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눈이 많았던 겨울이 끝나고 꽃피는 계절에 찾아온 부활절 연휴. 회사 친구들과 함께 드미트리가 살고 있는 탈린에 놀러가기로 했다. 전날까지 감기로 고생하던 나는 약 네 봉지를 입에 털어넣고 12시간의 수면 뒤에 가까스로 원기를 회복했다. 여전히 정신없는 공항의 아침. 일단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공항 도착했어. 근데 우리 어디 가는거야?"
수화기 너머로 저희들끼리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콕이라고 해 방콕'
4시간 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탈린에 도착했다.

취리히에는 눈부신 햇살 아래 사람들이 죄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봄꽃이 만발하고 있건만. 이 북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봄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항 건물을 나서면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나는 황급히 옷깃을 여몄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북방 지역엘 또 왔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에릭은 계속 내 구겨진 얼굴을 보며 좋아라했다. 다행히 드미트리의 집은 무척 따뜻한 온돌집이었다. 거리에선 을씨년스러워보이던 겨울나무들도 홍차 한 잔에 몸을 녹이며 발코니에서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은가. 간사하게도.

탈린은 저 먼 중세의 느낌이 곳곳에 남아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옛 시가지는 붉은 지붕들이 널찍하게 이어져있고 여린 겨울햇살을 받은 담벼락이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수도사 복장을 한 웨이터들이 서빙을 하는 카페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누군가가 투덜거려 도로 거리로 나왔다. 중세의 레시피대로 요리를 하는 식당에서는 푸짐한 오리요리와 꿀맥주가 일품이었다. 웨이터들이 모든 요리에 대해 재료를 일일히 설명해주었다. 실내가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나. 러시아 전통음식 식당은 첫 음식이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맛은 꽤 훌륭했다. '저 주방에 요리사 딱 한 명 있다'고 빈정거리던 우리도 결국 하나씩 나오는 음식에 느긋하게 배가 불러왔다. 평소에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샤오펑도 이날은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도시 이곳저곳에 조금씩 남아있는 구소련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선함이었다. 샤오펑을 제외하고 구소련의 유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은 그 시대의 조각상이나 기념비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댔고 드미트리는 그런 우리를 더 신기해했다.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던 시점에 에스토니아인들은 구소련에 관련된 모든 유적 유물들은 철저히 부숴버렸다고 한다.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의지에는 십분 공감을 하지만, 그래도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에 더 끌리는 법이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마니쉬가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스탈린 아내가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다고 하던데."
"그야 당연하지."
"왜?"
"네가 하루종일 세계정복을 위해 힘쓴다고 쳐. 어느 나라의 전쟁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울먹이지.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애정이 식었어... 어쩌고저쩌고."

탈린에서 해로로 두 시간 반이면 헬싱키에 다다른다. 이미 탈린에서 볼 만한 것도 다 봤겠다, 핀란드에 있는 친구를 방문할 예정인 에릭을 따라 일행은 예정에 없던 바이킹라인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핀란드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고 시스템은 사회주의에 가깝다. 길고 음울한 겨울 탓에 우울증 환자나 마약 중독자가 많은 편이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주류 판매가 주중의 특정 시간, 특정 판매처로 제한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에는 주류 판매처마다 줄 서서 기다리는 알콜 중독자들을 볼 수 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스톡홀름처럼 탁 트인 북방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던 나의 기대는 바이킹라인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술을 박스째 끌고 갑판에 오르는 사람들의 초점잃은 눈들. 밤새 파티에서 놀고 새벽 배를 타는 듯한 십대들의 헝클어진 머리. 이 배의 단골인듯 가벼운 아침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후줄근한 옷차림. 마니쉬는 아까부터 예쁜 여자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며 야단이었다.

일단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간이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스크램블에그와 소시지, 우유 한 컵을 샀다. 한 입을 베어물고 설마했다. 다시 또 다른 것을 한 입 먹어봤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접시 위에 있는 것 중에 아무 것도 맛이 없어."
마니쉬가 열렬히 동의를 표했다. "진짜 이렇게 허술한 아침은 처음 먹어본다. 전부 다 맛이 형편없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최소한 이 소시지는 말이지. 음. 맛이 있잖아?"
곧 에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왔다. "음, 아침식사 가격이 무척 저렴하군." 포크가 몇 번을 오간 뒤 그는 말했다. "음, 품질도 저렴하군."

에릭은 친구를 만나러 떠나고 샤오펑은 새로 장만한 DSLR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부지런히 길을 나섰지만, 마니쉬와 나는 옹동하니 주저앉은 하늘과 잿빛 거리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무채색의 옷을 입었고 표정에도 활기가 없었다. 거리의 차들은 일 주일쯤 세차를 안 한 듯 지저분했다. 마니쉬가 중얼거렸다. "다 햇볕이 부족한 때문이야." 추위 속을 걷다 지쳐 무조건 눈에 보이는 트램을 타고 앉아 바깥 구경을 했다. 독특한 건물들이 종종 보였고, 스웨덴에서 보아온 익숙한 상표들도 보이고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스웨덴어로 단어 몇 개를 읽으며 아는 척도 했다.
"이케아랑 호엠이 둘다 스웨덴 상표라고?"
"실제로 유사성이 느껴지지 않아? 이케아 디자인와 호엠 디자인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잖아."
"가구랑 옷 사이에서 무슨 공통점을 찾으라는 거야?"
"...뚜렷한 원색에 큼직큼직한 패턴을 주로 쓴다든가, 매끈하게 떨어지는 선이라든가 하는 것."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동경하는 인도 남자와 겨울마다 오리털이불에 틀어박혀 사는 한국 여자. 이렇게 죽이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낮잠을 실컷 잔 다음 사우나를 하고, 몸이 좀 가벼워진 우리는 느적느적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러 갔다. 샤오펑은 '재밌게 놀아!'라는 문자 한 통만을 남기고 숙소에 들어간 참이었다. 몇 개의 바를 전전하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70년대풍의 라이브 클럽에 눌러앉았다. 어디서들 구했는지 70년대의 최신유행 패션으로들 차려입은 사람들.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의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해보였다.
"우리가 오늘 한 일이 이 나라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이었을거야."
"이 나라에 사우나가 발달한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날씨가 암울한데 사우나하고 술마시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있을리가 없지."
"아니 지금까지 불평만 했지만... 뭐... 그래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도시야."
"그 말이 불평보다 더 심하게 들리는데."

다음날 항구에서 다시 만난 에릭의 감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친구가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여기까지 자길 보러 와 줬다고. 결혼식 이후로 방문객은 내가 처음이래."
단 하루였지만 궂은 날씨와 혹독한 추위에 질려버린 우리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신이 났다. 멀어져가는 헬싱키의 항구를 바라보며 에릭은 매우 프랑스적인 촌평을 했다.
"자기 나라를 떠나는 산업이 이렇게 발달한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어떤지 알 만 하지."
배가 탈린을 향하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불평해오던 취리히의 흐린 날씨와 구질구질한 빗줄기가 이곳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같은지, 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들과 패셔너블한 젊은이들로 넘쳐나는지, 그것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얼마나 가치있었는지를 떠들어댔다. 고작 두 시간 반 거리의 탈린에는 축복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빛났다. 이 약간의 위도와 경도 차이가 얼마나 인간이 받을 수 있는 햇볕의 양을, 국민들의 성격을, 옷차림을, 삶의 질을 바꿔놓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살아갈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위대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것이 일반인에게 가능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진다.

드미트리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우리는 취리히에 돌아왔다. 일 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씨 불평을 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잿빛 거리와 하늘 말고도 그 나라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 무표정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봤다면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웅크린 하늘의 도시들, 탈린과 헬싱키. 너무 혼쭐이 나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기에 괜한 궁금증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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