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가 배고프다고 낑낑대서 오랜만에 포스팅 좀 하러 왔습니다. ^^;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디자인과 생활> 과목 숙제로 쓴 final essay입니다. 부족하지만 그저 즐감해주세용~ ^^


Ideo Design: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여는 말
지난 가을 나는 스톡홀름의 KTH에 있었다. 그 예쁘다는 유럽에 가서 여행도 사절하고 학교에 콕 눌러앉아 교환학생답지 않게(?) 빡빡한 과목들을 수강하며 숙제로 괴로워하고 있던 나날들 속에, 아무래도 가장 큰 기억을 남긴 것은 <Human Computer Interaction: Principles and Design>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인간 컴퓨터 상호 작용에 관련한 기본적인 이론을 습득하고, 과제로는 조별 프로젝트로 실용적인 실습[1] 을 주로 했다. 고되었지만 과제도 시험도 무사히 치러 내 뿌듯했고, ‘전공자만큼 깊이 이해하지는 않아도 이젠 나름대로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할 거리가 생겼겠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환학생의 여정을 끝내고 대전에 돌아왔을 때 여유로운 마음으로(?) 제출한 나의 첫 번째 숙제는 다음과 같았다.

“My idea of Design can be summarized as a way of communication, by which a designer and users and the product itself can interact.”

그리고는 그 <Human Computer Interaction>을 같이 수강했던 친구 Jure에게 자랑스럽게 완성된 PPT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친구가 실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설명하고 있는 건 user-centered design process야. 유럽에서의 6개월이 네겐 아무 쓸모가 없었구나!”
 
HCI 수업에서 같은 조 멤버들과 함께 (사진 제공: Nasim Mahmud)

HCI 수업에서 같은 조 멤버들과 함께 (사진 제공: Nasim Mahmud)



1.    Design:  디자인, 디자이너,, 그리고 엔지니어
석 달 전까지 시험 범위라고 줄을 그으며 읽어댔던 Donald A. Norman의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나 조별 프로젝트를 하며 다루었던 여남은 가지의 방법론들은 일단 잊기로 했다.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와 수업을 경청했다. 이건표 교수님의 다채롭고도 풍부한 강의는 들으면 들을 수록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개념들을 느꼈고, 그럴 수록 살짝 부끄러워졌다.

“디자인은 fashion도 style도 drawing도 아니다.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가시적/비가시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는 것 자체도 역시 디자인이며, 이것이 사실은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내 숙제에서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교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디자인은 내가 위에서 말한 의사소통의 수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발생하는 온갖 문제들을 정의하고, 때로는 발견하며, 해결해나가는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개념인 것이다.

“공학 또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협력은 항상 어렵다. 디자이너와 잘 협력하는 법을 익혀라. 디자인의 넓은 개념을 이해해라. 여러분이 하는 일은 모두 디자인이다.”

나의 짧은 견문에 비추어 생각해봐도 이 협력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NHN에 합병된 검색회사 ‘첫눈’에서 4개월 간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에도 기획자(디자이너)와 개발자(엔지니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던 것 같다. 웹프로그래밍을 5년이 넘게 해 온 한 개발자 분은 지난 회사에서 수시로 바뀌는 디자인에 따라 코드를 되풀이하여 고쳐야 했던 고충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검색 모델의 개선에 관여하고 있던 한 기획자 분은 개발자들의 기술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워 논의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었다. 회사에서 종종 열리곤 했던 각종 세미나에서, 개발자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재귀recursion’이라는 개념을 기획자들이 이해하지 못해 개발자들이 진땀을 빼며 설명하던 적도 있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실질적으로 구현이 가능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의 작은 차이가 기술적으로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지,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짜야 기술적으로도 효율적인 설계가 나올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디자이너들이 데이터베이스와 운영체제, 대규모 시스템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방책이겠으나, 그것이 어렵다면 엔지니어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친구 Jure의 초대로 슬로베니아의 오픈소스소프트웨어 커뮤니티 Kiberpipa[2] 에 방문하여 2주간 함께 활동하면서 나는 이 원활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실마리를 엿보았던 것도 같다. 이곳에서는 오픈소스 개발 뿐만 아니라 여러 아티스트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협력하여 흥미로운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실체화하는 데에 있어 의사소통의 벽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티스트들은 엔지니어의 기술적인 관점에서부터 나오는 의견을 적극 수용했고, 엔지니어들은 아티스트의 의도를 최대한 구현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루는 류블랴나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한 아티스트의 작업을 도운 일이 있었다. Space Junk Spotting[3] 이라는 프로젝트였는데, Saso라는 아티스트가 아이디어와 기본적인 스케치, 반 년 간 개발한 미완성의 구현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완성시키고 시스템의 다른 부분에 연동하여 실제 전시장에서 3개월간 작동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전시회의 시작까지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 조금 촉박해 보였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다.
여기서 Saso와 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Bostjan의 활약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Bostjan이 한 일은 먼저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예술활동(?)에 참여해보고픈 나의 소망을 이해하고, 나의 프로그래밍 실력에 대해 비록 구두로였지만 확인하고, 현재 커뮤니티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곧바로 Saso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다소 추상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설명을 듣고 이것을 엔지니어인 내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전체 시스템의 구조를 깔끔하게 그려내어 Saso와 내가 같은 mental model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Saso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마감 순간이 다가와 초조해하던 Saso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두 시간 정도면 완성될 것 같다’고 말했고 Bostjan은 ‘개발자들이 저렇게 말할 때는 이틀 정도를 의미하니 그냥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게 좋겠다’라고 친절히(?) 귀뜸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작업은 정말로 두 시간 만에 끝났고 초조해하던 Saso와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저녁 전시회의 오프닝에서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한국에서 온 천재 해커 소녀’ 취급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 물론 Bostjan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순탄치 못했을 작업이었다.
Bostjan은 Kiberpipa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프로젝트에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커뮤니티에서 그가 필수적인 존재임이 내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회사에서도 그러한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극히 적었음에도 그들은 IT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연결하여 실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혹여 없더라도,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상호적으로 노력하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간극은 조금 더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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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Junk Spotting (사진 제공: Saso Sedlacek)



2.    Ideo Design:  컨셉디자이너와 Google
한때 ‘컨셉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기계과에서 개설되는 <인간과 기계>라는 과목에서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을 쓰며 이 가공의 직업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바를 적어보았었는데, 이 자서전의 일부분을 여기에 붙여본다.

“제품은 그 제품 하나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어떤 부분에 자리잡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지 등등, 그 제품을 둘러싼 주변의 문맥까지가 모두 제품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간다.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진 제품은 그 자체가 이미 환상이며 꿈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닌 ‘이야기’를 사는 것이다. 컨셉디자이너는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컨셉을 잡는 것을 돕는다. 제품의 기능, 외관 디자인에서부터 광고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이 ‘이야기’를 잡아주는 것이다. 회사의 경우도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빼면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한부의 고용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살고있는 현대에, 회사 전체가 한 마음이 되어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가슴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컨셉디자이너는 먼저 그 회사의 사람들, 중역에서부터 신입사원까지를 두루 만나보며 그들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 등을 파악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 뿐만 아니라 조직의 체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도 병행하게 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표점, 그들 모두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이상이자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약속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컨셉디자이너의 지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획자나 경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경영 컨설턴트, 통계학자, 종종은 심리학자들까지도 동원된다.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는 각본이 되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고, 한 줄의 카피가 되어 버스 옆구리에 커다랗게 실리기도 하고, 그림이 되어 건물 전체의 외벽에 도색되기도 한다. 좌우간 회사 전체의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 <인간과 기계> 과목 숙제로 제출했던 본인의 <20년 뒤의 나의 자서전> 중에서

디자인과 생활 수업을 듣고 이제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가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그려 보고자 했던 것은 바로 Tiger의 Four Pleasures 중에서 Ideo라는 측면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개인적인 자기정체성과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 주도적story-driven 디자인. 개인의 특질을 존중하고, 개인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흐름일 것도 같다.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예로 드셨던 Apple사가 단연 이 Ideo Design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나는 내 인생에서의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졸업 후 Google의 취리히 연구 센터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할 계약을 맺은 것이다. (덕분에 20년 뒤에 내가 ‘컨셉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었다) 지인들로부터 축하와 격려와 염려를 동시에 받으면서 나는 ‘전산학도에게 Google이 멋진 직장임엔 틀림없지만, 전산학과가 아닌 사람들마저 내 취직 소식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보았었다. 단지 주변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취업 대상이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한 요인으로 Google이 그 동안 대중들에게 보여온 비전을 꼽으려 한다. 먼저, “Don’t be evil”이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모토에서부터 시작한, 외부의 정치력에 휘둘리지 않고 사람의 수작업으로 오염되지 않을 순수한 기술에 대한 그들의 포부가 사람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애정을 심어 준 까닭이다. 거대한 포탈 서비스를 옆에 끼고 수익 모델을 고안하는 여느 검색엔진들과는 달리 순수하게 검색에만 집중하여, 사람들을 그다지 성가시게 하지 않는 소박한 몇 줄짜리 광고로 돈을 벌겠다는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관성 있게 지켜 온 단순명료한 인터페이스와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로고 디자인 또한 점점 복잡다단해지는 웹 환경 속에서 피로해져 가는 사람들의 눈을 자연스럽게 길들이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해왔을 터였다. 채용에 있어 길게는 14회까지 걸쳐 진행된다는 강도 높은 기술 면접, 엔지니어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와 창의적인 사무실 분위기 역시 기술에 대한 그들의 고집스러운 애착을 보여주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9년의 세월에 걸쳐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오늘날 Google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움직이는 Google의 이러한 ‘이야기’ 역시 Ideo Design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형적인 구글의 인터페이스 (http://www.google.com/에서 캡쳐)

전형적인 구글의 인터페이스 (http://www.google.com/에서 캡쳐)



닫는 말
내게 <디자인과 생활> 수업은 디자인의 귀중한 원리와 원칙들, 디자인을 둘러싼 각종 생각할 거리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여러 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 디자이너로서(혹은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 그리고 인생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교훈 몇 가지를 얻은 참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 마지막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developmental tasks가 몹시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교수님께서는 30대까지는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기본적인 기교를 연마하고, 40대에는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며, 50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조직을 이끌거나 좋은 책을 쓰거나 하여 사회 기여에 이바지하는 등, 사람에게는 나이에 걸맞게 따라가야 할 단계적인 성장 과정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40대 이후에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까, 애매하게 흩어져 있던 생각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이 되기 위해 어떠한 것을 다듬어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이 수업에서의 소중한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나아가려 한다.


[1] 실습 과제로는 heuristic evaluation, rapid prototyping, usuability test 등을 주로 다루었다.
[2] Kiberpipa, <http://www.kiberpipa.org/>
[3] Space Junk Spotting,
<http://www.sasosedlacek.com/anglesko/projects_Spacejunk_eng.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