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10. 9. 26. 21:40

일상다반사 @ 구글 (3)

구글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하고도 절반이 되었다. 시간은 천천히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여러 사람이 팀을 떠나고 새 사람들이 자리를 메꿨다. 졸탄은 유부남이 되었고 라슬로는 어느덧 건강한 아들 둘을 거느리게 되었고 브루스도 딸을 둔 애아빠가 되었다. 사람들이 점잖아서 미래씨는 언제 결혼하냐고 묻지 않아 다행이다. -_- 팝은 스무명이 넘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나는 취리히에 온 이후로 여지껏 크게 자르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이제 너무 길어 불편한 지경이 되어 슬슬 자를 생각을 하고 있다.


# 브루스의 버즈
"지적설계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왜 작은 인간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은 트름 없이는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못하는 겁니까?"

# 애아빠의 고통
미하올이 종종 브루스에게 인사를 대신해 하는 말이 있다.
"요새 잠은 자고 다녀요?"
그러면 브루스는 대답 대신 잠이 부족해 초췌한 얼굴을 보여준다.

# 헝가리 마을 하나
라슬로가 말했다. "헝가리 시골에서는 부동산 값이 바닥을 기고 있어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집을 처분했는데, 오래되긴 했지만 방이 몇 개나 되고 모든 설비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아늑한 집인데 고작 몇백만원 밖에 못 받는 거예요. 시골 마을들에서는 멀쩡한 별장 한 채가 몇십만원 밖에 안 되는 일도 허다해요. 시골에는 일자리가 없고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스웨덴 사람 잉게마가 물었다. "혹시 외국인으로서 몇 채까지만 살 수 있다는 제약 같은게 있나요?"
"글쎄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사고 싶어서요."

# 주민들의 반발
라슬로가 말했다. "헝가리의 한 지역에 공항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정부가 소음 등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해 주지 않아서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요. 그들이 생각해낸 유일한 대응책은 집집마다 마당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하는 거예요. 파일럿들이 보고 눈이 부셔서 운항에 지장이 있으라고."
내가 물었다. "정말 이상한 대응책이네요. 왜 정부를 고소해서 합의금이라도 받아내지 않는거죠?"
"그렇게 제대로 돌아가는 정부가 아니니까 그렇죠."

# 잉게마의 취미
날씨가 노곤노곤 따뜻해지던 봄날에 잉게마가 말했다.
"지난 주말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무 화단에나 해바라기 씨를 심었어요."
"아니 왜 남의 화단에다..?"
"나랑 내 여자친구는 해바라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여기저기 씨를 뿌려두면 나중에 지나다니다 보이지 않을까 해서.."

# 토마슈의 취미
점잖은 폴란드 사람 토마슈가 신기한 박쥐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길래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작년에 박쥐 구경 행사에 갔었어요."
"뭐하는 행사예요?"
"박쥐가 잘 나오는 지역에 가서 박쥐를 관찰하는 거예요."

# 리차드의 취미
"어릴 때부터 내 폰트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어요."
"아, 지금 수업 듣는게 도움이 되나요?"
"지난 번에 '반 아이들' 밴드 씨디 봤죠? 거기 사용된 폰트가 내 폰트예요."

# 한반도 문제
지도 자료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영국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관련 팀에 고쳐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그다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라슬로가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으니, 나중에 남한 도시랑 북한 도시가 합쳐지는 일이 생기거나 하면 다시 그 팀을 찔러보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그 팀에 다시 압력을 넣겠다는 얘기다. 내가 팀에 있다보니 사람들이 종종 한국 관련 농담을 하곤 한다. 이번에도 그냥 우리는 킬킬 웃고 있었는데 디에나가 정색을 했다. "남한이랑 북한이 뭐가 어떻게 됐다고요?"
"아니 그냥 가상의 예제예요.."

# 한반도 문제 2
사랑니 근처 잇몸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못 견딜 지경이 되어 치과에 갔다. 잇몸 치료를 받고 왔는데 더 아파서 밤새 응급실까지 다녀오는 드라마를 연출한 후 당장 그 다음날로 발치 수술을 받으러 갔다. 마음 좋아보이는 스위스 사람인 치과 의사가 딴에는 신경을 써 준다고 내게 물었다.
"참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북한이 남한 선박을 공격했다고 하던데요?"
"뭐라고요?"
꼭 내가 뉴스를 안 챙기는 날이면 나라에 일이 생기고 남들이 먼저 안다..

# 기술의 중심에 선 촌스러운 사람들
팝은 말한다. "사실 아직까지도 나는 트위터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라슬로는 말한다. "나는 내 사생활을 내가 자발해서 공개한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요. 그런데 내 마누라는 자꾸 우리 가족 사진이랑 얘기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는데 말릴 수도 없고…"
졸탄은 되묻는다. "시장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foursquare 얘기)"
나는 그냥 귀찮아서 안하는 축이다.

# 기술의 중심에 선 촌스러운 사람들 2
뉴욕 팀들에서 활발하게 쓰는 IRC 채널이 있다. 취리히 쪽에서 워낙 반응이 없으니 이들이 기괴한 통계 수치를 들여가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하는데..
- 대화방에서 말한 단어의 양과 코드의 양에는 양의 상관관계는 없지만 음의 상관관계도 없다.
- 대화방에서 말한 단어의 양과 직급 사이에는 경미한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듯 하다.
그밖에 각 팀의 규모와 팀이 언급된 횟수에 대한 그래프 등이 줄줄이 따라왔다. 문제는 우리 팀 사람들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시간낭비예요."
"아무래도 쓸데없는 잡음을 잔뜩 생성하는 대화방 로봇을 개발해서 사람들을 쫓아낼까봐요."

# 화장실 비치 물품
구글 오피스들에는 화장실에 무료로 쓸 수 있는 물품들이 비치되어 있는데, 품목이 오피스마다 조금씩 다르다.
취리히 오피스의 여자 화장실: 디지털 탐폰. 데오도란트.
뉴욕 오피스의 여자 화장실: 애플리케이터형 탐폰. 데오도란트. 콘돔.
서울 오피스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나중에 다시 들러봐야겠다.

# 엘리베이터 문화
배드민턴이 끝난 후 식사 시간. 내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언젠가 회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여느때처럼 가만히 서서 계기판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같이 탄 스위스 아저씨가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너 참 수줍음이 많다고. 아마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무 대화가 없어서 그랬나봐요. 근데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둘 중 어느쪽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수줍은 사람이 되는 거지요?"
독일 아저씨 마이클이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불편한 장소야. 신체적으로 굉장히 근접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면 유럽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그래서 무슨 시덥잖은 대화든지 나누길 바라는데, 이경우 말을 먼저 꺼내야 하는 건 보통 여자들이야. 북서부 유럽 지역,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남자들일수록 여자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거나 심지어 말을 거는 것조차 꺼리는 경향이 있지. 마초로 오인받을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랄까."
옆에서 듣던 소냐가 말했다.
"재미있는 지적이네요. 내가 살던 북미 지역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즉시 사람들이 벽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예의예요. '나는 당신의 바쁜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 언제든 문이 열리는 즉시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거든요."

# '구글년'
배드민턴 후 식사 시간. (IBM에 근무하는 오스트리아 청년) 토마스가 와인 한 병을 주문해 나눠 마실 것을 제안해 그리 했다. 저녁을 먹은 후 계산을 하러 점원이 테이블로 왔을 때, 나는 내가 주문한 음식들을 말해주고 와인 반 병 값을 더해 값을 치렀다. 이윽고 토마스가 계산을 할 차례가 되었고 그는 내가 반 병을 지불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거 뭐야, 내가 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과장해서 자존심이 상한 척 했다.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마이클이 옆에서 심술스럽게 말했다.
"구글년이라서 그래.."

# 스위스의 경찰 업무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스위스의 경찰 업무는 다음과 같다.
-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 처리 이후 사고 현장을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묵묵히 청소한다.
- 주말에 호숫가 주변을 자전거로 느긋하게 순찰한다.
- 일광욕 하던 주민에게 봐 줄 것을 부탁하고 경찰복과 권총을 호숫가에 두고 물에 뛰어든다. (-_- 들은 얘기라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다)
- 식당가. 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이 기준보다 xx센티가 더 삐져나왔다는 이웃 식당의 민원에 줄자를 들고 나와 성화를 열심히 들어주고 한 시간 동안 테이블을 잰다.
가끔 이런걸 보면 난 참 희한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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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쓰려니 기억이 가물가물.. 별 순서도 없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며칠만에 햇볕이 났으니 햇볕을 보충하러 나가야겠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다음에!


간만의 포스팅으로 취리히에 살면서 두 차례 셋집을 구하고 이사를 한 저의 조촐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침을 적어보기로 합니다. 혹시 취리히에 처음 정착하려는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젤이나 베른 등 다른 칸톤은 또 규칙이 살짝 다르기도 하니 기본적인 틀만 참고하셔야 하겠습니다. 스위스에 정착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 분들에게도, 스위스라는 특이한 나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적어보았습니다. 제 독일어 수준이나 여기 살아온 내공이 부족하여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고치겠습니다.

스위스의 임대주거환경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세를 얻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취리히에서 조건이 좋은 집들의 경우 30여명의 희망자가 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위스에는 전세라는 개념은 아예 없고 월세가 주를 이룬다. 가구가 들어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가구가 있는 경우는 집세가 더 비싸고 단기 계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구가 들어있지 않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냉장고, 스토브, 오븐, 때로는 식기세척기 등을 갖추고 있다.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월세가 연립 주택 형태의 아파트들이며, 대개 이들 건물 지하에는 공동 세탁실이 있다.
스위스에서는 거실도 방 한 칸으로 친다. 보통 분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열린 형태의 거실인 경우에도 방 한 칸으로 친다. 방 개수가 0.5로 끝나는 것은 식사 공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거실에 연결되어 있든지 독립된 공간이든지).
스위스에서는 층수가 0부터 시작한다. 0층 또는 EG라고 하면 지상의 첫번째 층을 말한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집세가 높아진다. 발코니가 딸린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외부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트인 공간이다.
집세는 천차만별이다. 공동 생활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취리히에서 부엌과 샤워가 딸린 단칸방은 대략 1000프랑 내지 1500프랑 정도인데 (2010-08-16 기준, 1프랑 = 1123원), 이보다 낮은 가격인 경우 관리 상태가 좋지 않거나 사기(!)인 경우가 많다. 두 칸짜리 집 (침실 하나 거실 하나)은 1500프랑 내지 2000프랑, 건축 연도나 레노베이션 여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세 칸짜리 집은 2000프랑 내지 3000프랑이 일반적인데, 취리히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에 널찍하고 설비가 최신식이고 등등 옵션이 붙으면 월세는 끝도 없이 올라간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정원이 딸린 독립 주택의 경우 10000프랑 월세도 드물지 않다.
스위스의 일반적인 서민 아파트들은 스타일리쉬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깔끔하고 건축 연도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있는 편이다. 취리히는 월세가 다소 비싼 편이지만, 도시 내의 어느 지역에 살든지 치안 수준은 대략 비슷하며 주변 생활 환경도 균일하게 쾌적한 편이다. 도시 중심으로부터 기차로 20분 - 1시간 거리 내의 지역들은 세금 혜택이 있고, 월세가 많이 저렴하며, 자연과 가깝고,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분위기를 가진 마을들이다.

자 이제 셋집을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Step 1. 정보 구하기
방법 1. 스위스에서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는 월세 시장 웹사이트가 있다. www.homegate.ch 본인이 원하는 예산, 평수, 방 개수 등을 입력하고 이메일 알림 서비스를 등록한다. 물론 무료.
방법 2. 이민자 커뮤니티 포럼, 메일링리스트 등을 구독하고 몇 가지 키워드로 (rent, apartment 등) 필터링을 한다.
방법 3. 주변 아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열심히 흩뿌린다. 이 방법의 장점은 비교적 적은 경쟁률을 뚫으면 된다는 것과, 집 나가는 사람과 대개 안면이 있는 경우이므로 이사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가구를 싸게 물려받거나 하는 편의를 봐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법 4. 시간이 없고 돈을 쓸 용의가 있다면 아파트 헌터를 고용하는 방법도 있다. 헌터들이 정보를 구하는 경로도 거의 homegate로 비슷한데,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이들은 임대 관리회사들과 연락망이 있어 homegate에 올라오기 전에 매물 정보를 입수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물론 독일어를 할 수 있으므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 또한 직업상 부동산 보는 눈이 있으므로 방 배치나 집 위치등을 보고 가격 대 품질 비 등을 말해준다. 서류 작성을 대신 다 해주니 본인은 서명만 하면 된다.
스위스의 이사철은 4월 1일 전후와 10월 1일 전후로, 이사를 계획한다면 이 시기를 노리는 것이 좋다. 시장이 활발하여 선택의 폭이 넓다.

Step 2. 집 보러 다니기
조건에 맞는 집을 발견했다면 가서 들여다 볼 차례이다. 대개 정해진 날짜와 시각에 공개 방문이 한 차례 있다. 방문하겠다고 따로 등록할 필요는 없고 그냥 그 주소로 직접 찾아가면 된다. 그 집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성)을 알고 가야 어느 벨을 눌러야 할지 알 수 있다. 공개 방문 일정이 없는 경우에는 전화연락으로 따로 일정을 잡는다.
대개 현 세입자가 살고 있는 상태에서 집을 보여주는 경우이므로,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여 세입자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지 미리 물어보는 것이 예의이다. 상식의 한도 내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괜찮다. 이웃들은 어떤지, 거리로부터의 소음은 어떤지, 왜 이 집을 떠나는지 (보편적인 질문으로, 묻지 않아도 먼저 말해주기도 한다. 집에 결점이 있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목적이 큰 듯 하다) 등등. 한국에서의 상식적인 항목 외에 기본적으로 눈여겨봐야 할 점들:
- 난방 방식 (라디에이터가 가장 흔하지만 바닥난방도 드물지 않다. 한국인으로서야 바닥난방이 최고..)
- 창문들은 빈틈없이 잘 밀폐가 되는가? (난방과 방음, 방충에 영향을 준다)
- 주방 취사 시설이 마음에 드는가? (스토브는 세라믹 열판이 신식이고 금속 열판은 비교적 구식이다. 가스 스토브는 드물며 종종 구식으로 친다.)
- 공동세탁실 사용에 예약이 필요한가? (예약이 없는 쪽이 물론 좋다. 가능하다면 세탁실도 둘러본다.)
- 건축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돌아다녀보면 타일이나 바닥재, 빌트인 가구들의 차이로부터 대략 감이 온다. 이것을 보는 이유는 건축 시기가 이 집 구석구석의 스탠다드를 어느 정도 말해주기 때문이다. 부엌 설비며 화장실 내부까지, 지어진 당시의 표준적인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Step 3. 지원하기 (Anmeldung)
꼼꼼히 따져본 결과 집이 마음에 들었다면 지체없이 지원을 해야 한다. 공개 방문 직후에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좋다. 기본적인 서류는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지원서와 함께 팩스로 보내고 서면으로도 보낸다. 팩스는 품질이 나빠 잘 안 들여다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소홀히 할 수 없다. 지원서는 보통 공개 방문을 통해 직접 받아온다. 모두 독일어로 되어있으나 겁먹지 말고 번역 차근차근 돌려가면서 하면 어렵지 않다. 주의할 점은 어떤 경우 지원서를 내고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 벌금을 내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항은 지원서에 적혀 있다. 다음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지만) 지원서와 함께 보내야 하는 필수 서류들:
- Pass: 여권 사본
- Auslaenderausweis: 거주허가증 사본
- Bestaetigung des Arbeitgebers: 본인의 직장으로부터의 고용 사실 확인서. 연봉도 함께 적혀있으면 좋다. 풍문에 의하면 세입자를 결정할때 대체로 연봉 순으로 한다고 한다. 선호 직업군도 있어서, 스위스 은행에 근무한다면 단연 1순위이다.
- Betreibungsauskunft: 채무관계 확인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문서가 첨부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집주인이나 임대 회사들은 지원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문서는 현재 본인이 이 나라에서 가진 채무 액수를 증명하는데, Betreibungsamt라는 정부 기관 사무소에 가서 일정 수수료를 내고 받아온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일주일 내로 우편으로 도착한다.
서류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본인의 직업과 인간 됨됨이와 기타 등등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스위스 사람이 있으면 지원서에 적으면 큰 도움이 된다. 집주인이나 임대 회사가 이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서류 상에 나타나는 다른 여러 지표보다도 다른 스위스 사람의 한 마디를 더 신뢰하는지도 모른다.

Step 4. 새 집 계약 체결하기 (Mietvertrag)
좋은 소식은 전화로, 나쁜 소식은 편지로 온다. 지원서를 내고 1-2주일 내로 연락이 오니 항상 전화 대기하자. 삼대가 덕을 쌓았다면 한방에 연락이 오겠지만 일반적인 경우 서너 번 지원을 하면 한 번 가량의 행운이 있다. 열 몇 군데를 지원해서 싹 떨어졌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낙담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리자.
합격의 기쁜 소식을 받았다면 며칠 내로 계약서가 서면으로 도착한다. 두 부가 오는데 둘 다 서명해서 보내야 한다. 한 부는 집주인의 서명을 얻은 후 돌아올 것이다.

Step 5. 살던 집 계약 종료하기 (Kündigung)
새 집과의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현재의 집주인에게 계약을 종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절차는 반드시 서면으로 해야 하며 (독일어든 영어든 상관은 없으나, 의사가 명확해야 한다), 가능하면 우체국에서 '몇날 몇시에 누가 누구에게 우편물을 보냈다'는 보증을 받는 것이 좋다. 5프랑을 내면 우체국 측에서는 우편물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긴다. 후일에 집주인과 문제가 생길 경우 이 보증이 필요할 수 있다. 편지를 보낸 후 집주인 혹은 임대 회사와 구두로 재차 확인하여 확실히 한다.
계약서는 보통 일년에 2회 (새 계약서인 경우 3회), 특정한 날짜에만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고 적혀있다. 보통 4월 1일과 10월 1일이 계약 종료일이며, 이 날짜가 되기 3개월 전에 서면으로 의사를 알려야 유효하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아무때나 계약을 종료하는 것이 가능한데, 새 세입자를 구해와서 집주인이 승낙하거나, 새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해서 월세를 낸다거나, 둘 중 하나의 조건 하에 가능하다.

Step 6. 살던 집 새 세입자 (Nachmieter) 구하기
3개월 앞서 계약 종료를 통보한 것이 아니라면, 새 세입자를 구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지금 당장 현재의 집을 물려받을 세입자를 구하기 시작해야 한다.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로부터 지원자들에게 나눠줄 지원서를 받는다. 주변 아는 사람들 중에 희망자가 있다면 집주인에게 간단한 소개를 해 주고 그 희망자에게 지원서를 건네주는 것으로 문제가 끝날 수도 있다. 주변에서 새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까 언급한 homegate 웹사이트에 집주인이 광고를 내게 되고, 집주인과 협조하여 공개 방문 날짜를 정하고 희망자들에게 집을 보여주게 된다. 공개 방문이 곤란한 경우는 본인의 전화번호 등을 광고에 올려 방문 일정을 잡기도 한다. 희망자들에게 지원서를 나눠주고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에 서류를 보내라고 말해준다.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했음을 알려오면 책임은 끝난다.

Step 7. 이사 (Umzug) 준비하기
집 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취리히에 갓 도착해서 달랑 수트케이스 하나가 살림의 전부라면 문제는 간단하겠으나, 이미 살림이 있다면 이사를 해야 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가장 권하는 방법은 이케아 등 가구점에서 이사박스를 사다가 직접 짐을 싸는 것. 짐을 나르는 데는 이사용 밴과 친구들의 도움을 빌리는 방법이 있고, 이삿짐 센터를 부르는 방법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삿짐 센터를 부르는 것을 추천한다. 짐은 날라본 사람들이 잘 나른다.. 시간당 120프랑 내지 150프랑인데 조건이 약간씩 다르므로 여러 회사에서 견적을 받아서 비교해보고 결정할 것. 미리 예약을 하고 계약서가 서면으로 오간다. 보험 적용 범위도 확인하자.
직접 짐을 쌀 여력이 없다면 포장이사를 부르는데, 가격은 대략 3명에 시간당 200프랑이라 한다.

Step 8. 새 집 물려받기 (Übergabe)
새 집을 물려받는 절차는 그냥 열쇠만 건네 받는 것이 아니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를 예상하자. 이전 세입자와 새 세입자가 만나 열쇠를 건네는 것은 물론, 집주인 또는 임대 회사에서 전문가가 나와 청소 상태와 기물의 상태를 꼼꼼히 검사하고 규격 문서에 기록한다. 이 규격 문서는 기입이 끝난 후 집주인이 한 부, 이전 세입자가 한 부, 새 세입자가 한 부씩 나눠 가진다. 새 세입자는 집의 결점이 발견되면 자신의 입주 전에 고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집주인과 이전 세입자가 동의한다면 실제 계약일보다 며칠 앞서 이 건네주기 절차를 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전구나 전등, 샤워 커튼 등은 집의 일부가 아니므로 이전 세입자는 몽땅 가져갈 수 있다. 없으면 당장 불편한 것들이므로 새 집에 이사갈 때는 이것들을 미리 준비해가자.

Step 9. 살던 집 청소하기 (Reinigung)
취리히에서는 집에 이사를 들어갈 때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갈 때 청소를 한다. 이 청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얼룩 한 점 없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위스 집주인들의 청소검사는 그 악명이 대단한데, 흰 장갑을 끼고 온 구석을 쓸어본다는 말은 사실이고, 가방 한 가득 온갖 종류의 거울들을 가져와서 다양한 각도로 구석구석을 살펴본다는 말도 있고, 화장실 변기를 핥아봐서 아무 맛이 안 나야 한다는 낭설까지 있다. 스위스의 모든 집주인이 이리 악독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검사하는 최소한의 필수 종목으로 알려진 것들로는 다음이 있다:
- 문짝과 각종 선반 윗 부분의 먼지
- 창문, 창문틀, 창문 밖의 블라인드 먼지
- 부엌 환풍기 내부
- 수도꼭지와 배수구 내부 (나사를 다 풀어서 내부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 (드물게) 콘센트 내부
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처음 집 들어갈 때 냈던 보증금에서 청소비용을 제하게 된다.
검사 항목이 이러하므로 이것을 일반인이 직접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전문 청소 용역업체를 부르면 집의 면적에 따라 500프랑 내지 2000프랑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용감한 사람들이 직접 청소를 하기로 결심하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의 한결같은 소감은 '친구/배우자와 둘이서 이틀 내지 사흘 꼬박 청소를 했는데, 몸이 고된 것도 고된 것이지만 이렇게 고생하고서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덤태기를 쓸 수 있다는 공포가 더 힘들더라'는 것이다. 그냥 웬만하면 용역을 쓰자. 프로페셔널들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용역업체의 또다른 장점은, 청소검사에서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을 해결할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보증 항목이 있는지 계약서를 잘 확인할 것.

Step 10. 새 집 즐기기
처음 몇 주 간은 이웃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살피자. 정말로 저녁 10시 이후에 변기 물을 내리면 득달같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인지? (이것은 일반적인 스위스 아파트들의 규칙으로 적혀있는데, 체감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물론 철저히 지키지 않는다. 은퇴한 노년층이 주로 사는 아파트들에서는 좀더 엄격하다고 한다) 정말로 일요일에 빨래를 하면 주의를 받는지? 세탁실 사용후 청소는 어느 수준으로 하는지? 저녁 몇 시 이후에 건물 출입문을 잠궈야 하는지? 발코니 난간에 붉은 꽃이 담긴 화분을 달아야 하는지? (그런 것이 암묵적인 규칙인 건물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계약서와 부록으로 딸려온 규율로 적혀있는 수많은 것들을 다 지킬 수는 없다. 이웃들이 꼬박꼬박 지키는 것, 느슨한 것, 등을 파악하고 사람사는 것처럼 살자.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10. 3. 4. 07:17

수트케이스 인생

Doctor Who 시리즈 중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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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roamed about this Earth
With just a suitcase in my hand,
And I've met some bog-eyed Joe's,
I've met the blessed, I've met the damned.
But of all the strange, strange creatures
In the air, at sea, on land,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I love you, you understand.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No, no.

I have wandered, I have rambled
I have crossed this crowded sphere,
And I've seen a mass of problems
That I long to disappear.
Now, all I have's this anguished heart,
For you have vanished too.
Oh, my girl, my girl, my precious girl,
Just what is this man to do?

So, reel me in, my precious girl,
Come on, take me home.
'Cause my body's tired of travelling
And my heart don't wish to roam"

-- "Love don't roam" Doctor Who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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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 처음 도착해서 다양한 몬스터들사람들을 마주치고 함께 일하면서, 분명 나는 이 '수트케이스 인생'의 감수성에 자극받았다 (가사는 이 짓 그만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표현이 또 괜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할 일 없는 주말이면 닥터후 시리즈를 마냥 틀어놓고 그들의 광활한 시간여행을 즐겼음은 물론이다.

허나 2년 후 나는.
만년 학생마냥 단칸방 사는 것에 싫증이 나서 이사를 한다.

굳이 이사를 해야하나, 그 수많은 잡일은 어떻게 감당하나, 회사 일은 늘상 바쁘고 살림 재주는 시원찮아 손님 하나 와도 내 마음의 평화가 위협받는-_- 마당인데 정말 구태여 일을 벌여야 하나, 지금 사는 집도 좁다는 거 빼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언제고 마음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으려면 살림살이는 가벼워야 하지 않나,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들 타국에서 짐 바리바리 싸들고 가족들 데리고 스위스엘 온 사람들이다. '난 몇 년 뒤에 여길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난 평생 여기 뿌리내리고 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인생에 변화가 생기면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새로운 지역에 가면 거기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누리며 살다가, 다른 지역에 가면 또 그렇게 적응해 나간다. 지금껏 나는 언젠가는 어딘가에 정착하고 살아야지, 그때까지는 편안함을 추구할 필요없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해왔는데, 어느덧 그런 무기한 연장이 지겨워져 버렸다. 떠돌이 살림도 이젠 할 만큼 했지.

2년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진 독일어로 떠듬거리며 집을 보러 다니고 지원서를 내고 계약을 하고, 이 집 물려받을 세입자를 구하러 부지런히 청소하고 집 보여주고, 이삿짐 센터들에 연락해서 가격 비교를 하고, 아 나갈때 청소 용역도 불러야지 걱정하면서, 이게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가 싶긴 하지만, 뭐 이게 다 훗날 돈 주고 못 산다는 경험이 아닌가, 그냥 그렇게 다독이고 있다. (또 모르지 막상 이사가면 좋다고 춤출지도)
유난히 길고 눈이 많았던 겨울이 끝나고 꽃피는 계절에 찾아온 부활절 연휴. 회사 친구들과 함께 드미트리가 살고 있는 탈린에 놀러가기로 했다. 전날까지 감기로 고생하던 나는 약 네 봉지를 입에 털어넣고 12시간의 수면 뒤에 가까스로 원기를 회복했다. 여전히 정신없는 공항의 아침. 일단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공항 도착했어. 근데 우리 어디 가는거야?"
수화기 너머로 저희들끼리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콕이라고 해 방콕'
4시간 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탈린에 도착했다.

취리히에는 눈부신 햇살 아래 사람들이 죄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봄꽃이 만발하고 있건만. 이 북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봄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항 건물을 나서면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나는 황급히 옷깃을 여몄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북방 지역엘 또 왔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에릭은 계속 내 구겨진 얼굴을 보며 좋아라했다. 다행히 드미트리의 집은 무척 따뜻한 온돌집이었다. 거리에선 을씨년스러워보이던 겨울나무들도 홍차 한 잔에 몸을 녹이며 발코니에서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은가. 간사하게도.

탈린은 저 먼 중세의 느낌이 곳곳에 남아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옛 시가지는 붉은 지붕들이 널찍하게 이어져있고 여린 겨울햇살을 받은 담벼락이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수도사 복장을 한 웨이터들이 서빙을 하는 카페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누군가가 투덜거려 도로 거리로 나왔다. 중세의 레시피대로 요리를 하는 식당에서는 푸짐한 오리요리와 꿀맥주가 일품이었다. 웨이터들이 모든 요리에 대해 재료를 일일히 설명해주었다. 실내가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나. 러시아 전통음식 식당은 첫 음식이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맛은 꽤 훌륭했다. '저 주방에 요리사 딱 한 명 있다'고 빈정거리던 우리도 결국 하나씩 나오는 음식에 느긋하게 배가 불러왔다. 평소에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샤오펑도 이날은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도시 이곳저곳에 조금씩 남아있는 구소련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선함이었다. 샤오펑을 제외하고 구소련의 유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은 그 시대의 조각상이나 기념비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댔고 드미트리는 그런 우리를 더 신기해했다.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던 시점에 에스토니아인들은 구소련에 관련된 모든 유적 유물들은 철저히 부숴버렸다고 한다.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의지에는 십분 공감을 하지만, 그래도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에 더 끌리는 법이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마니쉬가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스탈린 아내가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다고 하던데."
"그야 당연하지."
"왜?"
"네가 하루종일 세계정복을 위해 힘쓴다고 쳐. 어느 나라의 전쟁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울먹이지.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애정이 식었어... 어쩌고저쩌고."

탈린에서 해로로 두 시간 반이면 헬싱키에 다다른다. 이미 탈린에서 볼 만한 것도 다 봤겠다, 핀란드에 있는 친구를 방문할 예정인 에릭을 따라 일행은 예정에 없던 바이킹라인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핀란드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고 시스템은 사회주의에 가깝다. 길고 음울한 겨울 탓에 우울증 환자나 마약 중독자가 많은 편이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주류 판매가 주중의 특정 시간, 특정 판매처로 제한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에는 주류 판매처마다 줄 서서 기다리는 알콜 중독자들을 볼 수 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스톡홀름처럼 탁 트인 북방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던 나의 기대는 바이킹라인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술을 박스째 끌고 갑판에 오르는 사람들의 초점잃은 눈들. 밤새 파티에서 놀고 새벽 배를 타는 듯한 십대들의 헝클어진 머리. 이 배의 단골인듯 가벼운 아침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후줄근한 옷차림. 마니쉬는 아까부터 예쁜 여자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며 야단이었다.

일단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간이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스크램블에그와 소시지, 우유 한 컵을 샀다. 한 입을 베어물고 설마했다. 다시 또 다른 것을 한 입 먹어봤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접시 위에 있는 것 중에 아무 것도 맛이 없어."
마니쉬가 열렬히 동의를 표했다. "진짜 이렇게 허술한 아침은 처음 먹어본다. 전부 다 맛이 형편없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최소한 이 소시지는 말이지. 음. 맛이 있잖아?"
곧 에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왔다. "음, 아침식사 가격이 무척 저렴하군." 포크가 몇 번을 오간 뒤 그는 말했다. "음, 품질도 저렴하군."

에릭은 친구를 만나러 떠나고 샤오펑은 새로 장만한 DSLR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부지런히 길을 나섰지만, 마니쉬와 나는 옹동하니 주저앉은 하늘과 잿빛 거리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무채색의 옷을 입었고 표정에도 활기가 없었다. 거리의 차들은 일 주일쯤 세차를 안 한 듯 지저분했다. 마니쉬가 중얼거렸다. "다 햇볕이 부족한 때문이야." 추위 속을 걷다 지쳐 무조건 눈에 보이는 트램을 타고 앉아 바깥 구경을 했다. 독특한 건물들이 종종 보였고, 스웨덴에서 보아온 익숙한 상표들도 보이고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스웨덴어로 단어 몇 개를 읽으며 아는 척도 했다.
"이케아랑 호엠이 둘다 스웨덴 상표라고?"
"실제로 유사성이 느껴지지 않아? 이케아 디자인와 호엠 디자인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잖아."
"가구랑 옷 사이에서 무슨 공통점을 찾으라는 거야?"
"...뚜렷한 원색에 큼직큼직한 패턴을 주로 쓴다든가, 매끈하게 떨어지는 선이라든가 하는 것."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동경하는 인도 남자와 겨울마다 오리털이불에 틀어박혀 사는 한국 여자. 이렇게 죽이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낮잠을 실컷 잔 다음 사우나를 하고, 몸이 좀 가벼워진 우리는 느적느적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러 갔다. 샤오펑은 '재밌게 놀아!'라는 문자 한 통만을 남기고 숙소에 들어간 참이었다. 몇 개의 바를 전전하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70년대풍의 라이브 클럽에 눌러앉았다. 어디서들 구했는지 70년대의 최신유행 패션으로들 차려입은 사람들.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의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해보였다.
"우리가 오늘 한 일이 이 나라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이었을거야."
"이 나라에 사우나가 발달한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날씨가 암울한데 사우나하고 술마시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있을리가 없지."
"아니 지금까지 불평만 했지만... 뭐... 그래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도시야."
"그 말이 불평보다 더 심하게 들리는데."

다음날 항구에서 다시 만난 에릭의 감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친구가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여기까지 자길 보러 와 줬다고. 결혼식 이후로 방문객은 내가 처음이래."
단 하루였지만 궂은 날씨와 혹독한 추위에 질려버린 우리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신이 났다. 멀어져가는 헬싱키의 항구를 바라보며 에릭은 매우 프랑스적인 촌평을 했다.
"자기 나라를 떠나는 산업이 이렇게 발달한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어떤지 알 만 하지."
배가 탈린을 향하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불평해오던 취리히의 흐린 날씨와 구질구질한 빗줄기가 이곳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같은지, 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들과 패셔너블한 젊은이들로 넘쳐나는지, 그것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얼마나 가치있었는지를 떠들어댔다. 고작 두 시간 반 거리의 탈린에는 축복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빛났다. 이 약간의 위도와 경도 차이가 얼마나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햇볕의 양을, 국민들의 성격을, 옷차림을, 삶의 질을 바꿔놓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살아갈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위대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것이 일반인에게 가능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진다.

드미트리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우리는 취리히에 돌아왔다. 일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씨 불평을 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잿빛 거리와 하늘 말고도 그 나라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 무표정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봤다면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웅크린 하늘의 도시들, 탈린과 헬싱키. 너무 혼쭐이 나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기에 괜한 궁금증이 인다.

여행 사진들은 여기
취리히의 일상사.

# 취리히 미스테리
빨래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양말이 한 짝씩 사라진다는 건 고등학교때부터 깨달아온 평범한 삶의 진리건만, 취리히에 살다보니 가끔 이상한 일을 목격한다. 사라졌던 양말들이 짝을 맞춰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 참 누군지 몰라도 친절한 이웃이구나 생각하다가도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도대체 그 댁은 뭐하느라 남의 양말을 한 짝 씩 잘 모아뒀다가 짝을 맞춰주는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양말에 이름이 적힌 것도 아니고 아파트 호수가 적힌 것도 아닌데 내 양말인 줄은 어떻게 안 것일까...

# 라슬로의 의문
라슬로에게는 이제 6개월 정도 된 아들이 있다. "헝가리에 계신 부모님이랑 자주 스카이프를 하는데," 그가 말했다. "볼 때마다 '어머나 세상에, 쑥쑥 자라는 거 봐봐'라고 하시는데, 참 이상하단 말이죠. 제가 볼 때는 여전히 너무 작은데."

# 개미 사육
라슬로와 알렉스가 사무실 바닥에 앉아서 거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거미를 잡으면 헝가리에서는 재수가 안 좋다고 하는데." 둘 중 누군가가 제안했다. "그럼 가둬뒀다가 오후에 잡지요." 그들은 컵을 바닥에 뒤집어 거미를 가둬놓은 뒤, 점심을 먹고 와서 거미를 잡아서 알렉스의 개미들에게 주었다.

# 미국은 다 똑같애
점심먹으러 가기 전 스트리트뷰의 새 UI 데모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와와 감탄하면서 스트리트맨을 이 주로 저 주로 옮겨보았으나 보이는 건 온통 끝없이 뻗은 도로와 널찍한 들판 뿐이었다. 팝이 불평했다. "미국은 왜 다 이렇게 똑같이 생긴거야?" 앨런의 대꾸. "동부쪽으로 좀 가봐." 건물들이 등장했고 우리는 다시 와와 감탄하면서 데모를 구경했다.

# 한국 지도
구글 맵스 한국 론치를 앞두고, 나는 우리 팀 사람들에게 한국 팀에서 열혈 개발중인 데모 링크를 알려주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팝은 강릉과 속초 쪽을 들여다보면서 지도가 정말 상세하다며 신기해했다. "저기... 그쪽은 조금 변두리 지역이고요 서울 쪽을 보셔야 뭐가 많아요." 그리고 나는 서울역 부근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떤 정부를 둬야 이런 지도가 나오는거지?" 앨런이 몹시 감탄했다. "가끔 일본쪽 쿼리 디버깅할때마다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던데. 이런 색색깔 칠해진 건물이랑 특별부지들 예쁘잖아. 비즈니스 아이콘들이랑."
사실 나는 지도의 차이를 정부에서 찾는 미국인의 사고방식이 더 신기하다.

# 문화 차이
라슬로: 이 남자랑 여자랑 서 있는 아이콘은 뭐예요?
나: 예식장이요.
졸탄: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알렉스: 이 그릇이랑 숟가락 아이콘은 뭐죠? 식당인가?
나: 아 그건 약국이예요.
알렉스: 이건 성?
나: 학교예요. ㅜㅜ

# 잘못된 방향
주간 회의에서 디에나가 요즘 자신이 작업중인 코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앨런: 그거 왜 필요한건데?
디에나: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운전하잖아!

# 한국 론치
어느 화요일 아침의 출근 인사.
나: 굿모닝. 한국 론치했어요. ^^v

참고삼아 상황설명. 한국 맵스는 한국에 팀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저희 지도검색팀 관련한 업무만 간간히 도우면서 한국팀 일도 구경하고 있고요 (어쨌든 물론 한국어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으하하).

# 예리한 파월
파월과 배드민턴 단식 경기를 하던 중 나는 그만 기진맥진 지쳐버렸다.
나: 조금 쉬었다 하자. 오늘 날씨가 저기압이라 몸이 좀 피곤하네.
파월: 그러지 뭐. 좋은 이유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구질구질한 날씨.
나: 끄덕.
파월: 업무과중과 스트레스.
나: 끄덕.
파월: 아프리카의 기근.
나: ...변명이 아니었다구.

# 예리한 파월 2
토마스의 집들이 팟럭 파티에 갔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들이 하나씩 테이블에 나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음식들에 대한 칭찬이 오가는 중 한 켠의 와인 코너에서 나는 빈 잔을 채우며 파월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배드민턴 클럽과, 그의 고향 바르샤바와, 각자의 주량 등에 대해 대화를 했다. 나는 슬슬 좀더 지적인 화제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참 무슨 팀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파월: 실망이야. 이제 대화는 끝났어!
나: 어?
파월: 날씨 얘기 일 얘기 나오기 시작하면 끝이라니까. '지루한 대화였어, 잘 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우리 대화가 겨우 그것밖에 안 됐던 거야?

# 일 얘기
그러나 분명 때로는 일 얘기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미안하게도 이름을 까먹어버린) 한 구글러와는 마틴의 팟럭 파티에서 한 시간 가까이 '애즈에서의 검색 품질 테스트와 맵스에서의 검색 품질 테스트를 어떻게 잘 연결해서 시너지를 내 볼까' 풍의 얘기를 즐겁게 하지 않았던가!

# 좋은 소식
오랜만에 만난 현순언니가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미래씨 뭐 좋은 소식 없어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 네 한국 맵스가 얼마 전에 론치했어요."
"..그런거 말구요!"

# 기억하고 싶은 와인
나: 흠 이 와인 이름 기억해야겠어요.
소냐: 맘에 들었나봐요?
나: 아뇨, 다시 안 마시려고 기억하는 거예요. 떫은 맛이 너무 심해서요.

# 연장된 휴가
아니카가 3개월의 휴가 끝에 돌아왔다.
나: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사람들이 너 미국으로 영영 이주해버렸다고까지 했다니까. 3개월짜리 휴가라니 분명히 멋졌겠지?
아니카: 그게 사실은 말이지...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워싱턴에서 만난 한 장교와 사랑에 빠져, 남은 여행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일 주일만에 동거를 시작해서 그와 함께 두 달 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숨 돌릴 틈도 없이 해 줬다. 장갑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든가, 군부대의 수영장이며 체육관이며 편의 시설을 하루종일 이용할 수 있어서 장교 여자친구라는 거 참 할 만 하더라든가,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사려깊고 매력있는 남자인가 등등. 조만간 그가 취리히로 여행을 올 거라는 얘기도.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눈은 꿈을 꾸듯이 반짝반짝 (분명히 그랬다!) 빛나고 있었다. 나는 참을성있게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고 지금 여기에 쓰고 있)다.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축복을.

# 한국인
여성 구글러들과 함께 와인 보트 축제에 갔다. 다시 말하면, 아가씨들 열댓명이 우르르 술 마시러 몰려갔다. -_- 절반 정도는 동유럽 출신이라 지금까지 내가 어울려 다닌 어느 그룹들보다 술을 잘 마셔서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었다.
해나: 당신을 내 술친구로 임명합니다.
나: 영광이옵니다.
그레이스가 깔깔 웃었다. "미래는 진짜 한국인 같애요." (그레이스는 말하자면 한인교포 2세다)
나: 한국인 같은게 아니고 나는 정말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예요.
다음날 숙취로 집 천장만 바라봤다.

# 독일 남자친구
배드민턴 클럽을 이끄는 맥주친화적인 독일 아저씨 마이클은 볼 때마다 나를 야단친다.
마이클: 왜 아직도 독일 남자친구를 안 사귀는 거야?
나: 아니 왜 꼭 독일인이어야 하나요.
마이클: 취리히에 왔으니 독일어를 배워야 할 것이고, 독일어를 배우려면 독일 남자를 사귀어야지!
나: 혹여 누굴 만나더라도 그 사람 자체 때문이어야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만나면 쓰나요.
릴리와 옥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럼 우리가 이 남자들이랑 왜 결혼했게요?"



여기서부터는 뉴욕 출장 얘기.

# 초과업무
항상 팝의 근면함에 감탄하던 나는 출장가는 비행기를 같이 탄 김에 물었다.
나: 저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시고요... 그냥 궁금해서요.
팝: 그럼요.
나: 그렇게 맨날 늦게까지 일하면 부인께서 화 안 내요?
팝이 웃었다. "화내요."

# 다양성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야니스: 참 그 친구 이름을 바꿨죠.
앤드류: 이름만 바꾼게 아니지 말이죠.
팝: 뭐, 다양성을 존중해야죠.

# 맨체스터 동문
앤드류와 팝이 맨체스터 동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야니스가 놀란 기색을 했다.
야니스: 그런데 팝은...
우리는 흐린 말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팝은 살짝 프랑스 억양을 가진 반면, 핀란드 출신인 앤드류는 굉장히 심한 맨체스터 억양을 가지고 있는 것.
팝: 저는 억양까지 픽업하진 않았는데 말이죠.
앤드류: (독백조로) 출신을 숨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어요. 억양을 고쳐가면서까지. 불행한 출신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어요.

# 리즈
구글 맵스 전체를 통째로 책임지고 있는 리즈는 끊임없이 쉴새없이 말할 수 있는 대단한 정력과 아이디어의 소유자이다. 이메일로 간간히 그녀에게서 버그 리포팅을 받다가 뉴욕 출장에 가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나: 지도검색팀의 미래예요.
리즈: 리즈예요. 아 당신이 그 미래군요? 닌자 프로젝트(대충 이렇게 얘기해둡시다. 쿨럭) 담당하는?
나: 네. 이번 분기부터 그 프로젝트는 국제화 팀으로 인수인계 중이고요.
리즈: 나는 도대체 사람들 이름이랑 얼굴 매치하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한 번 보고 나면 그제서야 매치가 되지요. 내 머릿 속에는 '미래? 닌자 프로젝트' '닌자 프로젝트? 미래' 참 단순하지만 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기억해요. 분명히 사람들은 기분 나쁠거야 내 머릿 속에 자기들이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는 걸 알면.
그녀의 언변은 카페테리아의 끝에서 끝까지 한 걸음씩 이동하도록 계속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었기에 나는 다소 안심했다.

# 뉴욕 오피스의 점심식사
뉴욕 오피스는 과연 소문대로 다양한 요리가 즐비했다. 베지테리안 컬렉션, 온갖 종류의 커리들, 동양 음식들, 심지어 낫또까지 있었다. 나는 UI 디자이너 스캇과 잠시 내 프로젝트들과 관련한 간단한 UI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옆 테이블에 자리한 리즈와 앤드류는 물 만난 고기마냥 포크 드는 것도 잊은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인류와 철학에 이를 때 즈음 나는 내 접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스캇이 눈을 찡긋했다. '재미없죠' 그리고 그는 뉴욕에서 어디를 여행할 계획인지 물었고, 서점에 가고 싶다는 내게 길 건너 스트랜드를 추천해줬다.

# 이틀짜리 뉴욕 관광
주말에는 야니스, 앤드류, 팝과 앨리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을 실컷 했다. 토요일은 오전에 모마에 갔고 점심으로 일식을 먹었으며 타임스퀘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혼자 스트랜드에 가서 책 냄새를 실컷 맡고,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만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The 39 Steps> 연극을 봤다. 일요일에는 사라베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뉴욕 닉스 경기를 관람하고 메이시에서 옷가지 몇 개를 샀다. 앤드류와 팝은 길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아이폰과 블랙베리로 구글 맵스를 검색하다가 디버그 공방을 벌이는 낭만도 잊지 않았다.
더블에스프레소 한 잔 씩을 앞에 놓고 팝이 물었다. "이번 출장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내 매니저는 참 끝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요." 앤드류가 킬킬거렸다.

# 국제 로밍
출장 덕에 전화비가 12만원이 넘게 나올 예정이다.
나: 역시 국제 로밍은 너무 비싼 것 같애. 뉴욕에서 맵스 몇 번 검색하고 급한 전화 몇 통 했더니 이렇게 나와버렸네.
맷: 맨하탄처럼 길 잃기 힘든데서 맵스는 왜 쓴 거야?
나: 눈 앞의 광경을 스트리트뷰와 함께 보면 얼마나 근사한데.
맷: 으하.
나: 고속도로에서 차가 막히기 시작하길래 교통량 검색을 해 봤더니 우리 택시가 빨간 줄 초반에 있더라구.
맷: 제법 유용하네.
나: 그치. 다시는 데이터 로밍 안 쓰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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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구글 맵스 한국 http://maps.google.co.kr

문의사항은
구글 맵스 한국 그룹 http://groups.google.com/group/google-kr-Maps/topics
구글 맵스 API 그룹 (글로벌) http://groups.google.com/group/Google-Maps-API
공식 채널을 통하시는 것이 여러모로 가장 권장되는 방법입니다. 지도검색에 관련한 개선점은 저에게 직접 문의를 주시면 힘 닿는 만큼 봐 드릴 수는 있으나 100% 고쳐드린다는 부도수표는 남발할 수 없어 조심스럽고, 지도검색 외의 개선점에 대한 문의를 주시면 함께 공감하고 슬퍼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각자의 분야가 워낙 세분화되어 있는지라 그중에 제가 고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으니 이 역시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또 직접 사람 냄새 나게 연락할 수 있는 아무개가 있다는 건 기분이 다를 것이니, 제게 직접 귀뜸 주셔도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며 귀담아 듣겠습니다만. ^^

구글 맵스가 추구하는 큰 목표 중의 하나가 '재미'라는 사실 아시는지요. 커다란 서비스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구글 맵스가 언제나 유용하고 즐거운 서비스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가만있자 한국에서의 정식 명칙은 구글 지도인데... 킁)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2009년 되세요! ^^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8. 11. 2. 07:23

일상다반사@구글

# 스트리트뷰 론치기념 파티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 밀리웨이에 갔다. 평소에도 밀리웨이의 식사는 언제나 훌륭했지만, 그날따라 도가 지나칠 정도로 메뉴가 으리번쩍한 것이 아닌가. 번쩍거리는 디저트들 옆에 푯말이 붙어있었다. '스트리트뷰 파리 론치 기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스트리트뷰 영상과 함께 프랑스 음악이 흘렀다.
에릭이 불평아닌 불평을 했다. "이거 참, 나는 그저 점심을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 미국에는 버팔로가 없어
자기가 미국인인지 영국인인지 독일인인지 헷갈려하는 마틴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에는 진짜 버팔로가 없다. 버팔로라는게 뭔지 잘 몰랐던 미국인들이 엉뚱한 동물을 버팔로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동물이 미국 전역에 퍼져서 잘 서식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건 진짜 버팔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국에는 진짜 버팔로 모짜렐라도 없다. 스위스에도 버팔로가 자라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버팔로 모짜렐라는 진품이라면 모두 이탈리아산이다.
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기분으로 흘려들으며 구운 치즈를 맛있게 먹었다.

# 10만원
처음 이주해와서 가구 사다 조립하고 나름대로 독립심과 자주심과 자긍심을 쌓아가던 차에, 결국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파이프 형태로 된 옷장을 샀는데, 이걸 설치하려면 천장을 드릴로 뚫어야 했던 것. 결국 가구점에 전화를 해서 10만원짜리 가구조립 서비스를 신청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전형적인 러시아 군인 체격의 드미트리가 잔뜩 핀잔을 주었다.
"날 부르지 그랬어. 10만원이면 사람도 하나 죽일 수 있는데." -_-

# 굳어진 단위 환산
다같이 카누를 타러 가기로 하고 가격을 알아봤다.
"얼마래?"
"한 사람 반."

# 본토 영어
어느날 앨런이 내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말을 했다.
"#&%^@#$Y&#%^&#&*$^&@$@"
"뭐라고?"
"아, 신경쓰지 마." 그리고 그는 다시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본토 영어 2
어느날 앨런이 내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광속으로 말을 했다.
"이게 @#!@#$한데 말이야 @$%@^&@$하고 @#&#한데 어떻게 &*&#$%#할 수가 있지?"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네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이 현상이) 이해가 안 돼."
그리고 그는 다시 뚜벅뚜벅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본토 영어, 그러나 오레곤 사투리
팀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중 각 나라의 상징 동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유럽 나라들 대부분이 독수리여서, 자기 나라는 황금색 볏이네, 자기 나라는 머리가 셋이네, 이런 시덥잖은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해줬다. "한국의 상징은 타이거예요. 지도가 호랑이처럼 생겼거든요."
명색이 지도검색팀인지라 사람들이 다들 한반도 모양은 알고 있어서, 어떻게 호랑이가 이 모양에 매치되는지를 내게 묻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앨런이 한참 뒤에 말했다. "티거 말하는거야?"

# L 발음은 어려워
어느날 내가 앨런의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말을 했다.
"그래서 월드 빌드에서는 이러이러한 것과 이러이러한 것을 추출하고 있는데..."
그가 골똘히 생각해보곤 말했다. "아, 월드 말하는거구나."

# 친밀한 남미인
종종 다른 오피스에서 우리 팀을 방문하면,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나름대로 상냥하게 대접하려 노력한다. 어느날 남미풍의 이국적인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예요."
각자 소개를 하며 악수를 하는데, 이 손님이 디에나에게만 손에 키스를 했다. 디에나가 약간 당황하며 재빨리 수습했다. "아 정말 친밀하시네요."

# 뉴질랜드 영어, 영국 영어, 미국 영어
어떤 미지의 아저씨가 우리 팀에 뚜벅뚜벅 걸어와서 물었다.
"...그래서 이 브런치에서 이러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 브런치에서는..."
앨런이 미지의 아저씨의 말을 중단했다. "잠깐만. 브런치가 뭐야?"
미지의 아저씨: "브런치."
알렉스: "브란치."
앨런: "아, 브랜치."
미지의 아저씨: "브런치."
알렉스: "브란치."
앨런: "브랜치!"
미지의 아저씨: "도대체 키위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리고 셋은 어쨌든 '브런치'로 통일을 하고 평화롭게 대화를 계속했다. 괴로운건 나뿐이었다.
.........어떡해 계속 '브런치'만 들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섬세한 취미
내 멘토이자 책상 이웃인 알렉스는 매우 점잖은 영국 사람이며 한국인 부인을 두고 있다. 헌데 어느날 그가 팝에게 유리상자를 보여주며 뭔가 부탁을 하고 있었다. 개미가 든 유리상자였다.
"개미를 키우세요?"
그러자 그는 이 개미는 독일에서 수입해 온 것이며, 혈통있는 개에 보증서가 있듯이 이 개미도 보증서가 딸려 있으며, 본인 자신도 개미를 키우기 위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설명해줬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부인도 아세요?"

# 매니저
내 매니저인 팝 역시 매우 점잖은 프랑스 사람이다. 구글의 지오코딩은 이 사람을 믿고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으며 광범위한 지식과 초인적인 업무량과 그에 비례해 테이블 위에 첩첩이 쌓인 커피잔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 그런 팝이, 알렉스의 휴가기간 동안 며칠에 한 번씩 그의 개미상자를 들여다보며 세심하게 꿀 한 방울과 물 두 방울씩을 줬다.
아, 나는 내가 정녕 훌륭한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 감동할 지경이었다.

# 돕고 산다
원격 화상회의가 있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저녁 8시, 팝과 앨런과 나 셋만 남았다. 너댓 군데 오피스에 화상회의가 연결되고, 여러 질의응답이 오가고, 결정의 순간에 그들이 내게 물었다. "@#$!#$%@#$^@$%"
나는 옆에 있던 앨런에게 되물었다. "질문이 뭐였어?" "추가적인 트래픽이 필요하냐고."
덕분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을 하고 회의가 끝났다. 나보다 팝이 더 기뻐했다.

# 빔의 아버지를 만나다
누글러 트레이닝을 받던 첫 주. 자기소개도 없이 불쑥 강연을 시작했던 이 사람이 바로 빔의 아버지, 브람 물레나였다는 것이 강연 후에 밝혀졌다. 나는 중1때 가수 이적을 처음 실물로 접했을 때만큼이나 광분했다...!
"당신이 진짜 '그' 브람이예요?"
브람이 웃었다. "'그' 브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브람 맞아요."
다른 누글러 친구들이 뻘쭘해하는 가운데 나는 그와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았다.
'Happy Vimming! - Bram Moolenaar'

# 그런데
정작 브람 본인은 요즘 이클립스를 쓴다고 한다.

# 두들의 아버지를 만나다
여느 때처럼 밀리웨이에서 감동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휙 지나갔다. 나는 다시 광분했다.
"방금 데니스 황이 지나갔어!"
"그게 누군데?"
"잠만 그거 대답해 줄 시간 없어.. 아 어떻게 가서 말을 걸지 $@^@#$ 어흑 사라졌어"
그리고 나는 라이브러리로 쫓아가서 그에게 수줍은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그의 일정이 너무 바빠보여 차마 브람 때처럼 싸인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 격식있는 한국어
두들의 아버지 황정목씨와의 조우 후, 피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가 아까 옆에서 웃은 이유는 말이지."
"니네 웃고 있었어? 몰랐네."
"옆에 있던 한국분이 우리한테 통역을 해 줬는데, 네가 굉장히 격식을 갖춘 한국어로 점잖게 말하고 있다고 해서."

# 재색겸비
스페인 사람 루재가 자신의 친구인 한국 여자분을 데리고 불쑥 내 책상으로 찾아왔다. 마침 포니테일을 질끈 묶고 뿔테 안경을 쓰고 8단으로 나눈 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를 보고 그 친구분이 말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젊은 여자분이 구글에서 일을 하시네요."
"네 뭐, 전산 전공이거든요."
"세상에 공대 출신이신데 영어도 어쩜 잘하시고.."
"미모도 겸비했다는 말도 덧붙여주세요." ^^ 그분의 벙찐 표정이 생각난다.

# 금색 하이힐
내 책상 이웃인 스웨덴 사람 요한이 인천국제공항에 잠시 들렀던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 김치라는 것도 맛을 봤는데 말이죠. 솔직히 맛이 정말 끔찍했는데, 우리를 안내했던 한국 여자는 김치가 건강에 그렇게 좋다는거예요."
"네 한국 사람들은 김치 덕분에 사스도 피해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그 여자도 사스 얘기를 하더라니까요!"
그리고 그가 중요하다는 듯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를 안내했던 한국 여자가, 엄청나게도 차려입었었는데, 하이힐이 금색이었어요!"
...어쩐지 나랑 마주앉아 얘기할 때마다 내 구두를 쳐다보더라니 싶었다.

# 더이상 놀랍지 않아
요한이 다른 오피스에 출장을 다녀왔다. 알렉스가 물었다.
"어땠어요?"
"뭐 그럭저럭. 걔네 오피스도 좋던데요. 아 수영장이 있어요."
"괜찮네요."
"그죠."

# 번뜩이는 광고 재치
취리히의 어느 지역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안녕 구글 취리히! 근사한 휴게실도 갓 짠 신선한 쥬스도 스페이스 캡슐도 잠시만 잊어보세요. 한밤의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가 보다 극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팀웍을 고양시킬테니까. 분장실도 구경시켜줄게!!”
아니 이렇게까지 오라는데 못 갈 이유가 있나. 우리는  카피라이터의 재치에 감탄을 거듭하며 단체로 즐겁게 잘 보고 왔다.

# 새 인스턴스 (주: 워낙 구글 특화된 용어들이라 대충 비슷한 용어로 대체)
제프리의 아들 출산 소식이 이메일로 날아들었다.
"어제 저와 제 아내가 두 번째 인스턴스를 성공적으로 론치했습니다. 첫 번째 인스턴스보다 더 적은 자원을 사용하는군요. 서버 상태 양호. QPS는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팝이 재빨리 답장을 달았다. "오 축하합니다! 모니터링 그래프를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프리의 귀여운 아들의 인증샷이 따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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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제 블로그에서 구글과 검색 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피력하는 이야기를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앞으로도 그런 글은 올라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 그런 것은 공식 블로그에서 찾으시고. 저 자신도 얼마나 회사의 요모저모가 어썸리 어썸한지 자랑하고 싶지만, 제 수다는 여기서 일어나는 일상다반사만 얘기해도 바닥이 날 것 같지 않으니까요. ^___________^
얼마 전 규진이가 KTH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길래 이것저것 메일로 답해주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작년에 써 둔 후기를 이제야 올립니다. 취리히에서 직딩으로-_- 6개월을 더 살아보니 달리 보이는 것들도 있고 해서 주를 조금 달았습니다. KTH에, 혹은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에 교환학생을 가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8. 9. 15. 15:51

Ars Electronica (1/2)

일주일이 한 달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어쩐지 시간감각을 좀 잃었어요. 연락이 뜸하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근황을 한토막씩 쓰는 건 재미없을 듯 해서, 지난 주말에 다녀온 알츠 일렉트로니카 얘기에 간간히 썰어넣겠습니다.

아, 피터가 찍은 사진들: http://flickr.com/photos/skatey/sets/72157607205649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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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후 처음으로 그럴싸한 휴가를 냈다. 슬로베니아 친구들이랑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리는 'Ars Electronica'에 가기로 한 것. 아예 좀 놀다 오자 싶어서 주말을 끼고 5일짜리 휴가를 만들고 한 달 전부터 기차표도 예매해뒀다. 물론 나중에 종이 더미 속에서 찾느라 고생했지만.

창 밖 풍경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원 풍경은 언제나 그림같이 예쁘고, 똑같다. 익숙해진 풍경을 별 미련없이 외면하고 노트북을 펼쳤다. 성과 평가 기간이라 자기평가서를 써야 했다. 지하철처럼 혼잡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좁은 '자기 공간'을 느낀다고 하던데, 참 맞는 말이다. 저쪽 맞은 편에 앉은 여자분도 딱 나같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데, 혹시 구글에서 일하시나,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집중해서 자기평가서를 끝냈다. 반 년의 성과를 마무리하면서 떠나는 기차 여행이라니 참 시의적절하지 않은가. 아직 여정은 한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완만한 구릉지와 야트막한 숲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이적 3집을 귀에 꽂고, 참으로 이런저런 사념이 쏟아졌다. 여기서 만난 온갖 종류의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머릿 속을 왕왕 맴돌았다.

잘즈부르크에 들렀다. 사전지식을 준비할 여유같은 것도 없었지만, 실제로 내가 선호하는 여행 방식이 그렇다. 아예 작정했으면 좋은 가이드북을 사든지, 아니면 그냥 지도 한 장만 구해서 걸어다닌다. 독일어로 된 안내문들이며 교통카드 자동판매기까지 취리히와 비슷해서 편안함을 느꼈다.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에메랄드빛 강이 큰 산을 향해 흘렀고, 바람이 산 내음을 닮아 향긋했다. 막연히 크고 현대적인 도시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작고, 무엇보다도 무척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현대적인 것의 침략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따뜻한' 날씨와 밝은 햇볕에 들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노천 와인카페에서 와인 한 잔과 디저트를 음미하면서,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한동안 그렇게 늘어져있었다. 아, 이렇게 좋은 건줄 알았으면 휴가 좀 자주 다닐걸. 오스트리아의 별미라는 이 디저트 이름은 또 까먹었지만 아무튼 훌륭했다. 저녁 무렵까지 잘즈부르크 강변을 맴돌다 다시 린츠행 기차에 올랐다.

린츠의 숙소에서 느지막히 일어나 아침식사를 놓쳤다. 지도 한 장을 구해서 트램에 올랐다. 음, 도나우 강이 여기 흐르고, 중앙역이 여기에 있고, 여기에 중앙광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틀림없이 여기에 내 일용할 양식과 카페인이 있을지어다! 예상대로 도착한 그곳은 100미터 전방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노천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었다. 나의 탁월한 '독일어권 도시 여행 능력'에 혼자 괜히 뿌듯해하며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아싸 무선랜도 잡힌다. 아이폰으로 트위터를 한 줄 날렸다. "In Linz Austria. Hat einen kaffe und eis in der hauptplatz. Warte meinen freuenden. Well hope this sentence makes sense :D" 한참을 늘어져있다가, 다시 길 잃은 강아지모냥 또 열심히 쏘다니고 햇볕을 만끽했다. 피부 좀 타면 타라지. 취리히의 부슬비에 갇혀있었을 구글러 친구들한테 자랑도 할 겸.

조금 후 슬로베니아 친구들이 린츠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루블리아나에서 운전해왔다고 했다. 피터, 유레, 보슈티안, 카야. 카야를 제외하고는 다들 2년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다. 현재 Zemanta라는 벤처를 차리고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다. 피터는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다 최근에 디자이너로 합류했고, 유레는 에반젤리스트로 전세계의 컨퍼런스며 캠프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보슈티안은 초기 창업멤버 중 하나로 CEO였다가, 이쪽 경험이 많은 형에게 자리를 물려준 상태. 카야는 보슈티안이 최근에 채용한 대외협력담당 쯤 되는데, 슬로베니아의 텔레비전 스타라고 했다. 카야와 보슈티안이 프레스 명찰을 받으러 가고 우리 셋은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반 년 만인데, 모두에게 많은 것이 변했다.

"유레, 이제 정말로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삶이네. 멋진데. 기분이 어때?"
"그 장소에서는 대개 즐거워.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온갖 이야기들을 듣고 하는 것. 여행을 준비하고 이동하는 과정은 성가셔." 그리고 그는 한 다섯 가지쯤 되는 일화들을 죽 열거했다. 영국에서 환승기차를 놓치고 야간버스를 간신히 타고 새벽에 길 한 복판에 떨어진 일, 샌프란시스코 어느 공항에서 항공기 지연으로 밤샌일 등등. 피터가 스웨덴에 있던 유레를 방문했을 때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게 도착해 10월의 새벽에 짐을 끌고 라피스까지 걸어가야 했던 일화도 나왔다. "새벽 2시 3시쯤 되었을거야. 그 지역에 살아온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일이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 스톡홀름에서 나는 아무도 몰랐어. 그러니까 중요한 건 네트웍이야. 미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가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이지. 그냥 처음부터 시작하는거야."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어떻게 처음 그 시작점을 만들지?"
유레가 씩 웃었다. "나만큼이나 지루해하고 있는 듯한 사람을 찾아. 대화를 시작해. 이 대화를 듣고 흥미를 느낀 몇 사람이 동참하기 시작해. 그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군중 하나가 만들어져. 거기에 있던 사람들과 모두 안면을 트도록 노력하지. 이게 시작점이야."
"흐음, 그게 스웨덴에서 나한테 접근한 방식인거야?" 웃음. "아니."

Ars Electronica라는 행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미디어 아트 페스티발'인데,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디어 아트'보다는 뭐랄까 좀더 geeky한 면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미디어 아트 행사이고, 전시작으로 선발되기 위해서 매우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린츠에서는 이 외에도 다양한 문화 행사를 많이 개최되지만, 미디어 아트 분야에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매년 이맘때면 린츠라는 도시에 이목을 집중하곤 한다. 그리고 나처럼 geeky and artistic이라는 수식어에 혹한 사람들도 린츠를 찾는다. 행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설치예술인데, 간간히 세미나도 있고 라이브 퍼포먼스도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의 시가지에 20여군데의 크고 작은 전시장이 설치된다. 열심히 발품을 팔면 하루만에도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걸을 만한 거리이면서도, 도시 전체에 잘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배치였다.
"흥미로운 게 있으면 시간을 들여서 봐. 뭐든지 궁금한게 생기면 부스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5일 동안 내내 그 부스를 지키고 있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슥 훑어보고 지나갈 뿐이고, 따분하지. 관심을 보이면 굉장히 기뻐하면서 자세히 설명해줄거야."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카페인을 충전하고, 하면서 돌아다녔다. 저게 뭐지? 싶은 것들은 피터가 종종 설명해주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보면..

- 새들과 상호작용하는 새 로봇. 얼핏 봐서는 둥지처럼 생겼는데,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을 휘익휘익 낸다. 숲에 놓아두면 새들의 울음소리를 학습하고 그에 맞게 자기 울음소리를 바꿔나간다고. 실제로 숲에서 실험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어떤 새들은 몹시 경계하며 달아나는 반면 어떤 새들은 지속적으로 주변을 맴돌면서 상호작용을 한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네 개의 로봇이 놓여있었는데, 로봇들끼리 서로 학습하면 간섭이 생기지는 않는지 궁금했..으나 부스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 비누방울 하프. 금속으로 된 막대기들이 하프처럼 꽂혀있고, 그 앞에 손잡이 달린 상자가 놓여있다. 손잡이를 드륵드륵 돌리면 비누방울이 나오면서 금속 막대에 부딪히고, 이것이 전도체 역할을 해 소리를 낸다. 비누방울이 퐁퐁 날리고 랜덤하면서도 듣기에 나쁘지 않은 멜로디가 울려퍼지는, 동화적인 컨셉이 귀여웠다. 보슈티안이 모델을 하고 피터는 줄곧 사진을 찍었다.

- 콘크리트 테이블 악기. 콘크리트로 된 단순하고 우직하게 생긴 테이블이 조명 아래 놓여있다. 테이블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 멜로디가 흐른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멜로디가 달라진다. 보슈티안은 한동안 그 콘크리트 테이블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 이 테이블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어떻게 만들 수 없을까. 어렵지 않을 건데." 나중에 알아본 원리는 광섬유로, 테이블에 뚫린 작은 구멍들로 들어오는 명도를 인식해 멜로디를 조합하는 것.

- (비디오 전시작) 뭐라고 불러야 하지... 스크린에 얼룩이 하늘하늘 흘러다닌다. 손을 대면 이 얼룩이 손을 따라 팔로 번져나온다. 스크린 밖의 얼룩은 프로젝터로 투사한 것인 듯 했다. 이걸 보며 떠오른 것이 유시진의 클로저라는 만화였다. 한 세대마다 '초즌원(;)'이 있고, 이 초츤원은 팔에 문신 비슷한 산스크리트어 문양을 가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초즌원에게 역할을 넘겨주는 의식에서, 그들은 서로 손목을 잡고, 이 문양이 손을 타고 흘러가 전달된다. 내가 이 얘기를 했을때 보슈티안에게 누군가가 싱거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우리들의 초즌원이냐?" "당연하지."

- (비디오 전시작) LED 속눈썹. 단 하나 뿐이었던 우리나라 작품이다. 눈 밑에 붙이는 점점히 박힌 LED인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반짝인다. 비디오에는 이 속눈썹을 달고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자신(박수미 씨)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한국 여성들의 큰 눈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는 거라고.

- 벽면 전체에 그리드로 붙은 스티커. 떼어서 다른 곳에 붙일 수 있다. 뗀다라는 것 행위가 그리드에 자국을 남기고, 붙인다라는 행위는 새로운 자국을 만들어낸다... 는 건 그냥 내가 대충 둘러댄 해석이고 중요한건 여기에 한글로 선명하게 '카이스트'라는 자국이 있었다! 동경대가 올해 이 행사 초청대학이라 일본 사람들은 잔뜩 봤지만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더랬는데. 누군가가 카이스트에서 왔다 간 모양이다.

- (퍼포먼스) 유리로 된 상자 안에 텅 빈 표정의 한 남자가 앉아있다. 눈과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파란 물 자국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그냥 그린 건 줄 알았는데 애들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음독을 한 거라고 한다. "해독을 하느라 몸이 파란 물을 뱉어낸거지". 그날 저녁 블랙베리를 확인하던 누군가가 어떤 블로그 포스트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아티스트들의 자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나> 카야는 강한 인상을 받은 듯 했다.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봤는데, 어쩐지 압도되었어. 정말로 텅 빈,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었어. 한참을 쳐다봤어." 그렇게 말하는 카야도 어딘가 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난 얼굴에 파란 물 자국을 하고 유리 상자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몇 백명의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그 경험 자체가, 뭔가 엄청난 느낌일 것 같아."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
Ars Electronica (1/2)
Ars Electronica (2/2)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8. 9. 15. 09:04

Ars Electronica (2/2)

Ars Electronica (1/2)
Ars Electronica (2/2)

이틀의 발품을 팔고, 저녁에 시작할 불꽃놀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봐버린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일식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메뉴에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회를 발견했다! 세상에. 당장 회 1인분을 주문하고 오꼬노미야끼도 시켰다. 구글러들 중에는 인도, 베트남, 일본, 중국, 심지어 한국 음식에도 익숙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제만타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회초밥이 신성의 영역인 듯 했다. 젓가락 대신 포크를 가져다달라며 카야와 우르방이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했다. 그래도 좀더 미식 견문이 넓은 보슈티안이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어차피 들어가면 다 똑같아." 다같이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건데 인류의 문명이란 장소를 막론하고 참 공통점이 많다.;; 이런 표현에서까지.
내가 거들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정통 회초밥은 손으로 먹는대. 그러니 포크라고 안 될 거 없지."
"거봐, 우리는 문명인이라 포크를 쓴다구."
"그게 아니라... -_- 유럽에서는 물수건을 주는 문화가 없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보통 식당에서 물수건을 내놔. 식사 전에 손을 닦는 게 거의 습관화 되어있어."
"흥미로운데. 우리는 식기를 씻고 동양에서는 손을 씻는다라... 난 동양에 한 표."
"그래,  단지 관점의 차이야."
새삼 구글이라는 환경은 정말로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다 모여있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문명인'같은 표현은 나오지 못했을 터. 예를 들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그런 역사를 어찌 알겠나' 식의 뻔뻔한 반응이 아니라 잘 알지 못해 약간 주눅든 듯한 반응을 보인다던가 하는, 그런 분위기. 여전히 일에 관련해 뭔가를 의논할 때 '러시아어에서는 복수형이 이러이러하게 변형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국어에서는 복수형 변화 규칙이 한 가지이며 복수형을 쓰지 않더라도 별다른 혼동이 없다'라는 말에는 웃는 경우도 봤지만... 뭐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고 그냥 그동안은 전혀 듣지 못하던 예제가 나오니 무의식적으로 웃은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악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구글, 특히 국적 구성이 다양한 취리히 오피스에서는 정치적 공정성에 대해서 대체로 사람들이 민감한 편이며,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도도 높은 편이다.

"아 정말 횟집을 어디서 못 봤어. 회초밥이라면 구글에서 매주 나오지만. 야 이 회 진짜 입에서 녹는다." 나는 살랑살랑 '문명인'들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들 경악했다. "회초밥이 매주 나온다고?"  피터가 거들었다. "메인 요리만 여섯 가지가 넘고, 먹고 싶은 만큼 계속 가져다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이어진 구글의 각종 복리후생에 대한 이야기들... 보슈티안은 침울하게 말했다. "애들 노조 만드라고 부추기는구나."
그리고 나는 MapSearch팀에서 지난 여섯 달 동안 보고 들은 이런 저런 것들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용자들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우리 개발자들 자신은 코어 유저가 아냐. 예를 들어 지도 서비스 같은 경우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용례들이 잔뜩 있고, 가끔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이드이펙트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튼, 우리는 그 용례들을 다 알지 못해. 이 인식부터가 중요해."
"나 슬로베니아 지도 검색을 하다가 버그를 발견했어. 근데 신고할 링크가 없더라. 어떻게 신고해?"
"외부에는 직접적인 링크가 없고, 구글 내부에는 버그 리포팅 시스템이 있어. 보통 구글러들이 자기 주변에서 분개한 사람들로부터 버그를 받고 우리에게 리포팅을 해. 우리 팀에서는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 주에 새로 들어오는 버그들을 분류하고 할당하는 역할을 맡는데, 이 버그들을 보면 참 재밌어, 뭐랄까, 상당수는 그 케이스에 대한 설명만 건조하게 하고 끝내지만 가끔은 굉장히 상세하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런 식이지. '나의 더 나은 반쪽이 어느날 무슨무슨 호텔을 검색하고 있는데, 이 호텔이 그 근처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걸로 표기가 되어 있더라. 물론 이 호텔은 해변에 있지 바다 한 가운데에 있지 않다!'든지 '내가 요새 인터넷으로 뭘 좀 팔고 있는데, 나의 잠재적인 고객들이 계속 길을 잃어버리길래 봤더니 우리 집으로 오는 길이 막다른 골목을 돌아오도록 되어있더라. 그 길은 큰 벽으로 막혀있다니까!' 등등. 한 번은 잘못 분류했다가 리포팅 한 사람이 화를 낸 적도 있어. 무슨 무슨 주소가 잘못된 주에 속한 걸로 나온다길래, 데이터를 검색해보고는 '지역 주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저 주에 속한 주소인 것 같다.'고 분류를 했더니 몹시 분개한 메일이 날아왔어. '내가 세금을 내도 이 주에 내고, 우편물도 이 주의 우체국에서 날아오는데 무슨 소리냐!'라는... 얼른 데이터 오류로 다시 분류를 하고 잘 달랬지. 많은 경우가 맵서치 쪽 잘못이 아닌데 잘못 분류되어 온 경우야."
그렇지만 가끔은 감사의 편지가 구글러들의 친구들로부터 포워딩되어오기도 한다. 내용과 어조는 대략 이러했다. '나는 뉴욕에 사는 보행자인데, 안그래도 구글 지도 너무 잘 쓰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당신들이 론치한 '보행로검색' 완전 원츄! 새벽 2시에 차 끊기고 택시는 안 잡히고 안전하게 걸어돌아갈 길을 찾아야 할 때 그 막막함 알아? 완전 내 삶의 질을 바꿔놓았어! 당신들 너무 사랑해!' 음;; 보행로검색은 우리 팀 소관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걸 보면 좋은 서비스가 가져다줄 수 있는 삶의 질의 변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구글 지도의 버그인데 맵서치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이야?"
"구글 지도는 굉장히 큰 서비스고, 수많은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용자들이 보게 되는 그 페이지 자체는 프론트엔드팀이고, 백엔드에는 지오코딩을 담당하는 우리 팀, 비즈니스검색, 경로 검색만 해도 분류가 다양하고. 데이터베이스팀은 워싱턴에 있고, 프론트엔드는 마운틴뷰에 있고, 우리 팀은 취리히에 있고, 이런 식으로 전역에 흩어져있어. 버그들이 처음부터 적절한 팀으로 할당되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야. 계속 뜨거운 감자처럼 팀들 사이에 넘기고 넘기고 하다보면 제자리를 찾아."
"너한테 분노의 이메일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 없어?"
"세사미라고, 특정 나라들에 한해서는 사용자가 직접 지오코드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슬로베니아에는 아마 론치를 안했을거야. 왜, 힘 좀 써서 론치해달라고 할까?" 우리는 다같이 웃었다.

"다른 팀들이랑 연락은 어떻게 해? IRC 채널이라도 있어?"
"IRC라니 뭘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구글톡 써." 다시 한바탕 웃음. 그렇네 당연하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사실 IRC를 사용하는 팀들도 있긴 하다.;
"그리고 물론 이메일을 엄청나게 많이 쓰지. 물론 지메일이고. 음 또, 가상회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테크톡이나 회의에 자주 이용해. 영상 음성 품질이 굉장히 좋아서 원거리여도 거의 불편을 못 느껴."
"그렇겠지, 충분한 대역폭을 확보하고 있을테니까. 그럼 가상회의가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야?"
"가장 선호되는 방식은 당연히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하는거지. 우리 팀 같은 경우에는 관련된 프로젝트들 상당수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어서 보통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서 얘기를 해. 직접 얼굴맞대고 얘기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어. 테크리드급 이상의 사람들은 다른 오피스로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한 일이주씩 관련있는 팀이랑 같이 머물면서 싱크업 하는거야. 많은 논의들이 이 방식을 통해 민첩하게 진행되곤 해."
내 오꼬노미야끼는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먹은 회와 현미차의 입가심에 매우 흡족해하며 일어섰다.
"우리 결국 불꽃놀이 놓쳐버렸네."
"이것도 일종의 전통이야. 사실 매년 놓쳤어.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나면 이 시간 쯤엔 뭔가 먹어야 했거든." 보슈티안이 대답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오케이센트룸 옥탑의 클럽으로 갔다. 가득한 인파를 뚫고 무대를 보았다. 한 서른 다섯은 충분히 넘어보이는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흠 뭐, 그냥 평범하네. 노래를 끝내고 박수를 받은 후, 다음 곡을 준비한다면서 그가 꺼낸 것은 로봇과 그의 진가였다! 멀리 보기에도 서툴어보이는 솜씨로 그는 로봇을 연결하고, 심지어 맥북을 재부팅까지 하면서, 쉴새없이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일본에서 수입해온 로봇키트인데, 급히 조립하고 프로그래밍하느라 사실 오늘 4시까지 계속 코딩하고 있었는데, 주절주절. 그는 가수나 프로그래머로서보다는 코미디언으로서 재능이 있는 듯 했다. 한바탕 소동 끝에 마침내 그가 문제의 맥북으로 음악을 틀고 로봇을 춤추게 하고 그 자신도 로봇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리고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흐음, 데모의 법칙을 아는 우리들은 조금더 관대해 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재미있었으니까. 그리고 로봇과 함께 춤을 추는 감수성, 이 페스티발 전체에 떠돌고 있는 이 감수성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가 퇴장한 후 올라온 디제이는 빔프로젝터가 쏜 0101010101010111100이 가득한 배경화면을 뒤로 하고 진지한 미래지향적 음악 실험을 시작했으나, 여기까지는 우리의 감수성이 공감대를 찾지 못해 다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여행의 대부분은 거기서 끝났다. 나머지는 그냥 찌끄레기 버리지 못하는 미련에 쓰는 디테일. 그날 밤에는 한 군데의 바를 더 들러 맥주를 마셨고, 길을 잃고 한 시간이 넘게 걸어 숙소에 도착했고, 오렌지의 그지같은 커버리지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글로벌 로밍 신청을 안 했던 탓이었다. 다음날에는 커피와 그네와 함께 느릿한 오전을 보내고 나서, 슬로베니아 친구들은 먼 길 운전을 하느라 먼저 떠났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 그동안 '젊은' 친구들 쫓아다니느라 모자랐던 잠을 오후 내내 실컷 잤다. 친구들이 알려준 인디안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느긋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사실 너무 많이 먹었다 그때. 독일어권 티비는 역시 재미가 없어서 꺼버리고 책을 읽었다. 밤에 케이블 길이가 모자라서 전기장판을 못 틀고 자서 꽁꽁 언 채로 아침에 깨어났다. 숙소의 아침식사를 먹고, 제 시간에 기차를 탔다. 7시간 동안 자다 책을 읽다 자다 취리히에 도착했고, 노드제에서 생선샌드위치를 사서 짐가방을 끌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때 걸린 감기가 아직도 낫지 않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7. 10. 25. 01:21

공간: 시스템의 비유

숙제 아니면 생산적인(?) 글을 쓰지 않는 이 게으름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도 마감 독촉이 아니었으면 안 나왔을거라고 하니 그나마 위안을?;

이번 학기 <인류 문명과 건설>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건축가 김진애씨. 저는 이분이 첫 수업 시간에 화이트보드에 기다란 시간의 수평선을 그리실 때부터 홀딱 빠져서는 열심히 수업을 경청하고 있지요 히히. 이 과목 숙제로 제출한 에세이를 또 슬쩍 올려봅니다.

사족 1) 서론과 예의상 대칭을 이뤄줘야 할 결론의 분량이 빈약한 것은 배고픈데 식당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가서 얼른 마무리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가야 했기 때문입니당. ^^;;
사족 2) 아래 글을 보시다 보면 입실론 같은 것을 기묘하게 부르고 있는 걸 발견하실텐데 그건 나름대로 비전산인(?) 독자를 향한 배려라고나...
사족 3) 에세이에선 이론만 실컷 만들어놓았고, 이걸 실제 SF영화에 적용해 본 사례 연구는 에세이엔 없고 PPT에만 들어있습니다. 이것도 밥 때문인데..;; PPT는 다음 기회에...^^;;

아무튼 독특한 내지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감상의 포인트를 그리 잡아주시고... 늘 부족하지만 즐감해주세요 ^^

 
블로그가 배고프다고 낑낑대서 오랜만에 포스팅 좀 하러 왔습니다. ^^;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디자인과 생활> 과목 숙제로 쓴 final essay입니다. 부족하지만 그저 즐감해주세용~ ^^


Ideo Design: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여는 말
지난 가을 나는 스톡홀름의 KTH에 있었다. 그 예쁘다는 유럽에 가서 여행도 사절하고 학교에 콕 눌러앉아 교환학생답지 않게(?) 빡빡한 과목들을 수강하며 숙제로 괴로워하고 있던 나날들 속에, 아무래도 가장 큰 기억을 남긴 것은 <Human Computer Interaction: Principles and Design>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인간 컴퓨터 상호 작용에 관련한 기본적인 이론을 습득하고, 과제로는 조별 프로젝트로 실용적인 실습[1] 을 주로 했다. 고되었지만 과제도 시험도 무사히 치러 내 뿌듯했고, ‘전공자만큼 깊이 이해하지는 않아도 이젠 나름대로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할 거리가 생겼겠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환학생의 여정을 끝내고 대전에 돌아왔을 때 여유로운 마음으로(?) 제출한 나의 첫 번째 숙제는 다음과 같았다.

“My idea of Design can be summarized as a way of communication, by which a designer and users and the product itself can interact.”

그리고는 그 <Human Computer Interaction>을 같이 수강했던 친구 Jure에게 자랑스럽게 완성된 PPT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친구가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설명하고 있는 건 user-centered design process야. 유럽에서의 6개월이 네겐 아무 쓸모가 없었구나!”
 
HCI 수업에서 같은 조 멤버들과 함께 (사진 제공: Nasim Mahmud)

HCI 수업에서 같은 조 멤버들과 함께 (사진 제공: Nasim Mahmud)



1.    Design:  디자인, 디자이너,, 그리고 엔지니어
석 달 전까지 시험 범위라고 줄을 그으며 읽어댔던 Donald A. Norman의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나 조별 프로젝트를 하며 다루었던 여남은 가지의 방법론들은 일단 잊기로 했다.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와 수업을 경청했다. 이건표 교수님의 다채롭고도 풍부한 강의는 들으면 들을 수록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개념들을 느꼈고, 그럴 수록 살짝 부끄러워졌다.

“디자인은 fashion도 style도 drawing도 아니다.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가시적/비가시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는 것 자체도 역시 디자인이며, 이것이 사실은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내 숙제에서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교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디자인은 내가 위에서 말한 의사소통의 수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을 정의하고, 때로는 발견하며, 해결해나가는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개념인 것이다.

“공학 또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협력은 항상 어렵다. 디자이너와 잘 협력하는 법을 익혀라. 디자인의 넓은 개념을 이해해라. 여러분이 하는 일은 모두 디자인이다.”

나의 짧은 견문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협력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NHN에 합병된 검색회사 ‘첫눈’에서 4개월 간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에도 기획자(디자이너)와 개발자(엔지니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던 것 같다. 웹프로그래밍을 5년이 넘게 해 온 한 개발자 분은 지난 회사에서 수시로 바뀌는 디자인에 따라 코드를 되풀이하여 고쳐야 했던 고충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검색 모델의 개선에 관여하고 있던 한 기획자 분은 개발자들의 기술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워 논의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 종종 열리곤 했던 각종 세미나에서, 개발자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재귀recursion’이라는 개념을 기획자들이 이해하지 못해 개발자들이 진땀을 빼며 설명하던 적도 있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실질적으로 구현이 가능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의 작은 차이가 기술적으로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짜야 기술적으로도 효율적인 설계가 나올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디자이너들이 데이터베이스와 운영체제, 대규모 시스템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방책이겠으나, 그것이 어렵다면 엔지니어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친구 Jure의 초대로 슬로베니아의 오픈소스소프트웨어 커뮤니티 Kiberpipa[2] 에 방문하여 2주간 함께 활동하면서 나는 이 원활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실마리를 엿보았던 것도 같다. 이곳에서는 오픈소스 개발 뿐만 아니라 여러 아티스트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협력하여 흥미로운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실체화하는 데에 있어 의사소통의 벽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티스트들은 엔지니어의 기술적인 관점에서부터 나오는 의견을 적극 수용했고, 엔지니어들은 아티스트의 의도를 최대한 구현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루는 류블랴나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한 아티스트의 작업을 도운 일이 있었다. Space Junk Spotting[3] 이라는 프로젝트였는데, Saso라는 아티스트가 아이디어와 기본적인 스케치, 반 년 간 개발한 미완성의 구현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완성시키고 시스템의 다른 부분에 연동하여 실제 전시장에서 3개월간 작동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전시회의 시작까지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 조금 촉박해 보였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다.
여기서 Saso와 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Bostjan의 활약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Bostjan이 한 일은 먼저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예술활동(?)에 참여해보고픈 나의 소망을 이해하고, 나의 프로그래밍 실력에 대해 비록 구두로였지만 확인하고, 현재 커뮤니티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곧바로 Saso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다소 추상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설명을 듣고 이것을 엔지니어인 내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전체 시스템의 구조를 깔끔하게 그려내어 Saso와 내가 같은 mental model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Saso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마감 순간이 다가와 초조해하던 Saso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두 시간 정도면 완성될 것 같다’고 말했고 Bostjan은 ‘개발자들이 저렇게 말할 때는 이틀 정도를 의미하니 그냥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게 좋겠다’라고 친절히(?) 귀뜸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작업은 정말로 두 시간 만에 끝났고 초조해하던 Saso와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저녁 전시회의 오프닝에서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한국에서 온 천재 해커 소녀’ 취급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 물론 Bostjan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순탄치 못했을 작업이었다.
Bostjan은 Kiberpipa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프로젝트에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커뮤니티에서 그가 필수적인 존재임이 내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회사에서도 그러한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극히 적었음에도 그들은 IT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연결하여 실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혹여 없더라도,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상호적으로 노력하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간극은 조금 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pace Junk Spotting (사진 제공: Saso Sedlacek)



2.    Ideo Design:  컨셉디자이너와 Google
한때 ‘컨셉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기계과에서 개설되는 <인간과 기계>라는 과목에서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을 쓰며 이 가공의 직업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바를 적어보았었는데, 이 자서전의 일부분을 여기에 붙여본다.

“제품은 그 제품 하나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어떤 부분에 자리잡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지 등등, 그 제품을 둘러싼 주변의 문맥까지가 모두 제품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간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진 제품은 그 자체가 이미 환상이며 꿈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닌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컨셉디자이너는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잡는 것을 돕는다. 제품의 기능, 외관 디자인에서부터 광고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이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회사의 경우도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빼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한부의 고용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살고있는 현대에, 회사 전체가 한 마음이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가슴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컨셉디자이너는 먼저 그 회사의 사람들, 중역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를 두루 만나보며 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 등을 파악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병행하게 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표점, 그들 모두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이상이자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지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획자나 경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경영 컨설턴트, 통계학자, 종종은 심리학자들까지도 동원된다.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는 각본이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고, 한 줄의 카피가 되어 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고, 그림이 되어 건물 전체의 외벽에 도색되기도 한다. 좌우간 회사 전체의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 <인간과 기계> 과목 숙제로 제출했던 본인의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 중에서

디자인과 생활 수업을 듣고 이제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가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그려 보고자 했던 것은 바로 Tiger의 Four Pleasures 중에서 Ideo라는 측면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개인적인 자기정체성과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 주도적story-driven 디자인. 개인의 특질을 존중하고, 개인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흐름일 것도 같다.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예로 드셨던 Apple사가 단연 이 Ideo Design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나는 내 인생에서의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졸업 후 Google의 취리히 연구 센터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할 계약을 맺은 것이다. (덕분에 20년 뒤에 내가 ‘컨셉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었다) 지인들로부터 축하와 격려와 염려를 동시에 받으면서 나는 ‘전산학도에게 Google이 멋진 직장임엔 틀림없지만, 전산학과가 아닌 사람들마저 내 취직 소식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보았었다. 단지 주변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취업 대상이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한 요인으로 Google이 그 동안 대중들에게 보여온 비전을 꼽으려 한다. 먼저, “Don’t be evil”이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모토에서부터 시작한, 외부의 정치력에 휘둘리지 않고 사람의 수작업으로 오염되지 않을 순수한 기술에 대한 그들의 포부가 사람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애정을 심어 준 까닭이다. 거대한 포탈 서비스를 옆에 끼고 수익 모델을 고안하는 여느 검색엔진들과는 달리 순수하게 검색에만 집중하여, 사람들을 그다지 성가시게 하지 않는 소박한 몇 줄짜리 광고로 돈을 벌겠다는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관성 있게 지켜 온 단순명료한 인터페이스와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로고 디자인 또한 점점 복잡다단해지는 웹 환경 속에서 피로해져 가는 사람들의 눈을 자연스럽게 길들이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해왔을 터였다. 채용에 있어 길게는 14회까지 걸쳐 진행된다는 강도 높은 기술 면접, 엔지니어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와 창의적인 사무실 분위기 역시 기술에 대한 그들의 고집스러운 애착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9년의 세월에 걸쳐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오늘날 Google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움직이는 Google의 이러한 ‘이야기’ 역시 Ideo Design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형적인 구글의 인터페이스 (http://www.google.com/에서 캡쳐)

전형적인 구글의 인터페이스 (http://www.google.com/에서 캡쳐)



닫는 말
내게 <디자인과 생활> 수업은 디자인의 귀중한 원리와 원칙들, 디자인을 둘러싼 각종 생각할 거리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여러 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 디자이너로서(혹은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 그리고 인생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교훈 몇 가지를 얻은 참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 마지막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developmental tasks가 몹시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교수님께서는 30대까지는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기본적인 기교를 연마하고, 40대에는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며, 50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조직을 이끌거나 좋은 책을 쓰거나 하여 사회 기여에 이바지하는 등, 사람에게는 나이에 걸맞게 따라가야 할 단계적인 성장 과정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40대 이후에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까, 애매하게 흩어져 있던 생각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이 되기 위해 어떠한 것을 다듬어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이 수업에서의 소중한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나아가려 한다.


[1] 실습 과제로는 heuristic evaluation, rapid prototyping, usuability test 등을 주로 다루었다.
[2] Kiberpipa, <http://www.kiberpipa.org/>
[3] Space Junk Spotting,
<http://www.sasosedlacek.com/anglesko/projects_Spacejunk_eng.htm>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6. 11. 4. 08:02

말, 그리고 생각들

"Maslow's Triangle을 생각해 봐. 네가 뭔가 기분이 나쁘면 체크해 봐야 할 리스트가 있어.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밥을 제대로 못 먹었나? 샤워를 안 했나? 어디가 아픈가?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는거야. 친구들이랑 주기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 단계를 체크하고 이런 식으로. 이건 bottom-up이야. 피라미드의 아래쪽이 없는 상태에서 윗쪽을 먼저 채울 수는 없어. 뭔가 대단한 걸 이루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 그럼 너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거야. 그건 치팅이야."

유레가 했던 말. 사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들은 당연한 말인 거 같은데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걸 잊고 살았다. 학교 공부에 매진하고 동아리 프로젝트에 매진할 때면 잠을 세 시간을 자건 밥을 거르건 방이 난장판이 되건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생활의 밸런스가 깨져있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깨달았지만, 그건 치팅이었던 거다.

그리고 또 떠오른 생각.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게 사실 별 거 아니야. 의식주 적당히 해결하고, 예쁜 마누라랑 아이들이랑 살고, 결국은 그거면 되는거야. 사회적 성공이니 뭐니 하는 건 사실은 진짜 행복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야' 라고 말했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지만 갑자기 이 친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긴 것 같다. 기본적인 욕구 - 의식주와 가정 등 - 가 충족되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건 물론 허상이지만, 그런 기본적인 욕구가 또 행복이라는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도 사실은 대단히 어렵지만, 그게 충족되고 나면 다음 단계의 더 큰 욕구가 있고 이걸 충족해나가는 게 또다른 행복이 되는 것 같다고. 하긴 그 친구에게는 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나름의 논리가 있는 거겠지만서도.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가 뭘까. 타고난 능력의 차이일 것 같지는 않잖아. 내 생각은 그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계획성없이 소모해왔던 사람들이야. 즉각적인 욕구만을 충족하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뤄온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 희생하면서 우선순위를 매겨온 사람들이야. 이를테면 나는 요즘 테드톡 보는 게 너무 재미있어. 그냥 이거나 하루종일 보고 싶어. 그렇지만 자, 나는 숙제를 해야 하고 내 프로젝트들을 해야 하니까 조금만 보고 차후로 미뤄두는거야. 그런 희생이 결국은 내 미래를 만드는 거니까."

이것 역시 지극히 정석적인 말이지만 늘상 스티븐 코비의 3사분면에 매달리고 있거나 4사분면으로 도피하곤 하는 나에게는 또 몹시 찔리는 얘기였다.;;


"내가 파티에 열광하는 건 사실 외로워서예요. 나는 사람들하고 끊임없이 만나고 얘기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이렇게 타지에 와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거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지 않아요?"
"글쎄...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 인생은 항상 외로웠거든요. 오히려 여기서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것 같아서 덜 외로운 편이랄까요."


살로메와, 줄리아 남자친구의 대화. 옆에서 설거지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얘기에 슬쩍 웃음이 났다. 나도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된게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다'라는 거였으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빈 시간들을 온통 친구들과의 수다로 보내왔던 나는 대학 초년에는 하루를 수다로 정리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남자친구에게 모든 일상을 보고하며 살기도 했고, 때로는 사람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시러 다니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혼자 있는 것 자체를 즐기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잘 되고 있는 건 아니고, 그게 어떨 때는 지금처럼 쓸데없이 긴 글을 쓰는 걸로 분출되기도 하지만. 하하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에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에서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몫인 거라면, 인생이란 게 원래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을 수 있겠지. 오히려 우연히 다른 위성과 조우하게 되는 그 드문 이벤트를 더욱더 소중하게 반길 수 있을지도.
아무래도 학기 중보다 요즘이 더 정신없는 것 같네요. (그땐 글 쓸 시간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_-) 그래도 짤막하게라도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 2005년 나의 5대 키워드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_-)


1. SPARCS, 스팍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1년동안 스팍스의 회장을 맡았습니다.
뭐 힘들 때도 많았고... 임기가 다 끝난 지금에서도 차근차근 돌이켜볼 기운도 없을 만큼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지만요.
2005년 한 해가 제 지난 21년 중의 그 어떤 해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운 해였던 것은 아마도 여기에 크게 기인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없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은 오버고) 여튼 뭐 구구절절한 얘깃거리들이 많지만 잘 숙성시켜두면 언젠가 잔뜩 늘어놓을 때가 오겠지요.
일단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

2. Star Wars
(...갑자기 분위기 반전.)
(여기서부터는 좀 어처구니가 없으실지도-_-)
영화라는 것은 '데이트를 하다하다 정말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나 돌아다닐 기운이 없거나 화젯거리마저 떨어졌을 때나 보는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제가 갑자기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그후로 클론워즈를 포함한 스타워즈의 모든 에피소드의 섭렵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노블라이즈 오디오북을 지른다던가 캘린더를 지른다던가 하는 주책을 비롯하여 Dark lords of the sith 등의 각종 외전까지 들이파고 있는 지경입니다...
-_- 웬만하면 발을 들이지 마시길 권유드려용.;

3. Ewan McGregor
(앞의 주책과 연결됩니다.)
제가 스타워즈에 그토록 빠지게 된 이유는 다 이 망할 스코틀랜드 배우가 연기한 오비완 때문이었습니다. -_-
그 후론 이 사람의 필모그래피에 줄 그어가며 출연작들을 챙겨보고 있지요. 본 것들을 나열해보자면 대략...
스타워즈 에피소드 1,2,3
물랑루즈 (The Moulin Rouge)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
쉘로우그레이브 (Shallow Grave)
엠마 (Emma)
Solid Geometry
아일랜드 (The Island)
빅피쉬 (Big Fish)
다운위드러브 (Down with love)
벨벳골드마인 (Velvet goldmine)
영아담 (Young Adam)
로봇 (Robots)
인질 (A life less ordinary)
스테이 (Stay)
Little voice
겜블 (Rogue Trader)
정도 되겠습니다. 어 생각보다 별로 안 많네요? 다운받아 놓은 것들 마저 봐야겠습니다...-_-

4. The Moulin Rouge
(역시나 앞의 주책과 또 연결됩니다.)
화려함. 스타일. 현대적인 아름다움. 소비되는 문화. 거대한 문화 산업.
두서없이 썼는데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받은 충격(?)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습니다.;
뭐 오비완 했던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길래, 그것도 로맨스라길래, 그 길고 긴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챙겨본 영화였는데 그 효과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전 사실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로는 티비도 거의 안 봐서, 요즘 엠넷같은 걸 보면 눈이 뒤집히고 그럽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티비프로그램'에서 저렇게 스타일리쉬한 화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펑펑 쓰게 된거지?! 내가 중학교 때 한창 방방 뜨고 있던 틴에이저 댄스그룹들 - 이를테면 신화 같은 ^^; - 은, 그 어리고 비슷비슷하고 시시하기만 하던 멤버들은 언제 또 저렇게 근사한 녀석들로 큰 걸까!! 뭐 이렇게 절규하고 있지요...;;; 화면 가득 살아숨쉬는 캐릭터들.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인 매력들. 그리고 그걸 잘 표현해주는 무대와 연출. 매일 보는 사람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전기 안 들어오는 촌구석에서 몇 년 틀어박혀있다 온 사람처럼 신기하기만 하네요-_- 이런 정도니 처음에 물랑루즈를 보고서는 그냥 넋이 나갔다고밖엔...
유안 맥그리거의 노래. 춤. 연기.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거의 7월 한 달 정도를 물랑루즈에 빠져 지냈던 기억이 나요. OST를 듣고,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외국 팬사이트 뒤적거리면서 촬영 에피소드라든지 패러디라든지를 읽으면서 킬킬거리고, 그것도 아쉬워서 영화에서 소리만 따서 MP3로 만들어서 듣고 다니고... -_-
(이런 걸 쓰고 있으니 저 스스로도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한 건가!!'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크윽;;)

5. John Maeda
(아 이젠 좀 정상적인 이야기... 일까요?)
미디어랩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 사람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존 마에다, 간단히 소개하면, 컴퓨터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래요. 이 사람이 쓴 Maeda@Media란 책, 꽤 감명깊게(!) 읽었고요. (보시면 알겠지만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입니다; 다는 못 읽었지요-_-) 덕분에 미학이라는 것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음, 여기에 대해선 앞으로도 꾸준히 탐구를 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습지요... ^^
여기에서도 또 역시나 '들이파기 신공'을 동반하여... 미술사라든지 철학이라든지 쪽의 책을 사재기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접어두고... -_-



정리하자면 동아리일로 좌충우돌 진로 문제로 질풍노도에 관심가는 쪽은 가리지 않고 별의 별 데를 다 들이판 한 해...였습니다.
동아리일 덕분에 리더쉽이라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어설프게나마 경험해볼 수 있었고요.
진로... 내가 앞으로 어떤 분야를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고민은 많았지만 아직도 답은 못 냈습니다. 이제 4학년인데 창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후진국일수록 학생들이 진로를 빨리 결정한다'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으며...-_-;;;

이걸 보고 있으면 '당신 전공 공부는 안하냐!!'라고들 생각하실터인데-_- 음 LKIN과 학과 공부 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긴 하네요.; 사실 그 겨울에 저는 1년치의 배울 것을 다 배워버린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그 겨울의 세미나와 프로젝트 덕분에 소프트웨어공학개론이라든가 전산망개론이라든가 데이터베이스개론 같은 과목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거든요. 아 그래 저런 이슈가 있었지! 그래 저것 때문에 내가 고민했단 말이지! 우오오오 말로만 듣던 그 xxxxx를 내 손으로 구현하는 영광이!! 하면서요. ^^; 리더쉽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고민도 상당 부분은 LKIN과 관련된 것들이었네요.)

어쨌든... 후반부에 가서는 거의 전공과 상관없는 짓들;에 골몰해 있었는데, 전공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제겐 좋았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그 순간순간이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전 주로 '해야 하는 일'들만 생각했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기는 것은 항상 뒷전이었던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책임감 내지는 성실함이겠지만...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 지를 아려면 하고 싶은 것들을 즐겨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동안 스스로에게 그런 여유를 주는 것에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그걸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되도록 행동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마음가는대로 끌리는대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려고 해요. 지금 아무리 재고 따져봤자 나중엔 다 틀릴 거거든요.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게, 결국은 최선이 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즐겨보렵니다.


뭐 짧게 쓰겠다고 시작했는데 점점 길어져버렸네요. 어쨌든,

2006년도 열심히 즐겨보겠습니다! 잇힝♡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1. 28. 09:57

성공적인 KAIST 생활

또 <인간과 기계> 숙제입니다. -_-;;; 방금 구운 따끈따끈한 것.
성공적인 KAIST 생활이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예요.

지금은 오전 7시 22분, 스팍스 동아리방. 50평 남짓 되는 공간을 가득히 채운 형광등 불빛, 유쾌하게 웃으며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밤을 지새운 새벽이라는 걸 까맣게 잊게 된다.

LKIN screenshot - 강의평가 내역

방금 전까지도 나는 동아리에서 진행하고 있는 핵심 프로젝트, LKIN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LKIN은 Lecture Knowledge IN의 약자로, 수강지식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교의 모든 수강 과목들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이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다음 학기의 시간표를 미리 짜 볼 수 있고(그것도 대단히 편리한 UI를 통해서 말이다), 과목에 대한 알찬 정보들을 열람할 수도 있으며, 게시판과 자료실을 통해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다. 강의에 대해서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는 ‘로드, 학점, 남는 거’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별점을 매기는 것도 가능하다. 지난 겨울부터 착수해서 3월부터 베타 서비스를 선보였던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꾸준한 업데이트와 개발을 거쳐 어느 덧 1900명이 넘는 가입자를 유치하는 사이트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며칠 전 학생들이 고대하던 대로 드디어 교무팀의 강의평가 자료가 공개되었을 때, 총학생회가 이것을 제일 먼저 우리 LKIN 개발 팀에게 전달해 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늘 저녁, 그러니까 10시간 쯤 전, 우리는 총학생회로부터 강의평가 자료가 담긴 엑셀 파일을 받아들고 회의를 했다. 이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가공해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LKIN으로만 수십 번쯤, 동아리 회의까지 합친다면 골백 번은 이렇게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해 본 적이 있던 멤버들이라 진행은 순조로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과목사전 페이지에 강의평가 내역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집어넣자, 홍보 겸 강의평가 공개 기념 겸 해서 iPod nano를 걸고 이벤트를 하자, 이렇게 할 일들의 목록을 뭉게뭉게 정하고 나서 의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이 작업들을 언제 할 것이냐?

“그냥 오늘 밤에 끝내버리죠?” 한 녀석이 이렇게 말했고,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다. 강의평가 자료는 무사히, 그리고 아름답게 LKIN에 편입되었고, 경품 이벤트를 위한 로그 처리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처음은 아니다. 이렇게 하루의 밤을 활활 불태워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학교 때, 그리고 고등학교 때, 두 차례에 걸쳐 KAIST의 영재캠프에 참여하면서,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차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KAIST에 가면 매일 밤새서 프로젝트도 하고 하루종일 학문에 관한 이야기로 입씨름도 하면서, 열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꿈에 어느 정도 가까운 경험을 겪어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어느 정도 가까운’이라는 말을 쓰냐면, 사실 매일같이 밤을 새면 곤란하지 않은가. 이런 경험은 가끔이면 충분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동아리 프로젝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그만큼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이 성공적인 카이스트 생활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학할 때부터 선배들로부터 닳도록 들은, 대학 생활에서 꼭 잡아야 한다는 세 가지, ‘동아리, 연애, 학점’ 중에서도 동아리는 벌써 첫 번째로 꼽히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속한 이 컴퓨터 동아리, 스팍스의 활동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녹아들어 있다. 학업, 진로 설정, 인간 관계, 취미 생활 등등. 먼저 학업진로 설정에 대해. 이곳에는 시스템프로그래밍 동아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산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고, 전산에 관련된 학술 활동 또한 활발하다. 각종 세미나와 프로젝트를 통해 전산에 대한 여러 가지 주제들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전산이라는 분야 내에서도 또 자신이 갈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인간 관계이다. 뭐 이에 대해선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과 나누는 정겨운 술잔 속에 피어나는 애정..... 아, 내일 회의 끝나고 나면 술 마시러 나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생산적인 여가 활동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상당수는 여가 시간을 온통 게임으로 보내곤 한다. 물론 우리 동아리에도 게임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더 열렬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생산적인 여가활동 한다! 리눅스 서버를 가지고 여러가지 삽질을 하는 건 오랫동안 우리 동아리의 훌륭한 취미 생활로 권장되어 왔다. 처음에는 자기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더 나아가선 ara와 ska라는 비비에스 시스템을 운영하고, FTP 미러링이나 뉴스 서버 관리를 하기도 하고, LKIN과 같은 프로젝트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컴퓨터만 하다가 ‘전형적인 전산인의 체형 – 인격이 강조되는 몸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요 농구클럽이라든지 인라인타기 모임 같은 운동 소모임들도 있다.



팔불출처럼 동아리 자랑만 늘어놓았지만(사실 1년 동안 동아리 회장 + LKIN 팀장을 하며 감동받은 순간이 많다 보니 자랑이 길어져버렸다) 정리해보면 나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단 학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 여기서의 학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점이라는 수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본기를 닦아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업에 학과 과목 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실질적인 경험이 동반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주로 동아리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얻었지만, 동아리 말고도 아르바이트나 인턴 등의 기회도 많을 것이다. 둘째는, 인간 관계이다. 앞으로 학문을 함에 있어, 또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들을 얻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동아리 사람들일 수도 있고,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일 수도 있고, 교수님일 수도 있다. 연애라는 것도 일종의 인간 관계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셋째는, 인생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다. 자신이 평생동안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그 청사진의 일부이고, 또한 삶에 지칠 때마다 자신을 충전해 줄 멋진 취미 생활을 찾는 것 또한 그 일부일 것이다.

3학년도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나는 얼마만큼 성공적인 카이스트 생활을 하고 있을까? 자문하면서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 위에서 부지런히 언급한 LKIN은 http://lkin.kaist.ac.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LKIN screenshot - 과목사전 목록의 강의평가 파라미터 (배터리 잔량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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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의심없이 50평이라고 썼는데... 가물가물하네요. 우리 동방이 몇 평이드라-_-;;;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1. 6. 03:14

10월 15일

넵... 요사이 주말마다 찾아오는 '글쓰고싶다병'이 또 도졌습니다.;;;

지난 번에 올린 연애편지(?)의 뒷이야기입니다. 물론 픽션입니다. 픽션의 속편은 픽션을 상속받은 것이므로 픽션.... (풉)
이것도 숙제냐, 그건 아니고 그냥 지가 괜히 궁금해서 써 봤습니다. -_-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저런 편지를 받고 나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고등학교 남학생의 심리묘사라니 고거 한 번 재밌겠구나!!

등등등...
잘 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나면 쪽팔려하면서 지워버릴지도...;;
아 제목은, 편지를 받은 계절이 대략 그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붙여본 거구요.

그럼 즐겨주세요. ^^;

상욱이 담배를 꺼내물더니 말했다.

"네 소설에 나오는 너랑 찐하게 섹스하는 남자, 영훈이는 정훈이 맞지? 내가 아니지? 정훈이랑 그런 관계라는 거 지금은 이해해줄 수 있어. 난 너하고는 키스밖에 안 했잖아. 뭐라고 해야 할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나는 널 정말 사랑했는데 소설에는...... 왜 내가 너를 겁탈하는 거처럼 나오니? 그건 정훈이 아니니? 근데 또 이핼 할 수 없는 게 캐릭터를 보자면 영훈이란 남자는 나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게 뻔한데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니? 난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야."

소설은 허구야. 거짓말이라구. 이미지는 이번에는 이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상욱과는 두 번 키스를 했지만 정훈과는 키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신 이미지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소설의 캐릭터들은 분명 어떤 모델들로부터 창조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사람의 특징들이 모자이크처럼 합성되는 거라고. 다만 자신이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실제 인물들은 소설에서 단순히 몇 가지 일치되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모델로 이용했다고 분개하기도 감동하기도 한다고. 이미지가 상욱에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자 상욱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 소설가들처럼 불쌍한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자신의 과거와 사생활마저도 대중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야 하다니. 사고로 죽은 아들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지도 못하고 결국 소설로 만들어내는 어떤 작가를 보고 참 작가들이란 무서운 존재들이구나 싶었어. 널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야. 나는 백 번 널 이해해줄 수 있어. 널 한때 되게 좋아했었고 세월도 이렇게 흐른 마당에, 인생이 뭐 별거냐. 다 이해해줄 수 있어. 너도 그게 직업 아니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상욱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눈빛에 연민이 서려 있다. 이미지의 속에서 뜨겁게 뭔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술기운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야, 좀 문제가 생겼어. 난 그렇다고 쳐. 우리 마누라 때문에 말이지."

상욱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더니 좀 비굴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마누라, 너하고 연애한 거 실제보다 더 심각한 걸로 예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거든. 아마도 예전부터 클럽에선 우리 생각보다 더 찐한 소문들이 나돌았나봐. 네 소설 나오자마자 사서 읽더니 어느 날 펑펑 우는 거야. 내가 진실하지 못했다는 거지. 거짓말했다는 거지. 에전에 마누라 꼬실 때 마누라가 묻더라고. 이미지 선배와의 일 알고 있다고. 내가 그랬지.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이번 소설 읽고는 날 이제 믿을 수 없다고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라. 사실 요즘 며칠째 냉전중이야. 이런 얘기 너한테까지 하기엔 뭐하다만 사실 내가 그 동안 사고치고 조용해진 지 몇 달 안 되거든. 껀수 잡은 거지 뭐. 그래서 말인데...... 어이 참 미안하다야."

상욱이 거칠게 술을 입에 털어넣으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러길 바라지만...... 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다면, 언제 네가 우리 집사람에게 진실을 좀 밝혀주면......"

- 권지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에서

이렇게 막 가져다가 타이핑해도 되려나요... (안 되겠지요-_-) 그렇지만 그냥 요즘 생각하던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서, 가지고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한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각자 구해서 읽으라면 아무래도 귀찮아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어쨌든 멋진 책이니까 정말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사서 보세요. ^^ [꽃게 무덤]이라는 책입니다.

어떤 책... 아마도 제목이 '서른'이었나 '서른 둘'이었나 '서른 셋'이었나 하는 책이었는데요. 책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겉장에 이런 요지의 말이 쓰여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창작된 허구의 인물들이며, 혹시라도 현실의 누군가와 닮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저 위의 소설에서 하고 있는 얘기와 비슷한 맥락이지요. 작가는 미리부터 걱정하는 겁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소설 속 인물들을 작가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과 동일시하려 하고, 그로부터 여러가지 오해가 싹트는 것을요. 막 잔뜩 소심해져서는 저런 문구를 책 겉장에 써넣고 있는 작가의 기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 내가 이런 쪼잔한 말까지 써야 돼? ㅠㅠ' 하면서요...;;;

소설가는 거짓말쟁이라고들 합니다. 거짓말을 잘하면 잘할 수록 훌륭한 이야기꾼인거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너무나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걸 진짜인 것으로 믿어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할겁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그쯤 되면 작가는 혼란스러울 겁니다. 자기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사람들의 오해섞인 눈초리에 슬퍼해야 할지.
위의 소설 속 이미지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권지예가 아니라, 이미지가 이렇게 말한 겁니다.) '허구는 숨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허구는 변신했을 뿐이다. 어느 날 실재세계에 아주 위협적인 괴물로 나타났다. 이미지의 삶은 이제 소설 속 여주인공의 삶으로 간단히 규정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이 불멸의 오해와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을 어떡할 것인가.'
소설가란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안도감이 듭니다. 아 역시, 글쓰는 건 고상한 취미로나 삼고, 소설가 따위는 꿈도 꾸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풋내기 습작 몇 개를 끄적거리면서도 벌써 이런 게 두려워지는데, 그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반역>, 1928


이게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그 그림입니다. 아싸, 본 적 있는 그림이네요. 뿌듯합니다. 이 널따란 세상에서 아는 거 마주치면 또 희희낙락하게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 그나저나 이미지의 반역이라, 소설가란 인간들은 이렇게까지 치밀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미지'라는 이름은 중의적인 의미였나봐요.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0. 16. 02:57

20년 뒤의 자서전

오믈렛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아따 대학가요제 보면서 놀고 왔더니 공부하기가 참 싫소이다... -_-
내친 김에 이거나 마저 올리고 잘랍니다.

<인간과 기계> 숙제 2탄 - 20년 뒤의 자서전.
(아아 이런 즐거운 숙제를 다 내주다니.. 참 좋은 과목 아닙니까 ㅎㅎㅎ)
A4 2장 쓰라고 했는데 신나서 버닝하다보니 그만... 길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20년 뒤에 제가 뭘로 먹고 살고 있을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직업 얘기 나오면 슬그머니 화제 돌려서 '어? 벨이 울린다' 내지는 '스물 한 살의 나에게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을테니 비밀이다. 후훗' 따위로 무마하려 했으나... 교수님께서 읽다가 화내실 거 같아서-_- 그러니까 '억지다!!'라고 생각되더라도 그러려니 넘어가주세용.

감상의 포인트:
1. 요리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2. 독신생활에 대한 글쓴이의 로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본다.
3. 있지도 않은 직업을 만들어내느라 글쓴이가 겪었을 고초를 헤아려본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0. 13. 01:32

연애편지

<인간과 기계> 과목 숙제로 쓴 연애편지. 고백을 하든지 거절을 하든지 둘 중 하나로 잡고 쓰라는 조건이었어요. 음, 그래서 픽션입니다.
사실 지난번에 올린 recursion도 나름대로 소설인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 (너무 짧았나)
뭐, 그냥 즐겨주세요. ^^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0. 8. 03:23

사랑니

굉장히 괜찮았다. 맘에 들었다.
이걸 쓰레기라고 폄하한 사람들이 뭘 보고 그렇게 말한 건지도 알 것 같지만, 그건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미묘한 심리 묘사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거라고 감히 말해본다. 아 물론, 읽어냈는데 그게 체질에 안 맞았을 수는 있겠지. 어쨌든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심리를 읽어내는 재미가 눈물날 정도였다.



아... 전체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말했듯이 심리 묘사가 굉장히 치밀하다는 느낌이다. 걱정했던 김정은의 연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게다가 너무 예뻤고.) 정지우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볼 생각인데, 기대가 크다. ^^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10. 4. 02:37

희망의 원리

..... 그렇지만 이러한 어이없는 쇼크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바가 있다. 즉 열일곱 살의 나이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공상을 했으며, 의형제와 같은 우애를 지니려 했고, 얼마나 자주 산 위의 공기를 마시려 했는지, 또한 지금의 젊은이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궁금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산 위의 공기는 돌풍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위의 공기를 마시는 젊은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불명확한 시기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데 따라 이리저리 이끌린다. 인간의 지적인 능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기껏해야 몇 명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천부적 재능에 대하여 기뻐하고,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직업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뿐이다. 많은 젊은 처녀들이 영화배우를 꿈꾸며, 많은 청년들이 지금까지 장터에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기발한 직업을 뇌리에 떠올리지 않는가? 이는 거의 일반적인 갈망 내지는 (그 방향에서) 허황한 꿈일 뿐이다.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갈망은 다행히 오랫동안 보존되지는 않는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충동은 특히 사춘기의 시기에 무언가를 창조하게 한다. 즉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을 쓰고, 음악에 심취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즉 젊은이들이 갈구하는 모든 일들은 현실화되고 이행될 때 거의 수축된다.
청춘기의 이러한 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대로 반증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불길이 타오르고 있듯이, 그들은 예술에 대하여 커다란 열정을 지닌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약 예술의 본질을 파악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미건조하게 변할 뿐 아니라, 한 가지 측면마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오그라들게 된다. 이 시기에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쉬우며 잘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쓰는 것은 무척 어렵다. 말하자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지닌 젊은이가 창출해 내는 것은 <마치 오그라들다가 타버린 듯이 말라비틀어진 자두와 같은> 열매로 출현할 뿐이다. 베티나 폰 아르님은 평생 동안 이러한 청춘의 특성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언제나 바로 그 점을 드러내려 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내용을 거의 편지 형식을 통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청년기 문학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일기 형식이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로 어떤 감춰진 형태로 평가되지만, 때로는 감춰진 무엇을 전달하는 데에 무척 적당한 장르이다. 어른들 가운데 더러는 젊은 시기에 일기를 쓰고, 이를 소중하게 보관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기장에서 자신의 깊은 감정의 수위를 측량하기 위하여 어떤 척도를 세우려 했다고 할까. 사랑, 우울, 어떤 싹트는 상 그리고 애벌레와 같은 사상 등 모든 것이 거기서 채취되고, 출발로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청년기의 꿈은 결코 김빠진 것은 아니지만, 번거로울 정도로 고혹적으로 빛날 뿐이다. 이 시기는 불행하고도 성스럽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용맹하고 오색영롱한 삶, 고매하고 폭넓은 삶을 갈구하는 젊은이의 태도는 거의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청년은 언제나 기사와 같은 젊은 의지를 지닌다. 그렇기에 청년은 극복해야 할 모험들, 발견해야 할 아름다움 그리고 쟁취해야 할 위대함을 열망하곤 한다.
젊은이가 처한 삶은 이와는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으므로, 멀리 위치한 꿈들은 아름답게 장식되는 법이다. 젊은이들은 멀리에 위치한, 그러한 꿈에 매혹될 뿐 아니라, 자신을 더 이상 은폐시키지 않은 채 그 꿈을 박차고 나온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더욱 가까이 다가올수록, 젊은이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행동한다. 멀리 위치한 꿈은 이제는 마치 저녁에 자그마한 소도시로 데려다 주는 기차와 같은 부호로서 족할 뿐이다. 이를테면 시골에서 상상하는 대도시의 머나먼 공간이다. .....


딱딱한 껍질에 싸인 두꺼운 놈으로 무려 5권이나 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블로흐가 누구냐면, 당연히 나도 잘 모르지만-_- 마르크스주의랑 유토피아랑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다. 또 한가롭게 서가를 누비다가 빤딱빤딱한 하얀 표지가 그럴 듯 해서 업어왔다.

내용도 어렵고 문체도 불친절해서(아니 이렇게 심각하게 추상화시킨 문장들만 적어놓으면, 읽는 사람은 이걸 끊임없이 현실의 무엇에 대입시켜야 할 지를 고민하며 읽어야 한단 말이다! 내가 그런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나마 저 부분은 상당히 친절한 축이다.) 1권만이라도 다 읽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책이지만 이 부분은 꼭 갈무리해두고 싶었다.
사실 저걸 읽고 쓴웃음을 짓는 동시에 심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내가 하고 있는 짓들이 젊은 날의 치기라 이거지...-_-^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저자의 시니컬한 시각이 어줍잖은 딜레탕트들을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이 갈망(?)이(세상에 목마르다고 표현하는 것까지 이제 찔리게 생겼어-_-) 오래가지 않을거라는 그의 예언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아니면 젊을 때는 으레 그런 것이지-라고 변명하는 데에 써먹어야 하나. -_-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9. 30. 02:35

토이 - 그럴 때마다

아침에 이 노래를 무심코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그냥 편하게 잘 불러지는 멜로디에 속을 뻔 했지만, 이거 절대 단순한 상황이 아니다!!
일단 가사를 보시라. 아시는 분들은 좀 흥얼거려 보기도 하시고.

반복된 하루 사는 일에 지칠때면 내게 말해요
항상 그대의 지쳐있는 마음에 조그만 위로 되줄께요
요즘 유행하는 영화 보고플땐 내게 말해요
내겐 그대의 작은 부탁 조차도 조그만 행복이죠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일요일 오후
늦게 잠에서 깨 이유없이 괜히 서글퍼 질 땐

그대 곁엔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하는
내 자신보다 그댈 먼저 생각하는 남자가 있죠
오랫동안 항상 지켜왔죠 그대 빈자리
이젠 들어와 편히 쉬어요

혼자 밥먹기 싫을땐 다른 사람 찾지 말아요
내겐 그대의 짜증섞인 투정도 조그만 기쁨이죠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일요일 오후
누군가 만나서 하루종일 걷고 싶을땐

그대 곁엔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하는
내 자신보다 그댈 먼저 생각하는 남자가 있죠
오랫동안 항상 지켜왔죠 그대 빈자리
이젠 들어와 편히 쉬어요


정말 구김살없고 따뜻한 노래인데... 어쩐지 이상하다.
짝사랑이라는 것.. 짧은 기간에는 사람을 들뜨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어지면 사람을 반쯤 말려죽이는 몹쓸 병이 아니던가?
이 남자는 오랫동안 그대의 빈자리를 지켜왔댄다. 헌데!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 온 사람이 어찌 이리 구김없이 주저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냔 말이다..
게다가 저렇게 '딱 남자친구가 생각날 만한' 상황에서 자기를 떠올려 줄 것을 확신하는 걸 보면,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걸 보면 꽤나 가까운 사이같은데..?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
1. 사실은 그렇게 상사병으로 바작바작 마를 정도로 오래 기다린 것이 아니다
-> 그렇지만 이렇게 소심 내지는 섬세한(?) 남자가 몇 주 좋아한 거 가지고 '오랫동안'이라면서 법석을 떨 것 같지는 않다.
2. 한때 바작바작 말라버렸으나 최근에 소생했다(?)

아무래도 두 번째 시나리오가 유력한 것 같다.



일단 그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다.
오랫동안 그녀 주변을 맴돌아온 순애보 중 순애보. 사실 그녀에게 직접적인 프로포즈를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속만 타들어가던 찰나, 그녀가 그를 새롭게 보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유는 모른다.
좋아하던 남자에게 차였을 지도 모르고,
사귀던 남자랑 헤어졌을 지도 모르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점점 그의 지극정성에 탄복하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서야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단지, 자신을 변함없이 아껴주는 좋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달리 좀 더 다정해졌음을 눈치채게 된다.
놀란다. 왜 갑자기 달라졌는지야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뻐한다.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그는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을 다시 품게 된다. 혼자서 쌓아왔던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한다. 자기를 저버린 것 같았던 세상이 이제 그녀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다.

자, 좀더 시간이 지난다.
자기 전에 그녀와 통화하는 것이 점점 그의 일상이 되어간다. (사실 이쯤 되면 충분히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
가끔씩은 전화 끝에 용기를 내어 '좋아해' '사랑해' 등의 간지러운 말도 슬쩍슬쩍 끼워넣어 본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녀는 적어도 전화를 확 끊어버리거나 싸늘한 말로 분위기를 깨버리거나 하진 않는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가 머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든든한 존재인지를 역설하고,
그러니까 이제 내게 와라...라고 강력하게 어필해야 할 시점!!



...이 노래의 남자는 바로 지금 이런 상태인 것이다!!!!
아아, 정말로 복잡한 시츄에이션 아닌가? -_-
강력한 프로포즈가 되어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저렇게 젠틀한 것은 저 남자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니 뭐라 토 달지 말지어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9. 24. 23:41

Recursion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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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30분밖에 안 지났을텐데도 벌써 몇 갠가의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복잡한 이야기가 남겨놓은 잔상이 거미줄처럼 남아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한다. 이불을 걷어내려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어둑어둑한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해서 텅 빈 것 같고 사물들은 푸르스름한 빛깔을 낸다. 더듬거리며 전화기를 찾아 손에 쥔다. 익숙한 이름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다 말고 쓴웃음을 짓는다. 어린애같잖아? 비웃자, 이럴 때는 스스로를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 조롱을 퍼부어도 좋다. 정말 한심해서 봐주기 힘들구나. 창피함에 몸이 비틀릴 지경이다. 실소를 접고 몸을 일으켜 형광등을 켠다.

대단치는 않지만 약간의 시장기도 있고, 늦어지기 전에 슬슬 나가봐야겠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남방을 고른다. 양 쪽 소매에 팔을 끼우고, 뒤집어진 깃을 반듯이 한 다음, 맨 윗 쪽 단추부터 채운다. 그런데 내가 왜 서두르고 있지? 손을 멈춘다. 천천히, 느릿하게 단추를 채운다. 다시 속도를 빨리해 본다. 다시 느리게. 그리고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어 본다. 나는 눈썹하나 까딱않고 늑장을 부리면서, 녀석에게 거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시간이라는 녀석은 조금은 툴툴거리겠지만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을 것이다. 제가 별 수 있겠나. 조금 전의 조소는 잊은 채로, 오늘 저녁의 주도권은 내가 잡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뿌듯하다.

톤을 적당히 죽인 엷은 분홍색의 트렌치코트를 걸친다. 계절의 변화를 은근하게 즐기며 드는 나만의 축배다. 무슨 말이냐면, 가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트렌치코트를 걸친다는 것도, 해가 짧아지면 세로토닌의 분비가 감소해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기 쉽다는 식의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일 수 있는 나의 이상한 ‘환절기 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문을 나서며 습관처럼 불을 끄려던 손을 멈칫한다. 그대로 두고 가는 게 좋겠다. 돌아와서 문을 밀치자마자 밝은 불빛이 쏟아지면 그것도 나름대로 반가울 것 같다. 문을 나서고, 길을 걸어 식당에 도착한다.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 다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어색해하는 건 그런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쪽이다.

수저를 놀리면서, 단어와 단어를 모으고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본다. 어릴 때부터 즐겨온 놀이 비슷한 것이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낼 때는 잊어버리곤 하는데, 많은 말을 입 밖에 내고 나면 지쳐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고독을 즐기는 사람 같지만 사실 난 그 반대였다. 두려웠다. 세상과의 관계를 빼 버리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을거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웃음이 많은지 적은지, 낯을 가리는지 안 가리는지, 나약한지 강인한지, 혼자일 때는 나의 이 모든 특성들이 조금씩 엷어지며 사라져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보다시피 혼자를 자초하고 있다. 혼자이건 그 어떤 사람과 함께 있건 변하지 않는 자신의 특성을 발견하기엔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원을 그리는 길을 돌아온다. 바라보는 눈은 없지만 조금 더 꼿꼿하게 걸으려 노력한다. 아니 사실 바라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먼 발치 따라오는 뒤에서, 양 옆에서, 또 저 멀리 있는 건물의 창가에서, 나의 걸음걸이와, 가볍게 핸드백을 쥔 손, 발을 디딜 때마다 약간씩 흩날리는 머리카락, 깜박이는 눈을 훔쳐보고 또 훔쳐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시선이 내게 묻는다. 흔들리니? 아니. 외롭니? 전혀.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맘에 드는 걸. 너무 자신에게 빠지는 건 경계해야 할 걸? 허, 그 정도로 심각하게 빠지기엔 내 눈이 좀 높아서 말야. 좋아, 그렇다면 말이지,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 봐.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봐. 그 좋아하는 책 실컷 읽고, 머릿 속을 헤매는 문장들도 마음껏 뱉어내보란 말이야. 상상만으로 두근거렸던 그 영상들도 현실로 끄집어내라구. 네 눈이 삐지 않는다면 네가 뱉어낸 것들을 판단할 재주만큼은 있겠지. 역겹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길, 시시한 것 보다야 나을테니. 시시하더라도 스스로를 비하하진 말길, 상사병 걸린 듯이 동경만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고 무엇에도 마음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배 나을테니. 그것도 부족하면 삶을 비웃듯이 훌쩍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라구.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하고 싶은 짓이나 실컷 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자, 이제부터 글을 써 보는거다.
스타워즈 열풍이 지나간 지도 제법 되었고, 싹 다운받아놓고 광분하며 n번씩 돌려보던 것도 벌써 두 달은 족히 된 일이건만.
생뚱맞게 이런 주제로 기다란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은 어제 신나게 마셔댄 알코올 탓이리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캐릭터의 변천사>

프리퀄과 클래식. 영화 내의 줄거리에 따르면 프리퀄-클래식이지만 현실에서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하면 클래식-프리퀄이다. 숙취로 멍해진 머리로 침대에서 몇 시간째 뒹굴, 뒹굴 하면서 클래식의 주요 캐릭터들과 프리퀄의 주요 캐릭터들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20년 세월의 간극을 느꼈다...

레아 vs 파드메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강인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 표현에 있어서는 20년 세월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다.
웬만한 남자들이라면 말도 못 붙여볼만큼 당당한 여장부 레아. 헤어스타일이 촌스러운 것은 시대의 영향이니 어쩔 수 없다 치지만 한 솔로의 이죽거림에 대꾸하는 저 팍팍한 선머슴같은 태도란! 그 당시의 페미니즘을 선도하는 여성상이란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강인하고, 때로는 저돌적이며, 남자를 경계하고 전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 (아 물론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말했지만 레아는 그래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럼 이제 파드메를 볼까. 시종 두세 명쯤 붙이고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을 듯한 요란한 헤어스타일과 화장, 화려한 의상까지. 그녀는 자신의 미를 가꾸는 데에 열성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집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수완의 일종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강인하지만, 저돌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중하게 계산된 전략을 발휘한다. 남자는 경계의 대상도 전투의 대상도 아니며, 공존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그녀는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를 가꾸고, 가정을 원하며, 눈물을 보일 줄도 안다.
'강인한 여성상'이란 것은 확실히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는 모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 역시, 파드메와 같은 여성상 쪽이 좀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vs 아나킨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까 말한 '강인한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남자라는 것. 그러나 이들도 역시 많이 다르다. 히로인과 사랑에 빠지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려면 그 시대가 용서할 수 있을만큼 괜찮은 남자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괜찮은 남자의 요건 또한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은 어떤 상황에서건 당당하고 호쾌하다. 표현에 있어서도 몹시 거칠고 직선적이며, 사고 또한 단순한 편이다. 그의 머릿 속은 의리와 명분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나킨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남성상을 보여준다. 아나킨에게는 두려움이 있으며,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화면에서 몇 번이고 눈물을 보인 그가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연인과 대화하는 방식은 지극히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의리도 명분도 아닌,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메트로섹슈얼이라든지, 꽃미남 선호 풍조;라든지 하는 것들로 이미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시대는 남성적인 남성보다는 양성성을 지닌 남성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방식
레아와 한의 맺어짐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안 맞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아귀가 맞는 둘의 성격 때문. 처음 레아를 본 한은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야!'라며 감탄한다. 레아는 한의 거침없는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이제껏 자신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 끌리게 된다.
반면, 아나킨과 파드메는 어떤가? 그들의 성격이 찰떡궁합이라는 실마리는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아나킨은 잘생겼고 파드메는 예뻐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_- 어린 아나킨은 파드메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건 뭐 그냥 무조건 외모만으로 승부나는 게임이다. 한편 파드메는 젊은 아나킨의 강렬한 눈빛공세에; 홀딱 넘어가버리게 된다. 필연성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외모지상주의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쯧쯔..



<클래식과 프리퀄에서의 대립 양상에 대해>

양성성 얘기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클래식의 정확한 선 긋기 식 이분법과 프리퀄의 다소 모호한 대립 구도도 비교할 만하다.

선과 악
클래식에서, 다스베이더는 절대적 악인이다. (마지막에 돌아선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돌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즉, 중간과정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루크와 벤은 악에 대립하는 선의 수호자이다.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프리퀄에서는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린다. 다스베이더는 다름아닌 선의 수호자 제다이의 그림자였으며,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아나킨이 그렇게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과정이 결코 불연속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며, 이는 클래식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강인함과 나약함, 남성성과 여성성
클래식에서 한과 레아는 시종일관 씩씩하고 당찬 모습만을 보여준다. 반면에 파드메와 아나킨은 유능하고 강인한 직업인(-_-)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약한 면모까지도 숨기지 않는다.
또한 한과 레아는 남성성과 여성성 중 한 가지만을 표현하는 캐릭터이다. 한은 전형적인 남성적 캐릭터이고, 레아 역시 캐릭터로 치면 선머슴에 가깝다. 그러나 파드메와 아나킨에게는 두 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여성성도 존재하고, 남성성도 존재하는, 양성성의 모습을 더 쉽게 찾아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상반되는 듯한 개념이 섞인 채로 인물에 투영된다는 것 또한 클래식과 굉장히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오비완과 젊은 오비완에 대해>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늙은 오비완은 전형적인 '현인'의 모습이다. 루카스가 그에게 간달프 같은 이미지를 주문했다고 하니 빼도박도 못할 이야기. 그는 현명하고, 세상의 지혜와 경험은 다 가지고 있으며, 능글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안 맥그리거가 연기한 젊은 오비완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상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젊기 때문에, 그는 아직 원칙을 신봉하며 예외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젊기 때문에, 그는 노인네의 능글맞은 유연한 대처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고집불통과 완고함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이건 반대잖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젊은이들은 현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원칙주의자에 고집불통이어야 한다.라는 개인적인 견해는 차치하고라도, 이야기에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오비완은 지나치게 능글맞으며 유연하다. 시도때도 없이 눈웃음을 흘리고 다니는가 하면(점잖아야 할, 그래서 허튼 웃음도 자제해야 할 것만 같은 제다이가!) 웬걸, '협상가'로 우주에 이름을 날리고 있기도 하다...
아나킨이 다크사이드로 가는 과정에 좀더 필연성을 부여하려면, 아나킨의 마스터로서 오비완이 실격이었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오비완에게는 아나킨의 섬세함을 달래줄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 설명에 실패하고 되려 능글능글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오비완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아나킨은 '잘 보듬어주고 잘 가르쳐놨는데 저 혼자 폭주해서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 우주에서 제일 질나쁜 비행청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의 글을 읽게 되고,
그 느낌에 홀려 그 사람의 다른 글들을 찾아 읽게 되고,
결국 그 사람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며 끝내 동경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으신지? 프로작가도 아닌 보통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난 PC통신 시절부터 그런 일에 맛을 들였고,
지금은 이글루스와 네이버와 태터툴즈에 힘입어 온 나라에 퍼진 블로그 덕택에
전보다 더 풍족해진 환경 속에서 이 무익한 취미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뚜렷한 자의식, 독특한 감수성, 견고한 신념.
신념이라고 하면 대단히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의미로 쓴 건 아니고,
애써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절대 부정하지 못하는 명제 같은 걸 말하고 싶은거다.
이를테면 '나는 영원히 아웃사이더일 수 밖에 없다'고 믿는 것도 일종의 신념이고.
아마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는 신념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잠깐 딴소리인데.. 가끔 우습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모순이 있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만의 특이한 면모'라는 식으로 말하면 "아니야, 누구에게나 그런 건 있어"
'이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야, 너만 그래"라고 말한다!
실컷 설명해놓고도 흡족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이 오묘한 것을 더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구에게나 있는 것' 따위로 치부해버리면.
짜증이 확 솟는다. 그런게 아니니까 설명하려고 한거잖아.
그나마 후자 쪽 반응이 더 견딜만하니 요즘은 아예 그렇게 얘기하게 된다.


세상엔 글로 벌어먹고 살지 않으면서도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독서량을 짐작케하는 유려한 표현들보다, 좀더 투박하더라도 현실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글에 난 더 끌린다.
글쎄, 화려한 글을 만나면 일단 주눅부터 든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 변명하지 말자. 이건 질투다. 나도 그렇게 사치 좀 부려보고 싶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시샘을 제껴두더라도 투박한 쪽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다.
때로는 아집, 때로는 비틀린 맹신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건 그 사람 특유의 촉수 때문. 독특한 감수성이라는 건,
본인에겐 재앙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에겐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가만.. 방향을 잃었다. 아까 난 도대체 무슨 말을 쓰고 싶었던걸까.
거의 울고싶은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중간에 단어 고르다 지쳐버렸다. 뭐였지..
그러니까 아집도 집착도 나쁜게 아니다? 아닌데..
그럼 부러워 죽겠다? 이것도 아니고. 이놈의 기억력은 한 번 더 저주해줘야겠다.
역시나 아닌 것 같지만 머리 속에 남아있는 잔상만이라도 적어보자.

- 갈증이란 느낌조차 잊고 살았더니 물 한 모금은 감질나기만 하다.
- 역시 밤은 위대하다. 또 이런 글 나부랭이를 남길 용기가 생겼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5. 8. 4. 01:04

Down with love


*
실컷 다운받아서 다 보고 나니 DVD가 도착했다. OTL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족이었다. special features가 끝내줬거든!

*
고등학교때부터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인 환경에서 살아와서 가끔은 '여자친구들과 대화하는 프로토콜'을 까먹었다고 느낄 때도 있다. 푸하,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남자가 대화하는 방식과 여자가 대화하는 방식은 분명히 미묘하게 다르고, 그리고 분명히 나 또한! 그랬었다. 우연히 중학교 때의 메신저 대화록 같은 걸 볼 때마다 그걸 확실히 느낀다...; 어딘가 날카롭다. 어딘가 변덕스럽다.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무언가'를 강력히 믿는다.
"그게.. 잘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런 느낌. 뭔지 알 것 같지 않아?"
"응 알 거 같아!!" 그녀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

근래엔 여자친구들을 주로 만났는데.. 세상에, 아무리 연이어 만났다고는 하지만 목이 쉬고 머리가 지끈지끈;; 말했지만 음성언어란 보통 비싼 녀석이 아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수다쟁이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외로웠었다. 더이상 소녀의 것이 아닌 고민과 갈등들로 괴로웠었다.
그런데 나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하며 지내온 친구가 똑같은 고민으로 열변을 토하면!
갑자기 보편적 무의식이니 원형이니 하는 말이 생각나면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다..

아, 안타까운건 context도 다르고 solution도 다르고 단지 problem만 같다는 것이다.;;

*
Down with love.
그저 유쾌하게 웃어달라는 저 발랄한 엔드 크레딧을 무시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넌 애인이 좋아, 초콜릿이 좋아?"
(아..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물음이 되어버려서 계속 마지막 문장을 고치고 있다;;)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4. 10. 6. 15:37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은 뭘까?

새글읽기 하다가 발견.
앞으로 이런 것들은 쌓아둬야겠다. ㅎㅎ
(cyda 프로젝트용 자료수집중 -_-v)

출처: b.u@pie

글쓴이: hyeoks ((혁성))
날 짜: 2004년 10월 6일 (수) 11시 57분 01초
제 목: 비비

실시간 답글 달리니까 늠므 재밌다ㅜㅜ (주: 글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보톡/코톡의 중요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동의 콧물이 내 입술을 촉촉히 적신다.

습~~.

캬~~.;;

근데 생각해보면 싸이 역시 실시간이 가능한디??-__-a?
음.. 역시 웹이 좀 느리구나..ㅋ. (주: 우리의 목표는 이런 사회적 통념을 깨는 것!)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4. 10. 3. 13:43

게으른 대학생들

그래, 어제 세동오빠가 지적하신 것도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었다.

예전에 인터넷을 이끌어 가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지만, 지금은 업계이다. 그렇지만 업계가 할 수 없는 것들 - 당장 돈이 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것, 신선한 것, 이런 것들을 대학생들이 개척해 나가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난 여름 ESCamp에서 넥슨의 대표이사[였나?;] 분의 강연에서도 그런 말이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IT업계를 쥐고 있는 실세는 95학번 전후대라고 한다. 적당히 가감하면 우리 나이 정도에 그분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창업을 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너무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학과공부와 학점, 동아리 활동에 매여 몸은 바쁘게 생활하지만 정작 정신은 나태한 것은 아닐지? 해야할 일들만 걱정하느라,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보는 경험은 어느새 뒷전이 되어버린 건 아닐지?

그렇지만 이런 의문들... 어쩌면 부질없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때까지 꿈꾸던 대학 생활의 모습은, 해야할 공부보다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고, 사고도 쳐 보는 것이었는데. 정작 대학에 와 보니 대학 역시 '하고싶은 공부'보다 '해야할 공부'를 하는 곳이더란 말이지!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는 어디서 하는거지? 대학원에서 하는건가?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4. 9. 9. 23:00

롤러코스터를 타라?

송준화 교수님의 '유비쿼터스 서비스를 위한 차세대 인터넷 서비스 아키텍춰' 강연을 듣고 왔다.
전산과 비전공인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라서, 그다지 기술적인 내용은 없었다. 인터넷을 1세대와 2세대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 조금 독특했는데, 그리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지난 겨울방학때 서점에서 선 채로 읽었던 유비쿼터스 관련 서적들이나, 스팍스에서 들었던 세미나(Blog와 RSS) 등을 통해, '이제는 사용자가 정보를 요청하는 형태가 아니라, 컴퓨터가 알아서 사용자의 기호와 관심을 분석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가 보편화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접해왔으니.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오늘의 새로운 것이 내일이면 상식이 되고, 내일모레에는 그 분야가 망하게 된다고... -_-; 그러니까 언제 사장되어버릴지 모르는 기술들에 집착하고 있지 말고 혜안을 기르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넷 시대의 학습과 공부법'. 마음에 와닿았던 페이지 몇 개를 후다닥 적어왔다.

학생들이 걱정하는 것들
1. 공부할게 너무 많아!
2. 남들이 너무 잘해!
3.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 (난 내일이면 망할지도 몰라!)

이 부분에서 많은 학생들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까. 그럼 문제제기만 할게 아니라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전문지식? 혹은 상식?
technique? or concept?
습득? 혹은 표현?
reading? or writing?
집중? 혹은 경험?
분석? 혹은 종합?

이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자면 이렇다.
현재의 우리들이 얽매여있는, 성적에 관련되는 것들 - 지식, 기술, 이것들을 습득하고, 시험을 위해 집중해서 외우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 보다도,
내 옆의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나?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나? 내 여자친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아할까? 이런 것들을 잘 파악하는 능력 -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유리하다.
집중해서 하는 공부는 시험때나 하지 않느냐,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면 그런 지식은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금 달라서, 생활속에서 슬렁슬렁 얻어지는 것이면서도 단기간에 집중해서 하는 공부보다도 더 많은 도움이 되고 또 더 오래도록 기억된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그것 때문에 역시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이것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타면 어지럽고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긴 하지만, 안 탈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느냐. 이왕 탈거면 좀더 빨리 타서 적응해야 되지 않겠느냐.
앞으로 인터넷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 다 나온 다음에 시작하면 늦은 것이고, 어떻게 될지 시나리오를 미리 다 짜둬야 한다. 여러분이 할 몫은 열심히 상상하는 일이다. 그냥 상상한 걸 쓰기만 하면 논문이 되고 여러분은 졸업을 할 수 있다. (^^;;;;;)

으흠. 교수님은 그냥 다짜고짜 롤러코스터를 타라고 하신다.
일찍 타서 빨리 적응하면 더 좋은거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장비는 갖추고 타야하지 않을까?
아니, 너무 머뭇거리다가 늦게 타면 그만큼 더 늦어지는 건가?

이 문제는 결국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기본기를 다지는 것인가, 혹은 사고를 정형화된 틀에 맞추는 것인가'라는 물음과 닮은꼴인것 같다.
전자가 맞다면 역시, 이런 생각할 시간에 빨리 책 펴고 줄 긋고 있어야 할테고. ㅎㅎ
후자가 맞다면, 공부보다는 한눈을 파는데 더 열심이어야겠지. 아님 빌게이츠처럼 학교 때려치든가. ^^;;

송준화 교수님 뿐만이 아니고 김진수 교수님도 은근히 후자를 강조하시는데 -_-; 지난 봄 한 학기동안 고민해보고 내린 나의 결론은 전자 에 가깝다.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자 할 때 필요한 기본기라는게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나는 그 기본기를 다 갖추지 못한 것 같다.
강연을 듣고 나오면서 탁은오빠가 그랬다. "뭘 알아야 상상도 하지!" ^^;
얼마 전 순호 생일파티에 갔다가... 유홍이가 뜬금없이 "페미니즘에 관심있니?"라고 묻길래 "어? 아니..."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말하고 나서 바로 다음 순간에 아차 이건 아닌데, 참 비겁한 대답을 했군. 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남성을 이기고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이건 여성 뿐만이 아니라 남성으로서도, 아니 어느 성이라 칭할 수 없는 제 3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그때 나의 심리는, 유홍이는 꽤 취해 있었으니 귀찮은 언쟁을 벌이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혹은 '그럼 그렇지, 말 많은 여자애들은 다 저런다니까'라고 생각할 남자 친구들의 시선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비겁한 대답을 듣고 안심한 유홍이가 말했다. "사실은 난 남성 우월주의자거든? 근데 현정사 발표를 해야되는데 주제가 페미니즘이야.. 정말 하기 싫어!"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듣고 충격받았다. 실망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늘상 '착하게 살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를 표방하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사람을 사랑하겠다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니?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내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서 "여성이라면, 아니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거 아냐? 너도 그렇지?"라는 식으로 말을 했으면 그는 적어도 자신이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극단적인 발언은 하지 못했을테니까. 어쨌든 그때의 내 대답이 종종 생각날 때면 나에게 화가 나지만,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곤 한다. 인종차별주의처럼,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편견들은, 말로써 설득시키려 한다고 쉽사리 바뀌는게 아니라고.
음 그래, 이런 말 조차도 여전히 비겁하다. -_-;

오늘 읽은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책인데 특별히 여자들에게는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책, 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듯 하다. 제목만 보고도 벌써부터 경기를 일으킬 남자분들이 눈에 보인다. ㅎㅎ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공존할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여튼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했다. 저자는 CNN의 선임 부사장인 게일 에반스. 양성간에 어쩔 수 없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서, 굉장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고 실용적인 해결책까지도 제공하는 책이다. 멋지다! 읽으면서 '어 이건 내 얘기잖아?'라고 생각한 구절들이 꽤 있었다.; 이런건 적어뒀어야 하는건데 말이지. 기억나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어떤 여자분의 사례. 늘 혼자 엄청난 양의 일을 떠맡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산다. 문제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까지도 떠맡는다는 것.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문제를 설명해주고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게 나아요'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을 집에서 상을 치울 때 아이들이 치울 때보다 어머니가 치울 때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리기 때문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모두 떠맡는 것에 비유한다. 이것은 슈퍼우먼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만 좋지 않은 행위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상을 치우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일을 함에 있어서도 나누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말.
이 케이스는 최근의 나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동문회 홈페이지를 맡은 이후... 같이 만들기로 한 우현이가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다지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얘기를 좀 해보고야 안 사실인데 사실상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웹마스터를 해보긴 했어도 웹프로그래밍은 아주 조금 다루었을 뿐이고, 서버 관리 경험은 전무하다고 했다. 그래서 뭐... 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혼자서 꾸역꾸역 만들고 있었다. 내가 궁시렁거리면서; 작업하고 있는걸 보면 사람들(이라고 하면 내 주변엔 거의 다 남자분들 뿐이다;;)이 물었다. "왜 혼자 하니? 같이 하기로 한 친구가 안 도와줘?" 그러면 난 대답한다. "에휴... 사실 그 친구가 웹프로그래밍 잘 몰라서... 그냥 혼자 하는게 편해요." 그러면 남자분들은 정말 신기하게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 모르면 니가 가르쳐서 하게 만들어야지~!" 그땐 그다지 심각하게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그 책에 나온 정답인거다.;;;
뭐 여하튼 몇 주 동안 용수 뺨치게 연락이 안 되던(^^;) 우현이에게 결국 조금은 직설적으로 내 의사 표시를 했었고... 서로 오해를 풀고 다시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지금도 사실, 상을 치우는 임무를 아이에게 맡긴 어머니처럼 ^^;; 약간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 친구한테 너무 어려운 수준을 맡긴 건 아닌가, 내가 하면 훨씬 빠를텐데 그냥 내가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적어도 '동문회 홈페이지를 공동으로 제작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려면 그 친구도 이 정도는 해봐야 할거라고 생각한다. 웹프로그래밍 경험 쌓아둬서 나쁠 것도 없고. ^^

또... 기억나는 것이, 남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한 것.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암시만을 주면 안 된단다.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암시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이 대목을 읽고, 작년 가을학기 시작할 즈음에 내가 스카 개발에 관심을 표명했는데도 왜 나를 개발팀에 끼워주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굉장히 흥미를 느꼈고 끌렸음에도, 나는 "저는 Perl을 잘 모르는데요..."라는 식으로 빙빙 돌리면서, 정작 마음 속에 있는 얘기, '잘 아는 건 없지만 같이 해보고 싶어요! 언어야 뭐 금방 익힐 수 있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_-;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자신감 넘치는 직설적인 언어는 잘난 척 한다거나; 재수없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우물쭈물하면서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줄어든 것 같다. FreeBSD 시스템은 전혀 다뤄본 적 없고 NNTP라는 단어조차 몰랐으면서도, 무작정 카이스트 뉴스 서버 관리자를 지원했다. 실제로 해 보니 그렇게 겁먹을 일도 아니었고, 모르는 것은 이제부터 알면 될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또 다른 경우는... 동문회 홈페이지 만들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웹프로그래밍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었다. 웹프로그래밍은 정말로 단 한 줄도 해본 적 없고 내 홈페이지는 여기저기서 자바스크립트를 퍼와서 꾸민 것이었으니 -_-; 그렇지만 해보고 싶었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웹프로그래밍이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내 동문을 위해...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도 일단, 내가 존경해오던 선배님들이 하시던 일을 내가 맡을 수 있게 된다는 데에 욕심이 났다. ^^; 그래서 '저 플래시나 PHP는 한번도 안 써봤는데요, 서버 관리는 좀 해 봤고 Perl도 좀 쓸 줄 압니다!"라고 주장해서 이걸 맡게 되었다. ^^; (음 위 스카 이야기엔 Perl을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그 이후 겨울방학에 혼자서 조금 다뤄봤었다^^;)
내가 맡은 이 두 가지 일 모두 아직도 진행형이고, 이것들 때문에 쏟아부은 시간과 새운 밤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미 많은 것을 얻었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 물론 아직 남은 일들도 잘 마무리해야지.

우악.... 글이 엄청 길어졌다. 오늘 읽은 책이 이거 말고 또 있는데... <도둑맞은 인생>이라는, 20년간 사막의 감옥에 갇혀 지낸 한 어머니와 그 여섯명의 아이들의 이야기. 이 책이 훨씬 두꺼웠으나 이 얘긴 나중에 해야겠다. ^^
끄적이기/일상너머 | Posted by Mirae 2004. 6. 24. 03:05

형식과 내용

세상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는 법이다. 라고 말하면 시시하댄다.
넥타이 매는 법에도 철학이 있다. 라고 말하면 어 뭔가 멋지다고.
하루키가 한 말이다. ㅋㅋ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 라고 말하면 역시 시시하지?
음 난 한 마디로 이 시시한 말을 멋지게 바꿀 능력은 없지만 ^^;

bbs. 게시판. 위키.
이것들은 다 껍데기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는 다 똑같은 것이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글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bbs의 보드나 제로보드 같은 것은 시간 순으로 글을 보여준다. 메일링 같은 것은
글타래라는 소극적인 분류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글타래들도 시간순으로
정렬되어있다. 반면에 위키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분류에 따라 글을 보여준다. 분류가 완벽한 트리구조일 필요는 없고, 별로 아름답진
않겠지만 사이클을 이룰 수도 있다.
말하자면 저 세 가지는 '글을 보여주는 방식'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시간 순으로 정렬되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쉽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들 - 일상사라든가 감정 등 - 의 기록을 남긴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분류에 따라 정렬되는 곳에서는, 뭔가 분류를 생성해내고 정리하고
채워넣어야겠다는 의식이 작용해서, 조금더 비개인적인(;) 내용들을 많이 넣게 되는
것 같다.
글을 보여주는 방식의 아주 미묘한 차이가, 그 글들의 성격을 크게 좌우한다.

그래서 시간 순으로 정렬되는 곳은 그 내용들이 잘 쌓여가면 그것을 만들어가는
이의 성장 과정을 그대로 담을 수 있고 그 자신 또한 많은 지침을 얻을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게 시간이 지난다고 쌓여가는 형태가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형태라면,
단지 사진을 찍어두듯이 일상을 담아두는 용도 내지는 감정의 배설구 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뭐...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긴 하지만, 뭔가 '쌓여가는' 형태를
사용자가 직접 느낄 수 있다면, 자신의 성장을 더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우울한 기분에 대해서 쓰는 글이라도, 내가 예전에 우울했을 때는 어떻게
했더라? 그때는 얼마나 우울했었지? 왜 우울했을까? 그런,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경험을 지침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안은 없을까? 아쉬우나마 카테고리 정도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일기장
용도로 쓰는 게시판 같은 경우에는 '감정날씨' 같은걸 달아서 오늘은 맑음, 흐림,
소나기, 천둥번개, 하는 식으로. ^^; 그렇지만... 역시 부족하다.

"쌓여가면서 발전하는 정보를 담는데에 블로그라는 것이 과연 적합한가?"
블로그라는게 뭔가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 획기적인 것이고, 결국은 그것도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형태'일 뿐. 오픈 소스의 철학에 대해서 와글와글
떠드는데는 어울릴지 모르나 Cygwin에서 Eterm 설치하는 법 같은 것을 블로그에
올렸다간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가는 글 속에 파묻혀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에 그다지 관계되지 않는 정보를 담는 데에는 위키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결론은... 홈페이지랑 위키를 따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참 많이도 고민했는데 결론은 단순하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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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 Mirae
http://recursion.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