넵... 요사이 주말마다 찾아오는 '글쓰고싶다병'이 또 도졌습니다.;;;
지난 번에 올린 연애편지(?)의 뒷이야기입니다. 물론 픽션입니다. 픽션의 속편은 픽션을 상속받은 것이므로 픽션.... (풉)
이것도 숙제냐, 그건 아니고 그냥 지가 괜히 궁금해서 써 봤습니다. -_-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저런 편지를 받고 나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고등학교 남학생의 심리묘사라니 고거 한 번 재밌겠구나!!
등등등...
잘 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나면 쪽팔려하면서 지워버릴지도...;;
아 제목은, 편지를 받은 계절이 대략 그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붙여본 거구요.
그럼 즐겨주세요. ^^;
넵 여기까집니다.
여기다 좀 붙여볼까, 하고 처음에 구상했던 설정을 다시 들여다봤는데 많이 달라졌네요. 그래도 처음 설정보다는 결과물이 좀 더 나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보이세요? 편의상 '나'를 K라고 하고 '녀석'을 J라고 하고 얘기해볼게요.
K는 보시다시피, 속으로는 J의 행동을 거슬려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비척' 웃는다든지 '씁쓸히' 웃는다든지 하여튼 실실 쪼개기만 하는 놈입니다. -_-; 그래서 J의 입장에서는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지요. 알면 무서워서 같이 못 있을겁니다;;;
J는, K가 말한 것처럼, 어른인 척 하고 싶어하는 소년입니다. 남자다움을 숭상하고, 남자다워보이길 원하죠. 그렇지만 뭐.. 거기에 나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이에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이지요. 의리라든지 하는 가치들이 이 녀석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인 K를, 그는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몫을 해 주려 할 뿐이지요.
여러가지 잡설.
어디서 술을 마실까, 처음엔 J의 집을 떠올렸지만 부모님이 마음에 걸려서 공원으로 바꿨고요.;
두 사람에게 뭘 먹여볼까, 소주를 먹여볼까 생각하다가 공원에서 그러고 있는 건 너무 청승맞을 것 같아서 좋은 술 먹였습니다. ^^;
그리고 K는 왠지 술을 잘 마실 것 같아서, 가볍게 취기만 돌게 하고 토하지는 않게 했습니다. -_-;;;
써놓고 보니 해설이 개그...;
지난 번에 올린 연애편지(?)의 뒷이야기입니다. 물론 픽션입니다. 픽션의 속편은 픽션을 상속받은 것이므로 픽션.... (풉)
이것도 숙제냐, 그건 아니고 그냥 지가 괜히 궁금해서 써 봤습니다. -_-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저런 편지를 받고 나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고등학교 남학생의 심리묘사라니 고거 한 번 재밌겠구나!!
등등등...
잘 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나면 쪽팔려하면서 지워버릴지도...;;
아 제목은, 편지를 받은 계절이 대략 그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붙여본 거구요.
그럼 즐겨주세요. ^^;
툭. 어떤 손이 어깨를 친다.
고개를 반쯤 돌리고 힐끗, 얼굴을 확인한다. 예의상의 확인이다. 이 독서실에서 내게 아는 척 할 사람이라곤 저 녀석밖에 없으니. 나는 대답 대신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 야, 갑갑하지 않냐? 바람이나 좀 쐬고 오자.
...귀찮은 녀석.
- 아까부터 이 페이지잖아. 공부하는 척 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응?
저 녀석의 실없는 수작에 대꾸하기도 귀찮다. 나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녀석이 억지로 내 손아귀의 샤프를 잡아떼고 나를 일으키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시간쯤 되면 휴게실의 쓰레기통은 온갖 과자봉투와 음료수 캔, 종이컵들로 넘쳐난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밤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이 공기가 선뜩하게 차가워질 무렵이면, 나의 선배들은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험을 치를 것이다. 답안지가 걷히고 낯선 교실을 나서며 선배들이 심호흡을 하는 순간,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선배들이 해방감에 들떠 거리를 누빌 동안, 나는 1년의 달력을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마냥 책만 읽고 꿈만 꾸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딱 1년만, 모두 멀리한 채로, 죽은 듯이 살면 되잖아. 내게 다짐한 그 1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난 숨이 콱 막히곤 한다.
녀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굴리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낡은 소파에 앉아 눈을 비비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두 여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들어와 음료수 캔을 뽑아간다.
- 컴퓨터 쓰려면 써라.
벌써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녀석이 다가오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나는 그가 양보해 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쩐지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지금 나는 내가 몹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그녀의 대답을 특정한 한 가지 매체로 한정해줬어야 했다! 핸드폰이 진동할 때마다, 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닐까, 생각하며 초조해하는 건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그렇지만 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그녀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어제 본 드라마 루루공주에서 김정은이 입고 나온 노란색 원피스가 너무 예뻤다는 둥, 지난 달 전화 요금이 평소보다 배는 나와버려서 남자친구 생긴 걸 엄마한테 들켜버린 것 같다는 둥,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여학생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나는 눈 앞의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참을 만 했다. 때로는 주변의 자잘한 소음이 평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섬광같은 충격은 없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눈앞이 아뜩해진다거나, 별안간 눈물을 쏟는다거나, 주먹으로 벽을 친다거나, 풀썩 주저앉는 것 같은 극적인 반응 따위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읽을 수록, 나는 점점 더 절망적인 기분으로 빠져들었다. 그건 몹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차라리 눈물을 쏟든지 풀썩 주저앉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단지 씁쓸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자잘한 소음은 끊임없이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와 이 휴게실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상기시켰고, 나는 가슴 속에 스며들어오는 감정에 몰입할 수 없는 채로 당혹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나는 녀석이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모니터를 훑어보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이 읽어도 좋을 건 결코 아니지만 저 무모한 호기심은 막을 기운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내 손에서 마우스를 나꿔챘다.
- 뭐냐 이게... 차인 거냐?
피하고 싶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 과장된 말투. 담배 냄새로 몸을 휘감았다고 해서 녀석의 어설픈 연기가 가려지진 않는다.
- 야 사내자식이.. 겨우 실연당했다고 의기소침한거냐?
아침에는 멀끔하던 녀석의 턱에 벌써 수염이 빼죽이 나온 것을 바라보며, 왠지 속이 메슥거려 오는 것을 참았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단지 어른인 척, 사내인 척 하고 싶어하는 어설픈 흉내가 거슬릴 뿐이지. 그렇지만...
녀석은 자못 진지한 표정을 풀고 씩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 세상의 반은 여자야..
순간 속이 울컥한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 네가 내 기분을 알아?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조용히 입 속으로 사그러뜨리며 비척 웃는다. 말해서 뭐하나. 네 녀석 따위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는데.
녀석이 다짜고짜 던지는 가방을 들러메고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은 근처의 공원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며 사라졌던 녀석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부스럭, 봉지 안에 든 것들을 보고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 난 술 마실 줄 몰라.
- 마실 줄 모르면 코로 들어가냐? 그냥 입에 부으면 되는거야. 일부러 비싼 거 사왔더니.
단번에 종이컵을 들이키자 쓰고 화끈거리는 것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식도를 타고 코를 자극하는 알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만다. 말없이 컵을 내밀고, 찰랑거리는 액체를 다시 들이킨다. 가로등 불빛에 남녀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까운 것처럼 천천히 발을 디디며, 웃고 이야기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그림자. 그녀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고 소망했었는데.
-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 ...처음 만났을 때부터.
- 어떤 사람이었는데?
- 특별한 사람.
그래, 특별한 사람이었지.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거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아냐? 이를테면... 그래, 같은 음악을 들으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함께 열광하고, 함께 분노하는 거야. 뇌의 어딘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우리의 언어는 정확히 주파수가 맞았어. 어떤 단어도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이 없었다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 우리 사이엔 오해라는 게 생길 여지가 없었다는 거지. 그래서 언어라는 매개체만 통하면 우리는... 아주 똑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어.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괴로움을 이야기하면, 단지 몇 마디만으로도, 다른 사람 역시 똑같은 괴로움에 짓눌려버려. 이해하냐? 똑같은 인간끼리는 위로라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거야.
그런 이유로... 그 세계엔 행복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았어. 괴로울 때면 의존하게 되고, 그럴 수록 더 괴로워지고......
웬일인지 녀석은 아까부터 말이 없다. 땅콩 껍질을 하나씩 바스러뜨리는 무료한 장난이 계속된다. 나란히 앉아 있었던 탓에, 나는 녀석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듣고 있었을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듣고 이해하길 바랬다기보다는, 그냥 답답한 마음을 지껄이고 싶었을 뿐이니까. 녀석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 난 화장실 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그제서야 온몸에 퍼진 기묘한 나른함을 느낀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이 불연속적으로 뚝뚝 끊긴다. 평소보다 조금 둔해진 듯한 감각이, 꼭 안경을 벗었을 때처럼, 현실의 뚜렷한 윤곽선을 누그러뜨린다. 수도꼭지를 틀고,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군다. 몇 번을 헹궈도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은 좀처럼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하...
다시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가 주장하는 우정이라는 이름도, 내가 억지를 부린 사랑이라는 이름도, 그 무엇도 우리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강렬하게 빠져들었다. 미칠 듯이 괴로웠다.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러니다. 이 격렬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이해줄 단 한 사람인 그녀가, 나를 거부했다는 것.
- 야, 괜찮냐? 지금 토하고 있는 거 아냐? 등 두들겨줄까?
나는 입가의 물을 훔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 괜찮아?
- 어.
- 자식. 마실 줄 모른다더니 잘만 마시네.
녀석에게 멋적게 웃어주고 발걸음을 떼어놓다가, 나는 그만 휘청하며 넘어질 뻔 했다. 제 걸음도 가누지 못하다니, 이런 한심한 꼴을 봤나. 녀석은 잽싸게 나를 붙잡아 제 어깨에 내 팔을 두른다.
- 조심해 임마...
그렇지만 그녀도 나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나는,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댈 필요도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죽을 때까지 복잡미묘한 감정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저 단순한 녀석이 내 쓸데없는 자존심보다는 조금 더 위로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혼자서 버티기 힘들 땐 기대면 된다. 우리는 어차피 나약한 존재들이니까, 서로 어깨를 빌려주면서 그렇게 버텨가면 되는 거다. 이 간단한 걸 왜 이제서야 깨달은걸까... 아니 아직 18살이니까 오히려 이른 셈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내 체중을 싣는다.
- 미안, 어깨 좀 빌릴게.
고개를 반쯤 돌리고 힐끗, 얼굴을 확인한다. 예의상의 확인이다. 이 독서실에서 내게 아는 척 할 사람이라곤 저 녀석밖에 없으니. 나는 대답 대신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 야, 갑갑하지 않냐? 바람이나 좀 쐬고 오자.
...귀찮은 녀석.
- 아까부터 이 페이지잖아. 공부하는 척 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응?
저 녀석의 실없는 수작에 대꾸하기도 귀찮다. 나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녀석이 억지로 내 손아귀의 샤프를 잡아떼고 나를 일으키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시간쯤 되면 휴게실의 쓰레기통은 온갖 과자봉투와 음료수 캔, 종이컵들로 넘쳐난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밤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이 공기가 선뜩하게 차가워질 무렵이면, 나의 선배들은 마침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험을 치를 것이다. 답안지가 걷히고 낯선 교실을 나서며 선배들이 심호흡을 하는 순간,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선배들이 해방감에 들떠 거리를 누빌 동안, 나는 1년의 달력을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마냥 책만 읽고 꿈만 꾸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딱 1년만, 모두 멀리한 채로, 죽은 듯이 살면 되잖아. 내게 다짐한 그 1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난 숨이 콱 막히곤 한다.
녀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굴리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낡은 소파에 앉아 눈을 비비는 한 여학생이 보인다.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두 여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들어와 음료수 캔을 뽑아간다.
- 컴퓨터 쓰려면 써라.
벌써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녀석이 다가오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나는 그가 양보해 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쩐지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지금 나는 내가 몹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그녀의 대답을 특정한 한 가지 매체로 한정해줬어야 했다! 핸드폰이 진동할 때마다, 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닐까, 생각하며 초조해하는 건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그렇지만 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그녀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어제 본 드라마 루루공주에서 김정은이 입고 나온 노란색 원피스가 너무 예뻤다는 둥, 지난 달 전화 요금이 평소보다 배는 나와버려서 남자친구 생긴 걸 엄마한테 들켜버린 것 같다는 둥,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여학생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나는 눈 앞의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참을 만 했다. 때로는 주변의 자잘한 소음이 평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섬광같은 충격은 없었다. 드라마에서처럼 눈앞이 아뜩해진다거나, 별안간 눈물을 쏟는다거나, 주먹으로 벽을 친다거나, 풀썩 주저앉는 것 같은 극적인 반응 따위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읽을 수록, 나는 점점 더 절망적인 기분으로 빠져들었다. 그건 몹시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차라리 눈물을 쏟든지 풀썩 주저앉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단지 씁쓸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자잘한 소음은 끊임없이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와 이 휴게실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을 상기시켰고, 나는 가슴 속에 스며들어오는 감정에 몰입할 수 없는 채로 당혹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나는 녀석이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모니터를 훑어보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이 읽어도 좋을 건 결코 아니지만 저 무모한 호기심은 막을 기운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내 손에서 마우스를 나꿔챘다.
- 뭐냐 이게... 차인 거냐?
피하고 싶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 과장된 말투. 담배 냄새로 몸을 휘감았다고 해서 녀석의 어설픈 연기가 가려지진 않는다.
- 야 사내자식이.. 겨우 실연당했다고 의기소침한거냐?
아침에는 멀끔하던 녀석의 턱에 벌써 수염이 빼죽이 나온 것을 바라보며, 왠지 속이 메슥거려 오는 것을 참았다. 나쁜 녀석은 아니다. 단지 어른인 척, 사내인 척 하고 싶어하는 어설픈 흉내가 거슬릴 뿐이지. 그렇지만...
녀석은 자못 진지한 표정을 풀고 씩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 세상의 반은 여자야..
순간 속이 울컥한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 네가 내 기분을 알아? 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조용히 입 속으로 사그러뜨리며 비척 웃는다. 말해서 뭐하나. 네 녀석 따위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는데.
녀석이 다짜고짜 던지는 가방을 들러메고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은 근처의 공원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며 사라졌던 녀석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부스럭, 봉지 안에 든 것들을 보고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 난 술 마실 줄 몰라.
- 마실 줄 모르면 코로 들어가냐? 그냥 입에 부으면 되는거야. 일부러 비싼 거 사왔더니.
단번에 종이컵을 들이키자 쓰고 화끈거리는 것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식도를 타고 코를 자극하는 알콜 냄새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만다. 말없이 컵을 내밀고, 찰랑거리는 액체를 다시 들이킨다. 가로등 불빛에 남녀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까운 것처럼 천천히 발을 디디며, 웃고 이야기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그림자. 그녀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고 소망했었는데.
-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 ...처음 만났을 때부터.
- 어떤 사람이었는데?
- 특별한 사람.
그래, 특별한 사람이었지.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거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아냐? 이를테면... 그래, 같은 음악을 들으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거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함께 열광하고, 함께 분노하는 거야. 뇌의 어딘가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우리의 언어는 정확히 주파수가 맞았어. 어떤 단어도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이 없었다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 우리 사이엔 오해라는 게 생길 여지가 없었다는 거지. 그래서 언어라는 매개체만 통하면 우리는... 아주 똑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었어.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괴로움을 이야기하면, 단지 몇 마디만으로도, 다른 사람 역시 똑같은 괴로움에 짓눌려버려. 이해하냐? 똑같은 인간끼리는 위로라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거야.
그런 이유로... 그 세계엔 행복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았어. 괴로울 때면 의존하게 되고, 그럴 수록 더 괴로워지고......
웬일인지 녀석은 아까부터 말이 없다. 땅콩 껍질을 하나씩 바스러뜨리는 무료한 장난이 계속된다. 나란히 앉아 있었던 탓에, 나는 녀석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듣고 있었을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듣고 이해하길 바랬다기보다는, 그냥 답답한 마음을 지껄이고 싶었을 뿐이니까. 녀석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 난 화장실 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그제서야 온몸에 퍼진 기묘한 나른함을 느낀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이 불연속적으로 뚝뚝 끊긴다. 평소보다 조금 둔해진 듯한 감각이, 꼭 안경을 벗었을 때처럼, 현실의 뚜렷한 윤곽선을 누그러뜨린다. 수도꼭지를 틀고,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군다. 몇 번을 헹궈도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은 좀처럼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하...
다시 그녀 생각이 난다.
그녀가 주장하는 우정이라는 이름도, 내가 억지를 부린 사랑이라는 이름도, 그 무엇도 우리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강렬하게 빠져들었다. 미칠 듯이 괴로웠다.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나와 그녀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이러니다. 이 격렬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이해줄 단 한 사람인 그녀가, 나를 거부했다는 것.
- 야, 괜찮냐? 지금 토하고 있는 거 아냐? 등 두들겨줄까?
나는 입가의 물을 훔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 괜찮아?
- 어.
- 자식. 마실 줄 모른다더니 잘만 마시네.
녀석에게 멋적게 웃어주고 발걸음을 떼어놓다가, 나는 그만 휘청하며 넘어질 뻔 했다. 제 걸음도 가누지 못하다니, 이런 한심한 꼴을 봤나. 녀석은 잽싸게 나를 붙잡아 제 어깨에 내 팔을 두른다.
- 조심해 임마...
그렇지만 그녀도 나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나는,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기댈 필요도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죽을 때까지 복잡미묘한 감정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저 단순한 녀석이 내 쓸데없는 자존심보다는 조금 더 위로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혼자서 버티기 힘들 땐 기대면 된다. 우리는 어차피 나약한 존재들이니까, 서로 어깨를 빌려주면서 그렇게 버텨가면 되는 거다. 이 간단한 걸 왜 이제서야 깨달은걸까... 아니 아직 18살이니까 오히려 이른 셈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내 체중을 싣는다.
- 미안, 어깨 좀 빌릴게.
넵 여기까집니다.
여기다 좀 붙여볼까, 하고 처음에 구상했던 설정을 다시 들여다봤는데 많이 달라졌네요. 그래도 처음 설정보다는 결과물이 좀 더 나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보이세요? 편의상 '나'를 K라고 하고 '녀석'을 J라고 하고 얘기해볼게요.
K는 보시다시피, 속으로는 J의 행동을 거슬려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비척' 웃는다든지 '씁쓸히' 웃는다든지 하여튼 실실 쪼개기만 하는 놈입니다. -_-; 그래서 J의 입장에서는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지요. 알면 무서워서 같이 못 있을겁니다;;;
J는, K가 말한 것처럼, 어른인 척 하고 싶어하는 소년입니다. 남자다움을 숭상하고, 남자다워보이길 원하죠. 그렇지만 뭐.. 거기에 나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이에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이지요. 의리라든지 하는 가치들이 이 녀석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인 K를, 그는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몫을 해 주려 할 뿐이지요.
여러가지 잡설.
어디서 술을 마실까, 처음엔 J의 집을 떠올렸지만 부모님이 마음에 걸려서 공원으로 바꿨고요.;
두 사람에게 뭘 먹여볼까, 소주를 먹여볼까 생각하다가 공원에서 그러고 있는 건 너무 청승맞을 것 같아서 좋은 술 먹였습니다. ^^;
그리고 K는 왠지 술을 잘 마실 것 같아서, 가볍게 취기만 돌게 하고 토하지는 않게 했습니다. -_-;;;
써놓고 보니 해설이 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