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쓰레기라고 폄하한 사람들이 뭘 보고 그렇게 말한 건지도 알 것 같지만, 그건 이 영화 전체에 흐르는 미묘한 심리 묘사를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일거라고 감히 말해본다. 아 물론, 읽어냈는데 그게 체질에 안 맞았을 수는 있겠지. 어쨌든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심리를 읽어내는 재미가 눈물날 정도였다.
(*) 인물 이름이 헷갈릴 수 있으니 정리부터 하고 들어갑시다. 그냥 간단히.. 좀 덜 중요한 사람 쪽에 프라임(') 붙인거라고 보면 됩니다.
인영 : 서른 살 인영
인영' : 고등학생 인영
석 : 고등학생 석
석' : 서른 살 석
수 : 얘는 한명이군. 고등학생 수. 즉 석의 쌍둥이 형.
정우 : 인영의 동거남
정우' : 고등학생 정우
먼저 인영과 인영'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처음에 인영'의 이야기가 인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일거라 짐작하면서 봤기 때문에, 수의 방에서 석과 키스하는 인영'을 보면서 '저 여잔 어릴 때부터 나쁜 년이었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_-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의 상을, 그를 닮은 다른 남자에게 투영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인영과 인영'은 닮은 꼴이다. 수를 석에 투영하는 인영', 석'을 석에 투영하는 인영. 수에게 빌려준 교과서를 발견하는 인영', 석'에게 빌려준 교과서를 돌려받는 인영. 즉 인영의 닮은 꼴, 인영'을 서술함으로써 인영에 대한 서술 또한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벚꽂 아래 함께 있는 정우'와 인영'을 보면서 우리는 인영이 결국 정우를 택할 것임을, 그러나 석 또는 석'을 잊지는 못할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어쨌든 둘 다 기본적으로 나쁜 년(..)인 건 맞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거, 죄는 아니지만 결국은 그 상대를 농락하는 일이 아닌가.
괜찮았던 부분:
*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앞서가는 인영.. 뒤로 숨이 턱에 차서 쫓아가다 결국 난간(?)에 매달려 숨을 몰아쉬고 있던 석. 뭐랄까 '바로 이게 고등학생의 매력이지!!!'라는 느낌이 팍 꽂혔달까. Good~!
* 크랙션을 빵빵 울려대다 어쩔 줄 몰라하는 석이 다가오자,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도 어쩐지 웃는 듯 했던 인영의 표정. 마침내 석을 껴안는(이라고 쓰고 '쟁취하는'이라고 읽는다) 인영을 보면서, '서른 살이 고등학생을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다...으하하 그래 난 이런 걸 보고 싶었..!!
* 모텔 입구에서 계산을 하고 난 인영이 석을 바라보던 안심시키려는 듯한 눈빛과 어색하게 흐르던 긴장. 영화가 그냥 말그대로 '영화'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었겠다. 차라리 쿨하게 들어가는 두 사람을 봤다면 '영화니까..'하고 납득했을거란 얘기. 아니지, 아예 로비에서의 계산 따위는 보고싶어 하지도 않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판타지 속의 인물들이 아니라, 현실 속의 인물들이다. '뭐 별거라고.'라고 뇌까리고 쿨하게 모텔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묘한 긴장과 어색함이 이들에게 현실감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 따뜻하게 돌봐주는 동거남. 2년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팔팔한 고등학생. 13년만에 나타나서는 돌연히 반해버린 첫사랑. 자신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느끼며 사랑니의 통증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한 여자. 으하- 이거 완전히 파라다이스 아닌가. 생각할 수록 재밌는 상황이다;
맘에 안 들었지만 납득하려 노력한 부분:
* 패스트푸드점에서 인영과 석과 정우의 삼자 대면. 불쑥 나타나 석의 음료수를 낚아채며 인영의 옆자리에 앉는 정우를 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정우는 석을 보고, 그가 바로 인영이 며칠 전에 말한 석'과 닮았다는 그 남학생임을 알아차린다. 견제모드 발동. 그는 나이가 더 많은 남자의 노련함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어떻게? 석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다. 석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그 자리에 사람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해서 석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의 음료수를 빼앗은 것은 그런 행동의 일부이고, 이제 그는 인영과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_- 무시해버리는 쪽이 원숭이 보듯 바라보는 쪽보다 더 고단수가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에 좀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정우는 석이 석'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안심해버린 것 같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군.
* 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인영의 독백. 거기서 꼭 '조인영 미쳤어... 17살을 데리고 뭘 한 거니.'라고 말을 해 줘야 되나 싶긴 한데,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첫사랑의 환상이 깨져서 슬퍼하는 걸로만 보였을 수도 있겠다.
* 아무리 그래도 첫사랑과 닮았다는 건 이유로서 좀 시시하지 않나? 한국에서 서른 살 학원 선생이 열 일곱 살 고등학생에게 빠져드는 사태를 욕 덜 먹고 설명하려면 그 이유밖에 없는걸까? 서른 살이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열 일곱 살... 그릴 수 있을 법도 한데.
맘에 안 들었던 부분:
* 차에 치여 죽는 수. 너무 식상하다. 주원오빠는 '그래도 단순하게 차에 치인 건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너무 게으른 설명인 건 사실.
* 아무리 고등학생이라도 영안실이 뭔지도 모를 것 같진 않은데...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석에게 덤벼들던 인영'은 심하게 억지스러웠다. 화면까지 잔뜩 흔들어줘서 짜증 배가.
* 잘 자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석이 하는대사.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일어나면 키스해주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좀!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냐! 그냥 말없이 씩 웃어보인다음 키스하고 상큼하게 돌아서주면 좋잖아. 네가 레트 버틀러만큼 느끼한게 잘 어울리는 남자면 또 몰라. 말 나온김에 생각해보면 레트는 "Kiss me" 한 마디 하려고 엄청나게 많은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어도 멋있기만 했지...흐흐.
* 일식집 앞마당에서 석과 인영'의 티격태격. "넌 날 사랑하는게 아냐! 넌 형을 사랑하잖아!" "아니야 난 널 사랑하는 거야!" 으... 이것도 너무 말이 길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말 남발하니까 몸이 뒤틀린다구... 그냥 좀 고등학생이 할 법한 말투로 "넌 지금 착각하는거야!" "아니야! 왜 몰라주는거야?" 정도면 좋지 않았을까.
이해 안 되었던 부분:
* 인영이 토요일에 석을 초대하겠다는 얘기를 승낙해놓고도 그날 석'을 데리고 나타난 정우의 행동. 초대를 승낙했다는 것은 인영을 믿는다는 의미 또는 인영의 외도(?)를 알면서도 방관하겠다는 의미. 그런데 석'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는 건 방해의 의미 아닌가. 모순되는 행동이다. 질투였을까? 그렇지만 시종일관 보이는 그의 소탈한 웃음에서 질투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고로 기각. 원래 쿨한 사람이라서? 아니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하든 냅두지 들어오긴 왜 들어오남. 이것도 기각. 그렇다면 그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라는 말이 된다. 질투를 가지고 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인영의 흔들리는 마음들을 알지만 결국 포용해주는. 정말 그럴까?
* 인영'의 "나, 다시 태어나면.. 이석으로 태어나고 싶어." 이해 안 가는 말은 아니지만 너무 뜬금없이 나와버렸다. 고등학생이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야 하나?
* 그 수술 자국은 왜들 그리 열심히 보는 걸까? -_-
아쉬운 점:
* 좀더 강인한 인영이었다면. 좀더 덜 어설픈 석이었다면. 초장부터 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원래 강인한 캐릭터들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나라면 좀더 강인한 서른 살을 그렸을거다. 내가 서른에 대해 품는 환상은, 아직 서른을 못 겪어봐서일까.
아... 전체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말했듯이 심리 묘사가 굉장히 치밀하다는 느낌이다. 걱정했던 김정은의 연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게다가 너무 예뻤고.) 정지우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볼 생각인데, 기대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