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
옛 사람들의 흔적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그리 크지 않은 땅.

입동을 하루 앞둔 날, 슬며시 겨울의 찬바람 냄새가 풍겨왔지만 가을 햇볕은 기막히게 따사로웠다.
활엽수로만 이루어졌다는 함양상림. 백여종 활엽수들의 가지각색 단풍이 햇살에 반짝였다.

어느 중학교 교정.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해맑은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레 나의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아담하고 소박했던 교정과, 내가 사랑했던 앙증맞은 화단이 떠올랐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지식인들의 흔적을 둘러보면서...
어렸을 때는 마냥 우상처럼 생각했던 역사 속의 선각자들의 모습이, 이제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오히려 무한한 경외감이 생겨난다.
역사 속의 그들의 위치는 신과도 같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나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음을 깨달으며... 어떻게 그들은 한 발 먼저, 한 치 더 높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일까. 나로선 나의 시대를 이해하는 것도 벅찬데.
다시금 되뇌어본다. 나는,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

가로등이 도열한 고속도로를 달리면, 명절 생각이 난다.
친척들이 분주히 오가고 구수한 기름 냄새가 풍겨오는 할머니댁의 명절도 그립지만, 그보다도
인천에서 경남까지 멀고 먼 귀성길, 밤새도록 고속도로를 달릴때, 뒷자리에서 곤히 잠든 어머니와 동생 잠이 깰까봐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소녀,
고민도 많고 꿈도 많던 그 영리한 소녀의 모습으로 자꾸만 기억이 달음질쳐 간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슬퍼했던, 언젠가부턴 포기했던 나의 소중한 것들이 사실은 날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것, 단지 내가 잊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 소녀는 말해주었다.

무엇도,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슬퍼할 것 하나, 아쉬워할 것 하나 없다.
내 안의 소리에 다시금 귀기울여보자.
그 소리는 분명 아름다울테니까...