙제냐, 그건 아니고 그냥 지가 괜히 궁금해서 써 봤습니다. -_-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저런 편지를 받고 나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고등학교 남학생의 심리묘사라니 고거 한 번 재밌겠구나!!
등등등...
잘 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나면 쪽팔려하면서 지워버릴지도...;;
아 제목은, 편지를 받은 계절이 대략 그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붙여본 거구요.
그럼 즐겨주세요. ^^;
툭. 어떤 손이 어깨를 친다.
고개를 반쯤 돌리고 힐끗, 얼굴을 확인한다. 예의상의 확인이다. 이 독서실에서 내게 아는 척 할 사람이라곤 저 녀석밖에 없으니. 나는 대답 대신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 야, 갑갑하지 않냐? 바람이나 좀 쐬고 오자.
...귀찮은 녀석.
- 아까부터 이 페이지잖아. 공부하는 척 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응?
저 녀석의 실없는 수작에 대꾸하기도 귀찮다. 나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녀석이 억지로 내 손아귀의 샤프를 잡아떼고 나를 일으키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시간쯤 되면 휴게실의 쓰레기통은 온갖 과자봉투와 음료수 캔, 종이컵들로 넘쳐난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밤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이 공기가 선뜩하게 차가워질 무렵이면, 나의 선배들은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험을 치를 것이다. 답안지가 걷히고 낯선 교실을 나서며 선배들이 심호흡을 하는 순간,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선배들이 해방감에 들떠 거리를 누빌 동안, 나는 1년의 달력을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마냥 책만 읽고 꿈만 꾸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딱 1년만, 모두 멀리한 채로, 죽은 듯이 살면 되잖아. 내게 다짐한 그 1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난 숨이 콱 막히곤 한다.
녀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굴리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낡은 소파에 앉아 눈을 비비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두 여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들어와 음료수 캔을 뽑아간다.
- 컴퓨터 쓰려면 써라.
벌써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녀석이 다가오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나는 그가 양보해 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쩐지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지금 나는 내가 몹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그녀의 대답을 특정한 한 가지 매체로 한정해줬어야 했다! 핸드폰이 진동할 때마다, 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닐까, 생각하며 초조해하는 건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그렇지만 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그녀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어제 본 드라마 루루공주에서 김정은이 입고 나온 노란색 원피스가 너무 예뻤다는 둥, 지난 달 전화 요금이 평소보다 배는 나와버려서 남자친구 생긴 걸 엄마한테 들켜버린 것 같다는 둥,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여학생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나는 눈 앞의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참을 만 했다. 때로는 주변의 자잘한 소음이 평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섬광같은 충격은 없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눈앞이 아뜩해진다거나, 별안간 눈물을 쏟는다거나, 주먹으로 벽을 친다거나, 풀썩 주저앉는 것 같은 극적인 반응 따위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읽을 수록, 나는 점점 더 절망적인 기분으로 빠져들었다. 그건 몹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차라리 눈물을 쏟든지 풀썩 주저앉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단지 씁쓸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자잘한 소음은 끊임없이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와 이 휴게실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상기시켰고, 나는 가슴 속에 스며들어오는 감정에 몰입할 수 없는 채로 당혹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나는 녀석이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모니터를 훑어보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이 읽어도 좋을 건 결코 아니지만 저 무모한 호기심은 막을 기운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내 손에서 마우스를 나꿔챘다.
- 뭐냐 이게... 차인 거냐?
피하고 싶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 과장된 말투. 담배 냄새로 몸을 휘감았다고 해서 녀석의 어설픈 연기가 가려지진 않는다.
- 야 사내자식이.. 겨우 실연당했다고 의기소침한거냐?
아침에는 멀끔하던 녀석의 턱에 벌써 수염이 빼죽이 나온 것을 바라보며, 왠지 속이 메슥거려 오는 것을 참았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단지 어른인 척, 사내인 척 하고 싶어하는 어설픈 흉내가 거슬릴 뿐이지. 그렇지만...
녀석은 자못 진지한 표정을 풀고 씩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 세상의 반은 여자야..
순간 속이 울컥한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 네가 내 기분을 알아?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조용히 입 속으로 사그러뜨리며 비척 웃는다. 말해서 뭐하나. 네 녀석 따위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는데.
녀석이 다짜고짜 던지는 가방을 들러메고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은 근처의 공원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며 사라졌던 녀석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부스럭, 봉지 안에 든 것들을 보고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 난 술 마실 줄 몰라.
- 마실 줄 모르면 코로 들어가냐? 그냥 입에 부으면 되는거야. 일부러 비싼 거 사왔더니.
단번에 종이컵을 들이키자 쓰고 화끈거리는 것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식도를 타고 코를 자극하는 알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만다. 말없이 컵을 내밀고, 찰랑거리는 액체를 다시 들이킨다. 가로등 불빛에 남녀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까운 것처럼 천천히 발을 디디며, 웃고 이야기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그림자. 그녀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고 소망했었는데.
-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 ...처음 만났을 때부터.
- 어떤 사람이었는데?
- 특별한 사람.
그래, 특별한 사람이었지.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거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아냐? 이를테면... 그래, 같은 음악을 들으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함께 열광하고, 함께 분노하는 거야. 뇌의 어딘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우리의 언어는 정확히 주파수가 맞았어. 어떤 단어도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이 없었다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 우리 사이엔 오해라는 게 생길 여지가 없었다는 거지. 그래서 언어라는 매개체만 통하면 우리는... 아주 똑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어.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괴로움을 이야기하면, 단지 몇 마디만으로도, 다른 사람 역시 똑같은 괴로움에 짓눌려버려. 이해하냐? 똑같은 인간끼리는 위로라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거야.
그런 이유로... 그 세계엔 행복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았어. 괴로울 때면 의존하게 되고, 그럴 수록 더 괴로워지고......
웬일인지 녀석은 아까부터 말이 없다. 땅콩 껍질을 하나씩 바스러뜨리는 무료한 장난이 계속된다. 나란히 앉아 있었던 탓에, 나는 녀석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듣고 있었을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듣고 이해하길 바랬다기보다는, 그냥 답답한 마음을 지껄이고 싶었을 뿐이니까. 녀석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 난 화장실 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그제서야 온몸에 퍼진 기묘한 나른함을 느낀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이 불연속적으로 뚝뚝 끊긴다. 평소보다 조금 둔해진 듯한 감각이, 꼭 안경을 벗었을 때처럼, 현실의 뚜렷한 윤곽선을 누그러뜨린다. 수도꼭지를 틀고,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군다. 몇 번을 헹궈도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은 좀처럼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하...
다시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가 주장하는 우정이라는 이름도, 내가 억지를 부린 사랑이라는 이름도, 그 무엇도 우리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강렬하게 빠져들었다. 미칠 듯이 괴로웠다.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러니다. 이 격렬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이해줄 단 한 사람인 그녀가, 나를 거부했다는 것.
- 야, 괜찮냐? 지금 토하고 있는 거 아냐? 등 두들겨줄까?
나는 입가의 물을 훔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 괜찮아?
- 어.
- 자식. 마실 줄 모른다더니 잘만 마시네.
녀석에게 멋적게 웃어주고 발걸음을 떼어놓다가, 나는 그만 휘청하며 넘어질 뻔 했다. 제 걸음도 가누지 못하다니, 이런 한심한 꼴을 봤나. 녀석은 잽싸게 나를 붙잡아 제 어깨에 내 팔을 두른다.
- 조심해 임마...
그렇지만 그녀도 나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나는,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댈 필요도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죽을 때까지 복잡미묘한 감정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저 단순한 녀석이 내 쓸데없는 자존심보다는 조금 더 위로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혼자서 버티기 힘들 땐 기대면 된다. 우리는 어차피 나약한 존재들이니까, 서로 어깨를 빌려주면서 그렇게 버텨가면 되는 거다. 이 간단한 걸 왜 이제서야 깨달은걸까... 아니 아직 18살이니까 오히려 이른 셈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내 체중을 싣는다.
- 미안, 어깨 좀 빌릴게.
넵 여기까집니다.
여기다 좀 붙여볼까, 하고 처음에 구상했던 설정을 다시 들여다봤는데 많이 달라졌네요. 그래도 처음 설정보다는 결과물이 좀 더 나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보이세요? 편의상 '나'를 K라고 하고 '녀석'을 J라고 하고 얘기해볼게요.
K는 보시다시피, 속으로는 J의 행동을 거슬려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비척' 웃는다든지 '씁쓸히' 웃는다든지 하여튼 실실 쪼개기만 하는 놈입니다. -_-; 그래서 J의 입장에서는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지요. 알면 무서워서 같이 못 있을겁니다;;;
J는, K가 말한 것처럼, 어른인 척 하고 싶어하는 소년입니다. 남자다움을 숭상하고, 남자다워보이길 원하죠. 그렇지만 뭐.. 거기에 나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이에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이지요. 의리라든지 하는 가치들이 이 녀석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인 K를, 그는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몫을 해 주려 할 뿐이지요.
여러가지 잡설.
어디서 술을 마실까, 처음엔 J의 집을 떠올렸지만 부모님이 마음에 걸려서 공원으로 바꿨고요.;
두 사람에게 뭘 먹여볼까, 소주를 먹여볼까 생각하다가 공원에서 그러고 있는 건 너무 청승맞을 것 같아서 좋은 술 먹였습니다. ^^;
그리고 K는 왠지 술을 잘 마실 것 같아서, 가볍게 취기만 돌게 하고 토하지는 않게 했습니다. -_-;;;
"네 소설에 나오는 너랑 찐하게 섹스하는 남자, 영훈이는 정훈이 맞지? 내가 아니지? 정훈이랑 그런 관계라는 거 지금은 이해해줄 수 있어. 난 너하고는 키스밖에 안 했잖아. 뭐라고 해야 할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나는 널 정말 사랑했는데 소설에는...... 왜 내가 너를 겁탈하는 거처럼 나오니? 그건 정훈이 아니니? 근데 또 이핼 할 수 없는 게 캐릭터를 보자면 영훈이란 남자는 나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게 뻔한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니? 난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야."
소설은 허구야. 거짓말이라구. 이미지는 이번에는 이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상욱과는 두 번 키스를 했지만 정훈과는 키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신 이미지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소설의 캐릭터들은 분명 어떤 모델들로부터 창조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사람의 특징들이 모자이크처럼 합성되는 거라고. 다만 자신이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실제 인물들은 소설에서 단순히 몇 가지 일치되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모델로 이용했다고 분개하기도 감동하기도 한다고. 이미지가 상욱에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자 상욱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 소설가들처럼 불쌍한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자신의 과거와 사생활마저도 대중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야 하다니. 사고로 죽은 아들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지도 못하고 결국 소설로 만들어내는 어떤 작가를 보고 참 작가들이란 무서운 존재들이구나 싶었어. 널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야. 나는 백 번 널 이해해줄 수 있어. 널 한때 되게 좋아했었고 세월도 이렇게 흐른 마당에, 인생이 뭐 별거냐. 다 이해해줄 수 있어. 너도 그게 직업 아니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상욱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눈빛에 연민이 서려 있다. 이미지의 속에서 뜨겁게 뭔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술기운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야, 좀 문제가 생겼어. 난 그렇다고 쳐. 우리 마누라 때문에 말이지."
상욱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더니 좀 비굴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마누라, 너하고 연애한 거 실제보다 더 심각한 걸로 예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거든. 아마도 예전부터 클럽에선 우리 생각보다 더 찐한 소문들이 나돌았나봐. 네 소설 나오자마자 사서 읽더니 어느 날 펑펑 우는 거야. 내가 진실하지 못했다는 거지. 거짓말했다는 거지. 에전에 마누라 꼬실 때 마누라가 묻더라고. 이미지 선배와의 일 알고 있다고. 내가 그랬지.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이번 소설 읽고는 날 이제 믿을 수 없다고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라. 사실 요즘 며칠째 냉전중이야. 이런 얘기 너한테까지 하기엔 뭐하다만 사실 내가 그 동안 사고치고 조용해진 지 몇 달 안 되거든. 껀수 잡은 거지 뭐. 그래서 말인데...... 어이 참 미안하다야."
상욱이 거칠게 술을 입에 털어넣으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러길 바라지만...... 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다면, 언제 네가 우리 집사람에게 진실을 좀 밝혀주면......"
- 권지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에서
이렇게 막 가져다가 타이핑해도 되려나요... (안 되겠지요-_-) 그렇지만 그냥 요즘 생각하던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서, 가지고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한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각자 구해서 읽으라면 아무래도 귀찮아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어쨌든 멋진 책이니까 정말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사서 보세요. ^^ [꽃게 무덤]이라는 책입니다.
어떤 책... 아마도 제목이 '서른'이었나 '서른 둘'이었나 '서른 셋'이었나 하는 책이었는데요. 책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겉장에 이런 요지의 말이 쓰여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창작된 허구의 인물들이며, 혹시라도 현실의 누군가와 닮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저 위의 소설에서 하고 있는 얘기와 비슷한 맥락이지요. 작가는 미리부터 걱정하는 겁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소설 속 인물들을 작가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과 동일시하려 하고, 그로부터 여러가지 오해가 싹트는 것을요. 막 잔뜩 소심해져서는 저런 문구를 책 겉장에 써넣고 있는 작가의 기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 내가 이런 쪼잔한 말까지 써야 돼? ㅠㅠ' 하면서요...;;;
소설가는 거짓말쟁이라고들 합니다. 거짓말을 잘하면 잘할 수록 훌륭한 이야기꾼인거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너무나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걸 진짜인 것으로 믿어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할겁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그쯤 되면 작가는 혼란스러울 겁니다. 자기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사람들의 오해섞인 눈초리에 슬퍼해야 할지.
위의 소설 속 이미지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권지예가 아니라, 이미지가 이렇게 말한 겁니다.) '허구는 숨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허구는 변신했을 뿐이다. 어느 날 실재세계에 아주 위협적인 괴물로 나타났다. 이미지의 삶은 이제 소설 속 여주인공의 삶으로 간단히 규정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이 불멸의 오해와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을 어떡할 것인가.'
소설가란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안도감이 듭니다. 아 역시, 글쓰는 건 고상한 취미로나 삼고, 소설가 따위는 꿈도 꾸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풋내기 습작 몇 개를 끄적거리면서도 벌써 이런 게 두려워지는데, 그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반역>, 1928
이게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그 그림입니다. 아싸, 본 적 있는 그림이네요. 뿌듯합니다. 이 널따란 세상에서 아는 거 마주치면 또 희희낙락하게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 그나저나 이미지의 반역이라, 소설가란 인간들은 이렇게까지 치밀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미지'라는 이름은 중의적인 의미였나봐요.
아따 대학가요제 보면서 놀고 왔더니 공부하기가 참 싫소이다... -_-
내친 김에 이거나 마저 올리고 잘랍니다.
<인간과 기계> 숙제 2탄 - 20년 뒤의 자서전.
(아아 이런 즐거운 숙제를 다 내주다니.. 참 좋은 과목 아닙니까 ㅎㅎㅎ)
A4 2장 쓰라고 했는데 신나서 버닝하다보니 그만... 길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20년 뒤에 제가 뭘로 먹고 살고 있을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직업 얘기 나오면 슬그머니 화제 돌려서 '어? 벨이 울린다' 내지는 '스물 한 살의 나에게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을테니 비밀이다. 후훗' 따위로 무마하려 했으나... 교수님께서 읽다가 화내실 거 같아서-_- 그러니까 '억지다!!'라고 생각되더라도 그러려니 넘어가주세용.
감상의 포인트:
1. 요리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2. 독신생활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3. 있지도 않은 직업을 만들어내느라 글쓴이가 겪었을 고초를 헤아려본다.
“잠깐만요!”
숨이 턱에 찬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찬다. 도대체, 좀더 세련되게 접근해 볼 수는 없는 걸까? 뛰어오는 모양새가 꼭,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쫓아 뛰는 스무 살 청년 같아서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만다. 아, 실수했다. 웃어버리다니. 어느새 내 앞에 다다라 숨을 몰아 쉬던 저 철없는 남자가 숨을 고르고 씩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내일 저녁은 어때요?”
스스로에 대해 유별나다는 말을 하는 게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이제 누군가가 내 생활에 파고드는 것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더구나 이렇게 갑작스럽고, 인위적인 방식이라면 더욱더 싫다. 친구들이 하나 둘 가정을 꾸려 떠나는 동안 혼자 남겨지는 생활을 선택한 지도 오래다. 한때는 나도 사랑에 들떴고 행복한 가정을 꿈꿨지만, 몇 번의 연애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난 혼자인 쪽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용기만 철철 넘쳐흐르는 저런 타입은 딱 질색이다! 쌀쌀맞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대꾸한다.
“죄송하지만 내일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럼..”
문을 밀치니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이 밀려든다. 우선 가장 밝고 커다란 불을 켠다. 주방으로 가면서 나는 조금은 품위 없게 입맛을 다시며 손을 비벼본다. 어린 시절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재미를 붙인, 아니 반쯤은 혼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야 했던 것이 바로 요리였다.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점검한다. 싱싱한 양배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까 그 남자를 황급히 뿌리치고 오느라 깜박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느타리 버섯과 양파, 대파를 흐르는 물에 씻어 송송 썰어준다. 달걀을 풀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맞추고, 버터를 프라이팬에 녹인 후 풀어 놓은 달걀을 붓는다.
지금의 자유로움이 좋다. 친구들이 하소연하는 상사의 잔소리도 없고, 언제 들어올 거냐고 바가지 긁어대는 남편도 없다. 일터에서 걱정해야 할 아이들도 없고, 사실 하루 종일 묶여있어야 할 일터도 없다. 말하자면 프리랜서다. 아, 달걀이 엉겨붙기 시작한다. 프라이팬의 밑바닥에 틈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면서, 주걱으로 프라이팬을 젓는다. 오늘 낮의 계약은 꽤나 만족스런 조건으로 성사된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나는 서서히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만큼 내가 내걸 수 있는 조건도 늘어갔다. 하는 일이 뭐냐고? 얘기하자면 긴데... 소금을 어디에 뒀었지?
달걀 표면이 연한 갈색이 된 것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아까 썰어둔 채소들을 프라이팬에 얹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쉬운 대로 양배추 대신 있는 과일들을 깎아 볼에 담고 드레싱을 뿌린다. 과연 이 일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던 것들이 결국은 내게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을 난 많이 겪어왔다. 그러니까 이제는 무엇에도 초조해하지 않을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느긋하게, 될 수 있는 한 이것저것 최대한 보고 듣고 지금처럼 맛보고 요리하면서 즐기는 것이다. 어이쿠, 오늘의 나는 묘하게 철학적이고 싶은 모양이다. 부친 달걀로 익힌 채소들을 감싸서 접시에 놓고 토마토 케첩을 얹는다. 이제 다 된 오믈렛과 샐러드를 식탁에 차린다. 혼자만의 호화로운 식탁 완성!
첫 술을 떠서 맛을 본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군, 혼자 중얼거려본다. 내 인생에서 처음 끓였던 라면은 퉁퉁 불은데다 국물이 너무 많아 반쯤 먹고 버려야만 했고, 내 인생에서 처음 타 본 커피는 내가 맛봐도 끔찍하게 싱거웠지만 우리 부모님은 딸의 노고를 생각해서인지 뭐라 핀잔도 하지 않고 끝까지 마셔주셨었다! 물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계신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는 가끔 부모님 댁에 가서 특별요리를 해 드리고 칭찬도 받곤 하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흔이라는 나이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일흔의 부모님 앞에서 칭찬을 받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소녀처럼 행동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소녀라... 불현듯 내가 소녀였던 시절이 떠오른다. 우연히 나가게 된 컴퓨터 경진대회에서 입상하게 되고, 매년 개최되는 그 대회에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던 열두 살 무렵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마침내 과학고를 거쳐 카이스트로 진학하며 품었던 컴퓨터공학도로서의 포부도 기억해본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컴퓨터 동아리에 들어가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깨달았던 순간도 상기해본다. 동아리 회장을 맡아 프로젝트 팀장도 맡아보고 나름대로 열정적인 전산과 학생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지, 아마도 그때부터 내 인생에 전환이 시작된 것이리라.
이전까지 방학마다 학교에 남아 홈페이지 제작 아르바이트니 동아리 프로젝트니 법석을 피우던 나는 그 해 여름, 훌쩍 인천의 집에 올라와 부모님께 유학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매일같이 지하철로 인천의 집과 서울의 영어학원을 오갔던 그 여름방학.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난 영어공부를 한다는 허울좋은 핑계를 대며 영화에 빠져들었고, 영어학원의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근처의 대형서점에 들러 서가를 누비며 마냥 설레어 했다. 마침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소녀 적부터 품어왔던 문학에 대한 동경이었다. 이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끓였던 라면이나 커피 뿐만이 아니라, 다섯 살에 쓴 내 생애 첫 일기나 여덟 살에 쓴 내 첫 소설에도 앙증맞은 추억담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책이든 뭐든 좋았다. 문학은 물론이고 미술이며 음악이며 영화까지, 인간의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라면 무엇이든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기가 다시 시작되어 학교로 돌아왔을 때,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은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전공 과목 수업들은 여전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지만 더이상 흥미 이상의 것, 가슴뛰는 설레임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여백이 많은 스케치북을 원했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온통 매료되어 버린 나는, 그 스케치북에 좀더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는, 내 손끝의 터치가 듬뿍 묻어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카이스트에서 학부를 마치고, 나는 결국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미디어컨텐츠에 대한 것을 공부하면서, 나는 점차 이것을 경영학에 접목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나는 미국의 유수 기업들에서 경험을 쌓으며 나만의 독창적인 ‘미디어경영프로세스’라는 개념을 실현해 냈다.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이제 아름다운 제품, 아름다운 기업이라는 꿈을 만들고싶다는 욕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택한 것이 바로 ‘컨셉디자이너’라는 이름이다! 사실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컨셉디자인의 개념이 좁아서 컴퓨터 게임 등에 들어가는 원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좀더 거시적인 것, 그러니까 제품의 개발이나 회사의 경영 컨셉을 잡는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제품은 그 제품 하나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어떤 부분에 자리잡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지 등등, 그 제품을 둘러싼 주변의 문맥까지가 모두 제품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간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진 제품은 그 자체가 이미 환상이며 꿈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닌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나는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잡는 것을 돕는다. 제품의 기능, 외관 디자인에서부터 광고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이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회사의 경우도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빼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한부의 고용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살고있는 현대에, 회사 전체가 한 마음이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가슴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컨셉디자이너는 먼저 그 회사의 사람들, 중역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를 두루 만나보며 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 등을 파악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병행하게 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표점, 그들 모두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이상이자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지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획자나 경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경영 컨설턴트, 통계학자, 종종은 심리학자들까지도 동원된다.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는 각본이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고, 한 줄의 카피가 되어 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고, 그림이 되어 건물 전체의 외벽에 도색되기도 한다. 좌우간 회사 전체의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전산학과 밀접해보이지는 않지만, 카이스트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것은 컨셉디자이너로서의 활동에 상당히 유익한 도움이 되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의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에서 나온 추진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공학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논리적인 사고력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차별화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각종 컴퓨터 도구를 다루는 능숙함은 기본이고, 수학과 논리의 기초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시스템을 분석하는 능력, 여러가지 형태의 미디어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다양한 표현 방식을 고려하는 능력 등은 모두 전산학과에서 배운 것들이다. 덧붙여, 살다보면 생기는 무식한 수작업을 요하는 일은 슥슥 만들어 낸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소한 편리함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런, 생각에 골몰하느라 식사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얼른 한 술을 가득 떠서 입에 넣던 차에 조용한 공기를 깨는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입 안에 잔뜩 든 것을 우물거리느라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은 체 한다. 아니, 식사중이라는 건 사실 핑계고 아까 그 남자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다행히도 이내 벨소리가 끊겼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급하면 다시 걸어보겠지, 생각하며 또 다시 한 숟갈을 뜬다. 아, 다시 전화가 울린다. 급한 일인가?
여보세요.
“저, 접니다.”
이름도 없이 다짜고짜 말하는 태세를 보아하니 정말로 아까의 그 남자인 것 같다. 아깐 내가 조금 심했을지도 모르지, 잘 기억이 안 나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건넨 다음 물어준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저 그러니까... 드림미디어의 김 부장...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에게 첫 눈에 반한 남자입니다!”
저 당당함에 오히려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서른 후반쯤 된 남자가 왜 저리 서투르고 무모한 것일까. 물론 마흔이 넘은 아가씨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그리 흔하진 않으니 아주 약간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만...
아니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웃고 있는거지? 깔깔대며 웃고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이미 외출복을 걸치고 핸드백을 집어들고 있다. 뭐 그래,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저 남자 말마따나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눠보자.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혹시나 어쩌면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르고. 사실 환하게 웃어보일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렐 뻔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에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쨌든 저 사람이 서투르고 어색해 보이는 건 내가 아직까지 철딱서니 소녀인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철딱서니 소녀는 철딱서니 소년을 만나는 게 이치일지도 모른다. 문을 나서며 어깨를 으쓱해본다. 그래, 오늘 하루의 자서전을 써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쩌면 역사적인 날이 될 지도 모르니까.
헛. 다 읽으셨어요? ^^;
그러니까 이 상황인즉슨... 이미 반쯤 넘어간겁니다. 벌써부터 역사적인 날이 될거라고 예감하는 걸 보면요. 그 남자 눈웃음이 꽤 괜찮았던 모양이예요. ^^;
뭐 만나고 오면 실망스런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정도 뱉어줘야겠지만요. 20년을 꿋꿋하게 솔로로 살아온 고집이 저렇게 쉽게 꺾여서야..!!
마흔 치고는 확실히 심하게 발랄하군요. 서른이라고 해도 못 믿겠다;;
<인간과 기계> 과목 숙제로 쓴 연애편지. 고백을 하든지 거절을 하든지 둘 중 하나로 잡고 쓰라는 조건이었어요. 음, 그래서 픽션입니다.
사실 지난번에 올린 recursion도 나름대로 소설인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 (너무 짧았나)
뭐, 그냥 즐겨주세요. ^^
Target 설정
(이 이런게 왜 있냐고 물으신다면;; 숙제였기 때문에-_-)
(그리고 이 설정에서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나오냐!라고 물으신다면; 이 설정을 쓰고 나서 편지 내용은 일주일 뒤에 썼기 때문이라고..;;)
1. Purpose
글 쓰는 목적: 나는 그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음을 report하고, 우리가 왜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없는지를 explain하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고 persuade한다.
thesis: 우리는 맺어질 수 없다. 부디 날 잊어달라.
2. 독자 분석
분포: 성별:남. 연령: 18. 직업: 고등학생
선호도: 연애 경험 없음
지식 수준: 일반적인 고등학생
읽는 목적: 고백에 대한 반응 확인
환경: 정상
XX에게
오늘은 창 밖의 나무들이 제법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어. 며칠 째 구질구질 내리던 비만큼이나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도 조금 풀리는 것 같고. 그래, 그래서 이제서야 컴퓨터 앞에 앉은 거야. 어떤 형태로든 네게 내 생각을 전달하기는 해야겠고, 그렇지만 전화로는 도무지 이 이야기를 모두 전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대답이 너무 늦어진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실 고민스럽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내 말을 납득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지?
그날도 난 예의 그 카페에 앉아 있었어. 그래, 너도 기억할테지. 사람들이 퍽이나 많이 지나다니는 좋은 목에 자리잡고서도 형편없는 커피맛 때문에 정작 손님은 별로 없던 그 카페. 나른한 봄이 시작되던 그 무렵에 내가 즐겼던 사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 카페로 달려가 가장 싼 커피를 시켜놓고 창가 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거였어. 그게 언제부터 붙은 취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 걸음걸이나, 몸짓, 표정 같은 걸 보면서 그 사람의 성격을 유추해 보는 게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렸거든. 사람들은 말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도 자신에 대해 굉장히 많은 것을 표현하곤 해. 가끔은, 걸음걸이와 손동작만으로 숨이 멎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 저 사람 어쩐지 나랑 잘 통할 것 같아, 말을 걸어본다면 우린 금세 가까워질텐데,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우린 틀림없이 서로가 너무나 잘 맞는다는 걸 깨닫게 될거야,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이에 그 사람은 항상,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곤 하지.
그래 지금까지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지. 굳이 누구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거야.
우린 닮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했던 말도 이거였는데. 우린 지독하게 닮았다구. 널 보고 있으면 꼭, 글쎄,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널 보고 있으면 꼭, 18살의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18살의 나는 그런 녀석이었어. 사람들 앞에선 비틀거리는 걸음을 감추려 애쓰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튼튼한 어깨를 빌려주길 간절히 기다리는 녀석, 그러면서도 제가 수긍할 만큼, 제가 압도당할 만큼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기대려 하지 않는, 쓸데없는 자존심만 꼬장꼬장한 녀석. 무너지는 자신을 마음껏 비웃고 상처내는 것으로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 녀석. 참 보고 있자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녀석 아니겠어? 미워하다니, 나는 그런 녀석들을 좋아한다니까.
도와주고 싶었어. 주제넘은 소리지. 저도 똑같은 녀석인 주제에, 3년이라는 시간은 어디로 먹었는지 여전히 나약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아직까지 18살에서 달라진 게 없다는 걸 몰랐어. 나는 조금 더 강인해졌으니까 너를 잡아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나는 정말 나의 18살을 다시 되돌리는 듯한 심정으로, 너를 붙잡으려 했던 거야.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다시 한 번 돌아간다면 그때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그 방법을 네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내가 했던 실수들을 너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해서. 나와 닮은 한 녀석이, 나만큼의 실망과 배신을 겪지 않고 21살이 될 수 있다면, 좀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만한 녀석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물론, 넌 많은 사람의 사랑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하겠지만, 그걸 이해 못하니까 네가 18살인거라고.
그렇지만 뒤늦게서야 깨달았지. 그런 건 시도하지 말았어야 했어. 너와의 대화는 자꾸만 나의 18살을 떠올리게 해. 잊은 척 덮어두었던 나약한 감정의 파편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서 나를 괴롭게 한다. 아직 아물지 않은 딱지를 떼어버린 셈이 되어버렸어. 너를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자꾸만 경솔했던 나를 후회하게 된다.
난 너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어. 아니, 우리는 가까이 있어선 안 돼. 우린 똑같은 것을 보면 똑같이 느끼는 사람들이지. 너의 괴로움은 그대로 내게 전이되고 만다. 너를 위로해 주기는 커녕 나까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말지. 그리고 또다시 나의 괴로움은 너에게 전이되고. 악순환. 너무 닮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재앙같은 존재일 뿐이야.
아 그래, 우리 둘 사이에 딱 한 가지 차이점은 있지. 나는 아무 것도 몰라서 실수를 하곤 했지만, 너는 잘 알면서도 무모한 고집을 피우곤 한다는 거? 불행해질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이름 따위로 이 관계를 묶어두려는 기묘한 네 고집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 애초부터 우리는 이성으로서 끌렸던 게 아니라는 걸 애써 부인하지 말아줬으면 해. 우린 서로에게 멋진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고, 이렇게까지 닮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졌겠지.
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 네 감정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을거야. 그렇지만 딱 3년이 지나면, 너도 지금의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믿어. 나 역시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면, 그래서 18살의 나를 아프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너를 기쁘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처음에 꿈꾸던 것 같은 멋진 친구로서 말이야.
굉장히 괜찮았다. 맘에 들었다.
이걸 쓰레기라고 폄하한 사람들이 뭘 보고 그렇게 말한 건지도 알 것 같지만, 그건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미묘한 심리 묘사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거라고 감히 말해본다. 아 물론, 읽어냈는데 그게 체질에 안 맞았을 수는 있겠지. 어쨌든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심리를 읽어내는 재미가 눈물날 정도였다.
(*) 인물 이름이 헷갈릴 수 있으니 정리부터 하고 들어갑시다. 그냥 간단히.. 좀 덜 중요한 사람 쪽에 프라임(') 붙인거라고 보면 됩니다.
인영 : 서른 살 인영
인영' : 고등학생 인영
석 : 고등학생 석
석' : 서른 살 석
수 : 얘는 한명이군. 고등학생 수. 즉 석의 쌍둥이 형.
정우 : 인영의 동거남
정우' : 고등학생 정우
먼저 인영과 인영'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처음에 인영'의 이야기가 인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일거라 짐작하면서 봤기 때문에, 수의 방에서 석과 키스하는 인영'을 보면서 '저 여잔 어릴 때부터 나쁜 년이었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_-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의 상을, 그를 닮은 다른 남자에게 투영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인영과 인영'은 닮은 꼴이다. 수를 석에 투영하는 인영', 석'을 석에 투영하는 인영. 수에게 빌려준 교과서를 발견하는 인영', 석'에게 빌려준 교과서를 돌려받는 인영. 즉 인영의 닮은 꼴, 인영'을 서술함으로써 인영에 대한 서술 또한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벚꽂 아래 함께 있는 정우'와 인영'을 보면서 우리는 인영이 결국 정우를 택할 것임을, 그러나 석 또는 석'을 잊지는 못할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어쨌든 둘 다 기본적으로 나쁜 년(..)인 건 맞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거, 죄는 아니지만 결국은 그 상대를 농락하는 일이 아닌가.
괜찮았던 부분:
*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앞서가는 인영.. 뒤로 숨이 턱에 차서 쫓아가다 결국 난간(?)에 매달려 숨을 몰아쉬고 있던 석. 뭐랄까 '바로 이게 고등학생의 매력이지!!!'라는 느낌이 팍 꽂혔달까. Good~!
* 크랙션을 빵빵 울려대다 어쩔 줄 몰라하는 석이 다가오자,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도 어쩐지 웃는 듯 했던 인영의 표정. 마침내 석을 껴안는(이라고 쓰고 '쟁취하는'이라고 읽는다) 인영을 보면서, '서른 살이 고등학생을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으하하 그래 난 이런 걸 보고 싶었..!!
* 모텔 입구에서 계산을 하고 난 인영이 석을 바라보던 안심시키려는 듯한 눈빛과 어색하게 흐르던 긴장. 영화가 그냥 말그대로 '영화'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었겠다. 차라리 쿨하게 들어가는 두 사람을 봤다면 '영화니까..'하고 납득했을거란 얘기. 아니지, 아예 로비에서의 계산 따위는 보고싶어 하지도 않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판타지 속의 인물들이 아니라, 현실 속의 인물들이다. '뭐 별거라고.'라고 뇌까리고 쿨하게 모텔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묘한 긴장과 어색함이 이들에게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 따뜻하게 돌봐주는 동거남. 2년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팔팔한 고등학생. 13년만에 나타나서는 돌연히 반해버린 첫사랑. 자신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느끼며 사랑니의 통증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한 여자. 으하- 이거 완전히 파라다이스 아닌가. 생각할 수록 재밌는 상황이다;
맘에 안 들었지만 납득하려 노력한 부분:
* 패스트푸드점에서 인영과 석과 정우의 삼자 대면. 불쑥 나타나 석의 음료수를 낚아채며 인영의 옆자리에 앉는 정우를 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정우는 석을 보고, 그가 바로 인영이 며칠 전에 말한 석'과 닮았다는 그 남학생임을 알아차린다. 견제모드 발동. 그는 나이가 더 많은 남자의 노련함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어떻게? 석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다. 석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 자리에 사람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해서 석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의 음료수를 빼앗은 것은 그런 행동의 일부이고, 이제 그는 인영과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_- 무시해버리는 쪽이 원숭이 보듯 바라보는 쪽보다 더 고단수가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에 좀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정우는 석이 석'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안심해버린 것 같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군.
* 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인영의 독백. 거기서 꼭 '조인영 미쳤어... 17살을 데리고 뭘 한 거니.'라고 말을 해 줘야 되나 싶긴 한데,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첫사랑의 환상이 깨져서 슬퍼하는 걸로만 보였을 수도 있겠다.
* 아무리 그래도 첫사랑과 닮았다는 건 이유로서 좀 시시하지 않나? 한국에서 서른 살 학원 선생이 열 일곱 살 고등학생에게 빠져드는 사태를 욕 덜 먹고 설명하려면 그 이유밖에 없는걸까? 서른 살이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열 일곱 살... 그릴 수 있을 법도 한데.
맘에 안 들었던 부분:
* 차에 치여 죽는 수. 너무 식상하다. 주원오빠는 '그래도 단순하게 차에 치인 건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너무 게으른 설명인 건 사실.
* 아무리 고등학생이라도 영안실이 뭔지도 모를 것 같진 않은데...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석에게 덤벼들던 인영'은 심하게 억지스러웠다. 화면까지 잔뜩 흔들어줘서 짜증 배가.
* 잘 자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석이 하는대사.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일어나면 키스해주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좀!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냐! 그냥 말없이 씩 웃어보인다음 키스하고 상큼하게 돌아서주면 좋잖아. 네가 레트 버틀러만큼 느끼한게 잘 어울리는 남자면 또 몰라. 말 나온김에 생각해보면 레트는 "Kiss me" 한 마디 하려고 엄청나게 많은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어도 멋있기만 했지...흐흐.
* 일식집 앞마당에서 석과 인영'의 티격태격. "넌 날 사랑하는게 아냐! 넌 형을 사랑하잖아!" "아니야 난 널 사랑하는 거야!" 으... 이것도 너무 말이 길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말 남발하니까 몸이 뒤틀린다구... 그냥 좀 고등학생이 할 법한 말투로 "넌 지금 착각하는거야!" "아니야! 왜 몰라주는거야?" 정도면 좋지 않았을까.
이해 안 되었던 부분:
* 인영이 토요일에 석을 초대하겠다는 얘기를 승낙해놓고도 그날 석'을 데리고 나타난 정우의 행동. 초대를 승낙했다는 것은 인영을 믿는다는 의미 또는 인영의 외도(?)를 알면서도 방관하겠다는 의미. 그런데 석'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는 건 방해의 의미 아닌가. 모순되는 행동이다. 질투였을까? 그렇지만 시종일관 보이는 그의 소탈한 웃음에서 질투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고로 기각. 원래 쿨한 사람이라서? 아니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하든 냅두지 들어오긴 왜 들어오남. 이것도 기각. 그렇다면 그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질투를 가지고 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인영의 흔들리는 마음들을 알지만 결국 포용해주는. 정말 그럴까?
* 인영'의 "나, 다시 태어나면.. 이석으로 태어나고 싶어." 이해 안 가는 말은 아니지만 너무 뜬금없이 나와버렸다. 고등학생이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야 하나?
* 그 수술 자국은 왜들 그리 열심히 보는 걸까? -_-
아쉬운 점:
* 좀더 강인한 인영이었다면. 좀더 덜 어설픈 석이었다면. 초장부터 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원래 강인한 캐릭터들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나라면 좀더 강인한 서른 살을 그렸을거다. 내가 서른에 대해 품는 환상은, 아직 서른을 못 겪어봐서일까.
아... 전체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말했듯이 심리 묘사가 굉장히 치밀하다는 느낌이다. 걱정했던 김정은의 연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게다가 너무 예뻤고.) 정지우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볼 생각인데, 기대가 크다. ^^
..... 그렇지만 이러한 어이없는 쇼크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다. 즉 열일곱 살의 나이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공상을 했으며, 의형제와 같은 우애를 지니려 했고, 얼마나 자주 산 위의 공기를 마시려 했는지, 또한 지금의 젊은이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궁금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산 위의 공기는 돌풍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위의 공기를 마시는 젊은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불명확한 시기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데 따라 이리저리 이끌린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기껏해야 몇 명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천부적 재능에 대하여 기뻐하고,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직업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뿐이다. 많은 젊은 처녀들이 영화배우를 꿈꾸며, 많은 청년들이 지금까지 장터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기발한 직업을 뇌리에 떠올리지 않는가? 이는 거의 일반적인 갈망 내지는 (그 방향에서) 허황한 꿈일 뿐이다.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갈망은 다행히 오랫동안 보존되지는 않는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충동은 특히 사춘기의 시기에 무언가를 창조하게 한다. 즉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을 쓰고, 음악에 심취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즉 젊은이들이 갈구하는 모든 일들은 현실화되고 이행될 때 거의 수축된다.
청춘기의 이러한 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대로 반증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불길이 타오르고 있듯이, 그들은 예술에 대하여 커다란 열정을 지닌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약 예술의 본질을 파악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미건조하게 변할 뿐 아니라, 한 가지 측면마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오그라들게 된다. 이 시기에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쉬우며 잘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쓰는 것은 무척 어렵다. 말하자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지닌 젊은이가 창출해 내는 것은 <마치 오그라들다가 타버린 듯이 말라비틀어진 자두와 같은> 열매로 출현할 뿐이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평생 동안 이러한 청춘의 특성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언제나 바로 그 점을 드러내려 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내용을 거의 편지 형식을 통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청년기 문학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일기 형식이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로 어떤 감춰진 형태로 평가되지만, 때로는 감춰진 무엇을 전달하는 데에 무척 적당한 장르이다. 어른들 가운데 더러는 젊은 시기에 일기를 쓰고, 이를 소중하게 보관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기장에서 자신의 깊은 감정의 수위를 측량하기 위하여 어떤 척도를 세우려 했다고 할까. 사랑, 우울, 어떤 싹트는 상 그리고 애벌레와 같은 사상 등 모든 것이 거기서 채취되고, 출발로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청년기의 꿈은 결코 김빠진 것은 아니지만, 번거로울 정도로 고혹적으로 빛날 뿐이다. 이 시기는 불행하고도 성스럽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용맹하고 오색영롱한 삶, 고매하고 폭넓은 삶을 갈구하는 젊은이의 태도는 거의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청년은 언제나 기사와 같은 젊은 의지를 지닌다. 그렇기에 청년은 극복해야 할 모험들, 발견해야 할 아름다움 그리고 쟁취해야 할 위대함을 열망하곤 한다.
젊은이가 처한 삶은 이와는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으므로, 멀리 위치한 꿈들은 아름답게 장식되는 법이다. 젊은이들은 멀리에 위치한, 그러한 꿈에 매혹될 뿐 아니라, 자신을 더 이상 은폐시키지 않은 채 그 꿈을 박차고 나온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더욱 가까이 다가올수록, 젊은이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행동한다. 멀리 위치한 꿈은 이제는 마치 저녁에 자그마한 소도시로 데려다 주는 기차와 같은 부호로서 족할 뿐이다. 이를테면 시골에서 상상하는 대도시의 머나먼 공간이다. .....
딱딱한 껍질에 싸인 두꺼운 놈으로 무려 5권이나 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블로흐가 누구냐면, 당연히 나도 잘 모르지만-_- 마르크스주의랑 유토피아랑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다. 또 한가롭게 서가를 누비다가 빤딱빤딱한 하얀 표지가 그럴 듯 해서 업어왔다.
내용도 어렵고 문체도 불친절해서(아니 이렇게 심각하게 추상화시킨 문장들만 적어놓으면, 읽는 사람은 이걸 끊임없이 현실의 무엇에 대입시켜야 할 지를 고민하며 읽어야 한단 말이다! 내가 그런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나마 저 부분은 상당히 친절한 축이다.) 1권만이라도 다 읽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책이지만 이 부분은 꼭 갈무리해두고 싶었다.
사실 저걸 읽고 쓴웃음을 짓는 동시에 심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내가 하고 있는 짓들이 젊은 날의 치기라 이거지...-_-^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저자의 시니컬한 시각이 어줍잖은 딜레탕트들을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이 갈망(?)이(세상에 목마르다고 표현하는 것까지 이제 찔리게 생겼어-_-) 오래가지 않을거라는 그의 예언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아니면 젊을 때는 으레 그런 것이지-라고 변명하는 데에 써먹어야 하나. -_-
아침에 이 노래를 무심코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그냥 편하게 잘 불러지는 멜로디에 속을 뻔 했지만, 이거 절대 단순한 상황이 아니다!!
일단 가사를 보시라. 아시는 분들은 좀 흥얼거려 보기도 하시고.
반복된 하루 사는 일에 지칠때면 내게 말해요
항상 그대의 지쳐있는 마음에 조그만 위로 되줄께요
요즘 유행하는 영화 보고플땐 내게 말해요
내겐 그대의 작은 부탁 조차도 조그만 행복이죠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일요일 오후
늦게 잠에서 깨 이유없이 괜히 서글퍼 질 땐
그대 곁엔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하는
내 자신보다 그댈 먼저 생각하는 남자가 있죠
오랫동안 항상 지켜왔죠 그대 빈자리
이젠 들어와 편히 쉬어요
혼자 밥먹기 싫을땐 다른 사람 찾지 말아요
내겐 그대의 짜증섞인 투정도 조그만 기쁨이죠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일요일 오후
누군가 만나서 하루종일 걷고 싶을땐
그대 곁엔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하는
내 자신보다 그댈 먼저 생각하는 남자가 있죠
오랫동안 항상 지켜왔죠 그대 빈자리
이젠 들어와 편히 쉬어요
정말 구김살없고 따뜻한 노래인데... 어쩐지 이상하다.
짝사랑이라는 것.. 짧은 기간에는 사람을 들뜨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어지면 사람을 반쯤 말려죽이는 몹쓸 병이 아니던가?
이 남자는 오랫동안 그대의 빈자리를 지켜왔댄다. 헌데!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 온 사람이 어찌 이리 구김없이 주저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냔 말이다..
게다가 저렇게 '딱 남자친구가 생각날 만한' 상황에서 자기를 떠올려 줄 것을 확신하는 걸 보면,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걸 보면 꽤나 가까운 사이같은데..?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 1. 사실은 그렇게 상사병으로 바작바작 마를 정도로 오래 기다린 것이 아니다
-> 그렇지만 이렇게 소심 내지는 섬세한(?) 남자가 몇 주 좋아한 거 가지고 '오랫동안'이라면서 법석을 떨 것 같지는 않다. 2. 한때 바작바작 말라버렸으나 최근에 소생했다(?)
아무래도 두 번째 시나리오가 유력한 것 같다.
일단 그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다.
오랫동안 그녀 주변을 맴돌아온 순애보 중 순애보. 사실 그녀에게 직접적인 프로포즈를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속만 타들어가던 찰나, 그녀가 그를 새롭게 보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유는 모른다.
좋아하던 남자에게 차였을 지도 모르고,
사귀던 남자랑 헤어졌을 지도 모르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점점 그의 지극정성에 탄복하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서야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단지, 자신을 변함없이 아껴주는 좋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달리 좀 더 다정해졌음을 눈치채게 된다.
놀란다. 왜 갑자기 달라졌는지야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뻐한다.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그는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을 다시 품게 된다. 혼자서 쌓아왔던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한다. 자기를 저버린 것 같았던 세상이 이제 그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다.
자, 좀더 시간이 지난다.
자기 전에 그녀와 통화하는 것이 점점 그의 일상이 되어간다. (사실 이쯤 되면 충분히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
가끔씩은 전화 끝에 용기를 내어 '좋아해' '사랑해' 등의 간지러운 말도 슬쩍슬쩍 끼워넣어 본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녀는 적어도 전화를 확 끊어버리거나 싸늘한 말로 분위기를 깨버리거나 하진 않는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가 머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든든한 존재인지를 역설하고,
그러니까 이제 내게 와라...라고 강력하게 어필해야 할 시점!!
...이 노래의 남자는 바로 지금 이런 상태인 것이다!!!!
아아, 정말로 복잡한 시츄에이션 아닌가? -_-
강력한 프로포즈가 되어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저렇게 젠틀한 것은 저 남자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니 뭐라 토 달지 말지어다...;;;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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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30분밖에 안 지났을텐데도 벌써 몇 갠가의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복잡한 이야기가 남겨놓은 잔상이 거미줄처럼 남아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한다. 이불을 걷어내려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어둑어둑한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해서 텅 빈 것 같고 사물들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낸다. 더듬거리며 전화기를 찾아 손에 쥔다. 익숙한 이름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다 말고 쓴웃음을 짓는다. 어린애같잖아? 비웃자, 이럴 때는 스스로를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 조롱을 퍼부어도 좋다. 정말 한심해서 봐주기 힘들구나. 창피함에 몸이 비틀릴 지경이다. 실소를 접고 몸을 일으켜 형광등을 켠다.
대단치는 않지만 약간의 시장기도 있고, 늦어지기 전에 슬슬 나가봐야겠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남방을 고른다. 양 쪽 소매에 팔을 끼우고, 뒤집어진 깃을 반듯이 한 다음, 맨 윗 쪽 단추부터 채운다. 그런데 내가 왜 서두르고 있지? 손을 멈춘다. 천천히, 느릿하게 단추를 채운다. 다시 속도를 빨리해 본다. 다시 느리게. 그리고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어 본다. 나는 눈썹하나 까딱않고 늑장을 부리면서, 녀석에게 거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시간이라는 녀석은 조금은 툴툴거리겠지만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을 것이다. 제가 별 수 있겠나. 조금 전의 조소는 잊은 채로, 오늘 저녁의 주도권은 내가 잡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뿌듯하다.
톤을 적당히 죽인 엷은 분홍색의 트렌치코트를 걸친다. 계절의 변화를 은근하게 즐기며 드는 나만의 축배다. 무슨 말이냐면, 가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트렌치코트를 걸친다는 것도, 해가 짧아지면 세로토닌의 분비가 감소해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기 쉽다는 식의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일 수 있는 나의 이상한 ‘환절기 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문을 나서며 습관처럼 불을 끄려던 손을 멈칫한다. 그대로 두고 가는 게 좋겠다. 돌아와서 문을 밀치자마자 밝은 불빛이 쏟아지면 그것도 나름대로 반가울 것 같다. 문을 나서고, 길을 걸어 식당에 도착한다.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다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어색해하는 건 그런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쪽이다.
수저를 놀리면서, 단어와 단어를 모으고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본다. 어릴 때부터 즐겨온 놀이 비슷한 것이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낼 때는 잊어버리곤 하는데, 많은 말을 입 밖에 내고 나면 지쳐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고독을 즐기는 사람 같지만 사실 난 그 반대였다. 두려웠다. 세상과의 관계를 빼 버리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을거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웃음이 많은지 적은지, 낯을 가리는지 안 가리는지, 나약한지 강인한지, 혼자일 때는 나의 이 모든 특성들이 조금씩 엷어지며 사라져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보다시피 혼자를 자초하고 있다. 혼자이건 그 어떤 사람과 함께 있건 변하지 않는 자신의 특성을 발견하기엔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원을 그리는 길을 돌아온다. 바라보는 눈은 없지만 조금 더 꼿꼿하게 걸으려 노력한다. 아니 사실 바라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먼 발치 따라오는 뒤에서, 양 옆에서, 또 저 멀리 있는 건물의 창가에서, 나의 걸음걸이와, 가볍게 핸드백을 쥔 손, 발을 디딜 때마다 약간씩 흩날리는 머리카락, 깜박이는 눈을 훔쳐보고 또 훔쳐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시선이 내게 묻는다. 흔들리니? 아니. 외롭니? 전혀.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맘에 드는 걸. 너무 자신에게 빠지는 건 경계해야 할 걸? 허, 그 정도로 심각하게 빠지기엔 내 눈이 좀 높아서 말야.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
스타워즈 열풍이 지나간 지도 제법 되었고, 싹 다운받아놓고 광분하며 n번씩 돌려보던 것도 벌써 두 달은 족히 된 일이건만.
생뚱맞게 이런 주제로 기다란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은 어제 신나게 마셔댄 알코올 탓이리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캐릭터의 변천사>
프리퀄과 클래식. 영화 내의 줄거리에 따르면 프리퀄-클래식이지만 현실에서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하면 클래식-프리퀄이다. 숙취로 멍해진 머리로 침대에서 몇 시간째 뒹굴, 뒹굴 하면서 클래식의 주요 캐릭터들과 프리퀄의 주요 캐릭터들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20년 세월의 간극을 느꼈다...
레아 vs 파드메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강인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 표현에 있어서는 20년 세월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다.
웬만한 남자들이라면 말도 못 붙여볼만큼 당당한 여장부 레아. 헤어스타일이 촌스러운 것은 시대의 영향이니 어쩔 수 없다 치지만 한 솔로의 이죽거림에 대꾸하는 저 팍팍한 선머슴같은 태도란! 그 당시의 페미니즘을 선도하는 여성상이란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강인하고, 때로는 저돌적이며, 남자를 경계하고 전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 (아 물론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말했지만 레아는 그래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럼 이제 파드메를 볼까. 시종 두세 명쯤 붙이고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을 듯한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화장, 화려한 의상까지. 그녀는 자신의 미를 가꾸는 데에 열성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집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수완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강인하지만, 저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중하게 계산된 전략을 발휘한다. 남자는 경계의 대상도 전투의 대상도 아니며, 공존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그녀는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를 가꾸고, 가정을 원하며, 눈물을 보일 줄도 안다.
'강인한 여성상'이란 것은 확실히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는 모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 역시, 파드메와 같은 여성상 쪽이 좀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vs 아나킨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까 말한 '강인한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남자라는 것. 그러나 이들도 역시 많이 다르다. 히로인과 사랑에 빠지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려면 그 시대가 용서할 수 있을만큼 괜찮은 남자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괜찮은 남자의 요건 또한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은 어떤 상황에서건 당당하고 호쾌하다. 표현에 있어서도 몹시 거칠고 직선적이며, 사고 또한 단순한 편이다. 그의 머릿 속은 의리와 명분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나킨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남성상을 보여준다. 아나킨에게는 두려움이 있으며,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화면에서 몇 번이고 눈물을 보인 그가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연인과 대화하는 방식은 지극히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의리도 명분도 아닌,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메트로섹슈얼이라든지, 꽃미남 선호 풍조;라든지 하는 것들로 이미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시대는 남성적인 남성보다는 양성성을 지닌 남성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방식
레아와 한의 맺어짐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안 맞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아귀가 맞는 둘의 성격 때문. 처음 레아를 본 한은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야!'라며 감탄한다. 레아는 한의 거침없는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이제껏 자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 끌리게 된다.
반면, 아나킨과 파드메는 어떤가? 그들의 성격이 찰떡궁합이라는 실마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아나킨은 잘생겼고 파드메는 예뻐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_- 어린 아나킨은 파드메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건 뭐 그냥 무조건 외모만으로 승부나는 게임이다. 한편 파드메는 젊은 아나킨의 강렬한 눈빛공세에; 홀딱 넘어가버리게 된다. 필연성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쯧쯔..
<클래식과 프리퀄에서의 대립 양상에 대해>
양성성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클래식의 정확한 선 긋기 식 이분법과 프리퀄의 다소 모호한 대립 구도도 비교할 만하다.
선과 악
클래식에서, 다스베이더는 절대적 악인이다. (마지막에 돌아선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돌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즉, 중간과정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루크와 벤은 악에 대립하는 선의 수호자이다.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프리퀄에서는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린다. 다스베이더는 다름아닌 선의 수호자 제다이의 그림자였으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아나킨이 그렇게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과정이 결코 불연속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며, 이는 클래식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강인함과 나약함, 남성성과 여성성
클래식에서 한과 레아는 시종일관 씩씩하고 당찬 모습만을 보여준다. 반면에 파드메와 아나킨은 유능하고 강인한 직업인(-_-)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한 면모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또한 한과 레아는 남성성과 여성성 중 한 가지만을 표현하는 캐릭터이다. 한은 전형적인 남성적 캐릭터이고, 레아 역시 캐릭터로 치면 선머슴에 가깝다. 그러나 파드메와 아나킨에게는 두 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여성성도 존재하고, 남성성도 존재하는, 양성성의 모습을 더 쉽게 찾아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상반되는 듯한 개념이 섞인 채로 인물에 투영된다는 것 또한 클래식과 굉장히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오비완과 젊은 오비완에 대해>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늙은 오비완은 전형적인 '현인'의 모습이다. 루카스가 그에게 간달프 같은 이미지를 주문했다고 하니 빼도박도 못할 이야기. 그는 현명하고, 세상의 지혜와 경험은 다 가지고 있으며, 능글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안 맥그리거가 연기한 젊은 오비완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상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젊기 때문에, 그는 아직 원칙을 신봉하며 예외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젊기 때문에, 그는 노인네의 능글맞은 유연한 대처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고집불통과 완고함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이건 반대잖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젊은이들은 현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원칙주의자에 고집불통이어야 한다.라는 개인적인 견해는 차치하고라도, 이야기에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오비완은 지나치게 능글맞으며 유연하다. 시도때도 없이 눈웃음을 흘리고 다니는가 하면(점잖아야 할, 그래서 허튼 웃음도 자제해야 할 것만 같은 제다이가!) 웬걸, '협상가'로 우주에 이름을 날리고 있기도 하다...
아나킨이 다크사이드로 가는 과정에 좀더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아나킨의 마스터로서 오비완이 실격이었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오비완에게는 아나킨의 섬세함을 달래줄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 설명에 실패하고 되려 능글능글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오비완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아나킨은 '잘 보듬어주고 잘 가르쳐놨는데 저 혼자 폭주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 우주에서 제일 질나쁜 비행청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의 글을 읽게 되고,
그 느낌에 홀려 그 사람의 다른 글들을 찾아 읽게 되고,
결국 그 사람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며 끝내 동경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으신지? 프로작가도 아닌 보통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난 PC통신 시절부터 그런 일에 맛을 들였고,
지금은 이글루스와 네이버와 태터툴즈에 힘입어 온 나라에 퍼진 블로그 덕택에
전보다 더 풍족해진 환경 속에서 이 무익한 취미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뚜렷한 자의식, 독특한 감수성, 견고한 신념.
신념이라고 하면 대단히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의미로 쓴 건 아니고,
애써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절대 부정하지 못하는 명제 같은 걸 말하고 싶은거다.
이를테면 '나는 영원히 아웃사이더일 수 밖에 없다'고 믿는 것도 일종의 신념이고.
아마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는 신념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잠깐 딴소리인데.. 가끔 우습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모순이 있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만의 특이한 면모'라는 식으로 말하면 "아니야, 누구에게나 그런 건 있어"
'이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야, 너만 그래"라고 말한다!
실컷 설명해놓고도 흡족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이 오묘한 것을 더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구에게나 있는 것' 따위로 치부해버리면.
짜증이 확 솟는다. 그런게 아니니까 설명하려고 한거잖아.
그나마 후자 쪽 반응이 더 견딜만하니 요즘은 아예 그렇게 얘기하게 된다.
세상엔 글로 벌어먹고 살지 않으면서도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독서량을 짐작케하는 유려한 표현들보다, 좀더 투박하더라도 현실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글에 난 더 끌린다.
글쎄, 화려한 글을 만나면 일단 주눅부터 든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 변명하지 말자. 이건 질투다. 나도 그렇게 사치 좀 부려보고 싶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시샘을 제껴두더라도 투박한 쪽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다.
때로는 아집, 때로는 비틀린 맹신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건 그 사람 특유의 촉수 때문. 독특한 감수성이라는 건,
본인에겐 재앙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에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가만.. 방향을 잃었다. 아까 난 도대체 무슨 말을 쓰고 싶었던걸까.
거의 울고싶은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중간에 단어 고르다 지쳐버렸다. 뭐였지..
그러니까 아집도 집착도 나쁜게 아니다? 아닌데..
그럼 부러워 죽겠다? 이것도 아니고. 이놈의 기억력은 한 번 더 저주해줘야겠다.
역시나 아닌 것 같지만 머리 속에 남아있는 잔상만이라도 적어보자.
- 갈증이란 느낌조차 잊고 살았더니 물 한 모금은 감질나기만 하다.
- 역시 밤은 위대하다. 또 이런 글 나부랭이를 남길 용기가 생겼다.
*
실컷 다운받아서 다 보고 나니 DVD가 도착했다. OTL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족이었다. special features가 끝내줬거든!
*
고등학교때부터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인 환경에서 살아와서 가끔은 '여자친구들과 대화하는 프로토콜'을 까먹었다고 느낄 때도 있다. 푸하,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남자가 대화하는 방식과 여자가 대화하는 방식은 분명히 미묘하게 다르고, 그리고 분명히 나 또한! 그랬었다. 우연히 중학교 때의 메신저 대화록 같은 걸 볼 때마다 그걸 확실히 느낀다...; 어딘가 날카롭다. 어딘가 변덕스럽다.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무언가'를 강력히 믿는다.
"그게.. 잘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런 느낌. 뭔지 알 것 같지 않아?"
"응 알 거 같아!!" 그녀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
근래엔 여자친구들을 주로 만났는데.. 세상에, 아무리 연이어 만났다고는 하지만 목이 쉬고 머리가 지끈지끈;; 말했지만 음성언어란 보통 비싼 녀석이 아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수다쟁이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외로웠었다. 더이상 소녀의 것이 아닌 고민과 갈등들로 괴로웠었다.
그런데 나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하며 지내온 친구가 똑같은 고민으로 열변을 토하면!
갑자기 보편적 무의식이니 원형이니 하는 말이 생각나면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다..
아, 안타까운건 context도 다르고 solution도 다르고 단지 problem만 같다는 것이다.;;
*
Down with love.
그저 유쾌하게 웃어달라는 저 발랄한 엔드 크레딧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넌 애인이 좋아, 초콜릿이 좋아?"
(아..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물음이 되어버려서 계속 마지막 문장을 고치고 있다;;)
예전에 인터넷을 이끌어 가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지만, 지금은 업계이다. 그렇지만 업계가 할 수 없는 것들 - 당장 돈이 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것, 신선한 것, 이런 것들을 대학생들이 개척해 나가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난 여름 ESCamp에서 넥슨의 대표이사[였나?;] 분의 강연에서도 그런 말이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IT업계를 쥐고 있는 실세는 95학번 전후대라고 한다. 적당히 가감하면 우리 나이 정도에 그분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창업을 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너무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학과공부와 학점, 동아리 활동에 매여 몸은 바쁘게 생활하지만 정작 정신은 나태한 것은 아닐지? 해야할 일들만 걱정하느라,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보는 경험은 어느새 뒷전이 되어버린 건 아닐지?
그렇지만 이런 의문들... 어쩌면 부질없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때까지 꿈꾸던 대학 생활의 모습은, 해야할 공부보다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고, 사고도 쳐 보는 것이었는데. 정작 대학에 와 보니 대학 역시 '하고싶은 공부'보다 '해야할 공부'를 하는 곳이더란 말이지!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는 어디서 하는거지? 대학원에서 하는건가?
송준화 교수님의 '유비쿼터스 서비스를 위한 차세대 인터넷 서비스 아키텍춰' 강연을 듣고 왔다.
전산과 비전공인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라서, 그다지 기술적인 내용은 없었다. 인터넷을 1세대와 2세대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 조금 독특했는데, 그리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지난 겨울방학때 서점에서 선 채로 읽었던 유비쿼터스 관련 서적들이나, 스팍스에서 들었던 세미나(Blog와 RSS) 등을 통해, '이제는 사용자가 정보를 요청하는 형태가 아니라, 컴퓨터가 알아서 사용자의 기호와 관심을 분석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가 보편화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접해왔으니.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오늘의 새로운 것이 내일이면 상식이 되고, 내일모레에는 그 분야가 망하게 된다고... -_-; 그러니까 언제 사장되어버릴지 모르는 기술들에 집착하고 있지 말고 혜안을 기르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넷 시대의 학습과 공부법'. 마음에 와닿았던 페이지 몇 개를 후다닥 적어왔다.
학생들이 걱정하는 것들
1. 공부할게 너무 많아!
2. 남들이 너무 잘해!
3.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 (난 내일이면 망할지도 몰라!)
이 부분에서 많은 학생들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까. 그럼 문제제기만 할게 아니라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전문지식? 혹은 상식?
technique? or concept?
습득? 혹은 표현?
reading? or writing?
집중? 혹은 경험?
분석? 혹은 종합?
이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자면 이렇다.
현재의 우리들이 얽매여있는, 성적에 관련되는 것들 - 지식, 기술, 이것들을 습득하고, 시험을 위해 집중해서 외우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 보다도,
내 옆의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나?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나? 내 여자친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아할까? 이런 것들을 잘 파악하는 능력 -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유리하다.
집중해서 하는 공부는 시험때나 하지 않느냐,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면 그런 지식은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금 달라서, 생활속에서 슬렁슬렁 얻어지는 것이면서도 단기간에 집중해서 하는 공부보다도 더 많은 도움이 되고 또 더 오래도록 기억된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그것 때문에 역시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이것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타면 어지럽고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긴 하지만, 안 탈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느냐. 이왕 탈거면 좀더 빨리 타서 적응해야 되지 않겠느냐.
앞으로 인터넷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 다 나온 다음에 시작하면 늦은 것이고, 어떻게 될지 시나리오를 미리 다 짜둬야 한다. 여러분이 할 몫은 열심히 상상하는 일이다. 그냥 상상한 걸 쓰기만 하면 논문이 되고 여러분은 졸업을 할 수 있다. (^^;;;;;)
으흠. 교수님은 그냥 다짜고짜 롤러코스터를 타라고 하신다.
일찍 타서 빨리 적응하면 더 좋은거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장비는 갖추고 타야하지 않을까?
아니, 너무 머뭇거리다가 늦게 타면 그만큼 더 늦어지는 건가?
이 문제는 결국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기본기를 다지는 것인가, 혹은 사고를 정형화된 틀에 맞추는 것인가'라는 물음과 닮은꼴인것 같다.
전자가 맞다면 역시, 이런 생각할 시간에 빨리 책 펴고 줄 긋고 있어야 할테고. ㅎㅎ
후자가 맞다면, 공부보다는 한눈을 파는데 더 열심이어야겠지. 아님 빌게이츠처럼 학교 때려치든가. ^^;;
송준화 교수님 뿐만이 아니고 김진수 교수님도 은근히 후자를 강조하시는데 -_-; 지난 봄 한 학기동안 고민해보고 내린 나의 결론은 전자 에 가깝다.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자 할 때 필요한 기본기라는게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나는 그 기본기를 다 갖추지 못한 것 같다.
강연을 듣고 나오면서 탁은오빠가 그랬다. "뭘 알아야 상상도 하지!" ^^;
얼마 전 순호 생일파티에 갔다가... 유홍이가 뜬금없이 "페미니즘에 관심있니?"라고 묻길래 "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말하고 나서 바로 다음 순간에 아차 이건 아닌데, 참 비겁한 대답을 했군. 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남성을 이기고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이건 여성 뿐만이 아니라 남성으로서도, 아니 어느 성이라 칭할 수 없는 제 3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그때 나의 심리는, 유홍이는 꽤 취해 있었으니 귀찮은 언쟁을 벌이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혹은 '그럼 그렇지, 말 많은 여자애들은 다 저런다니까'라고 생각할 남자 친구들의 시선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비겁한 대답을 듣고 안심한 유홍이가 말했다. "사실은 난 남성 우월주의자거든? 근데 현정사 발표를 해야되는데 주제가 페미니즘이야.. 정말 하기 싫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듣고 충격받았다. 실망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늘상 '착하게 살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를 표방하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사람을 사랑하겠다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니?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내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서 "여성이라면, 아니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거 아냐? 너도 그렇지?"라는 식으로 말을 했으면 그는 적어도 자신이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극단적인 발언은 하지 못했을테니까. 어쨌든 그때의 내 대답이 종종 생각날 때면 나에게 화가 나지만,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곤 한다. 인종차별주의처럼,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편견들은, 말로써 설득시키려 한다고 쉽사리 바뀌는게 아니라고.
음 그래, 이런 말 조차도 여전히 비겁하다. -_-;
오늘 읽은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책인데 특별히 여자들에게는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책, 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듯 하다. 제목만 보고도 벌써부터 경기를 일으킬 남자분들이 눈에 보인다. ㅎㅎ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공존할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여튼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했다. 저자는 CNN의 선임 부사장인 게일 에반스. 양성간에 어쩔 수 없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서, 굉장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고 실용적인 해결책까지도 제공하는 책이다. 멋지다! 읽으면서 '어 이건 내 얘기잖아?'라고 생각한 구절들이 꽤 있었다.; 이런건 적어뒀어야 하는건데 말이지. 기억나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어떤 여자분의 사례. 늘 혼자 엄청난 양의 일을 떠맡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 문제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까지도 떠맡는다는 것.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문제를 설명해주고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게 나아요'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을 집에서 상을 치울 때 아이들이 치울 때보다 어머니가 치울 때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리기 때문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모두 떠맡는 것에 비유한다. 이것은 슈퍼우먼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만 좋지 않은 행위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상을 치우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일을 함에 있어서도 나누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말.
이 케이스는 최근의 나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동문회 홈페이지를 맡은 이후... 같이 만들기로 한 우현이가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다지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얘기를 좀 해보고야 안 사실인데 사실상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웹마스터를 해보긴 했어도 웹프로그래밍은 아주 조금 다루었을 뿐이고, 서버 관리 경험은 전무하다고 했다. 그래서 뭐... 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혼자서 꾸역꾸역 만들고 있었다. 내가 궁시렁거리면서; 작업하고 있는걸 보면 사람들(이라고 하면 내 주변엔 거의 다 남자분들 뿐이다;;)이 물었다. "왜 혼자 하니? 같이 하기로 한 친구가 안 도와줘?" 그러면 난 대답한다. "에휴... 사실 그 친구가 웹프로그래밍 잘 몰라서... 그냥 혼자 하는게 편해요." 그러면 남자분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 모르면 니가 가르쳐서 하게 만들어야지~!" 그땐 그다지 심각하게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그 책에 나온 정답인거다.;;;
뭐 여하튼 몇 주 동안 용수 뺨치게 연락이 안 되던(^^;) 우현이에게 결국 조금은 직설적으로 내 의사 표시를 했었고... 서로 오해를 풀고 다시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지금도 사실, 상을 치우는 임무를 아이에게 맡긴 어머니처럼 ^^;; 약간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 친구한테 너무 어려운 수준을 맡긴 건 아닌가, 내가 하면 훨씬 빠를텐데 그냥 내가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적어도 '동문회 홈페이지를 공동으로 제작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려면 그 친구도 이 정도는 해봐야 할거라고 생각한다. 웹프로그래밍 경험 쌓아둬서 나쁠 것도 없고. ^^
또...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한 것.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암시만을 주면 안 된단다.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암시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이 대목을 읽고, 작년 가을학기 시작할 즈음에 내가 스카 개발에 관심을 표명했는데도 왜 나를 개발팀에 끼워주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끌렸음에도, 나는 "저는 Perl을 잘 모르는데요..."라는 식으로 빙빙 돌리면서, 정작 마음 속에 있는 얘기, '잘 아는 건 없지만 같이 해보고 싶어요! 언어야 뭐 금방 익힐 수 있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_-;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자신감 넘치는 직설적인 언어는 잘난 척 한다거나; 재수없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우물쭈물하면서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줄어든 것 같다. FreeBSD 시스템은 전혀 다뤄본 적 없고 NNTP라는 단어조차 몰랐으면서도, 무작정 카이스트 뉴스 서버 관리자를 지원했다. 실제로 해 보니 그렇게 겁먹을 일도 아니었고, 모르는 것은 이제부터 알면 될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또 다른 경우는... 동문회 홈페이지 만들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웹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었다. 웹프로그래밍은 정말로 단 한 줄도 해본 적 없고 내 홈페이지는 여기저기서 자바스크립트를 퍼와서 꾸민 것이었으니 -_-; 그렇지만 해보고 싶었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웹프로그래밍이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내 동문을 위해...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도 일단, 내가 존경해오던 선배님들이 하시던 일을 내가 맡을 수 있게 된다는 데에 욕심이 났다. ^^; 그래서 '저 플래시나 PHP는 한번도 안 써봤는데요, 서버 관리는 좀 해 봤고 Perl도 좀 쓸 줄 압니다!"라고 주장해서 이걸 맡게 되었다. ^^; (음 위 스카 이야기엔 Perl을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그 이후 겨울방학에 혼자서 조금 다뤄봤었다^^;)
내가 맡은 이 두 가지 일 모두 아직도 진행형이고, 이것들 때문에 쏟아부은 시간과 새운 밤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얻었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 물론 아직 남은 일들도 잘 마무리해야지.
우악.... 글이 엄청 길어졌다. 오늘 읽은 책이 이거 말고 또 있는데... <도둑맞은 인생>이라는, 20년간 사막의 감옥에 갇혀 지낸 한 어머니와 그 여섯명의 아이들의 이야기. 이 책이 훨씬 두꺼웠으나 이 얘긴 나중에 해야겠다. ^^
세상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는 법이다. 라고 말하면 시시하댄다.
넥타이 매는 법에도 철학이 있다. 라고 말하면 어 뭔가 멋지다고.
하루키가 한 말이다. ㅋㅋ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 라고 말하면 역시 시시하지?
음 난 한 마디로 이 시시한 말을 멋지게 바꿀 능력은 없지만 ^^;
bbs. 게시판. 위키.
이것들은 다 껍데기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는 다 똑같은 것이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글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bbs의 보드나 제로보드 같은 것은 시간 순으로 글을 보여준다. 메일링 같은 것은
글타래라는 소극적인 분류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글타래들도 시간순으로
정렬되어있다. 반면에 위키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분류에 따라 글을 보여준다. 분류가 완벽한 트리구조일 필요는 없고, 별로 아름답진
않겠지만 사이클을 이룰 수도 있다.
말하자면 저 세 가지는 '글을 보여주는 방식'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시간 순으로 정렬되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쉽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들 - 일상사라든가 감정 등 - 의 기록을 남긴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분류에 따라 정렬되는 곳에서는, 뭔가 분류를 생성해내고 정리하고
채워넣어야겠다는 의식이 작용해서, 조금더 비개인적인(;) 내용들을 많이 넣게 되는
것 같다.
글을 보여주는 방식의 아주 미묘한 차이가, 그 글들의 성격을 크게 좌우한다.
그래서 시간 순으로 정렬되는 곳은 그 내용들이 잘 쌓여가면 그것을 만들어가는
이의 성장 과정을 그대로 담을 수 있고 그 자신 또한 많은 지침을 얻을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게 시간이 지난다고 쌓여가는 형태가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형태라면,
단지 사진을 찍어두듯이 일상을 담아두는 용도 내지는 감정의 배설구 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뭐...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긴 하지만, 뭔가 '쌓여가는' 형태를
사용자가 직접 느낄 수 있다면, 자신의 성장을 더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우울한 기분에 대해서 쓰는 글이라도, 내가 예전에 우울했을 때는 어떻게
했더라? 그때는 얼마나 우울했었지? 왜 우울했을까? 그런,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경험을 지침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안은 없을까? 아쉬우나마 카테고리 정도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일기장
용도로 쓰는 게시판 같은 경우에는 '감정날씨' 같은걸 달아서 오늘은 맑음, 흐림,
소나기, 천둥번개, 하는 식으로. ^^; 그렇지만... 역시 부족하다.
"쌓여가면서 발전하는 정보를 담는데에 블로그라는 것이 과연 적합한가?"
블로그라는게 뭔가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 획기적인 것이고, 결국은 그것도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형태'일 뿐. 오픈 소스의 철학에 대해서 와글와글
떠드는데는 어울릴지 모르나 Cygwin에서 Eterm 설치하는 법 같은 것을 블로그에
올렸다간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가는 글 속에 파묻혀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에 그다지 관계되지 않는 정보를 담는 데에는 위키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